지난 주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상설전에서 찍어온 하나의 작품이 있다.
전시장을 돌다 보면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유난히 끌리는 작품이 있다.
끌리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 그냥...
우리는 모든 일에 논리적으로 대응하고 항상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생각보다 많은 순간에서 논리보다는 직관이 앞서고, 그 직관에 이유를 덧붙여 논리로 무장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한다.
이유 없이 빠져들고,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을 스스로 분석해보고 싶어 그 이유를 찾아 나선다.
‘왜일까? 무엇 때문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깊은 생각을 하면서 답을 찾아간다.
알 수 없는 내 마음,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이유를 좇는 과정은 결국 나를 탐색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들여다보는 동안 직관적으로 끌렸던 부분에 조금씩 의미가 생겨난다.
우리는 시간의 축적으로 무수히 많은 흔적을 쌓아왔다.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경험과 감정이 차곡차곡 스며들었다. 그 흔적들이 내 안에 켜켜이 쌓여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끌리는 것에 한 번 더 눈이 가고, 귀가 열리고...
이렇게 시간의 축적으로 쌓인 나만의 데이터가 결국 순간적으로 느끼는 직관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설명이 필요치 않는 감각적인 깨달음 말이다.
미술작품이나 음악같은 예술의 영역에서도, 사람을 마주하는 인간관계 속에서도 논리보다 늘 직관이 먼저였다. 직관적으로 좋으냐, 끌리느냐를 거쳐 궁금증이 생기고, 그제야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과정을 밟아왔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나라는 사람은 지금껏 논리적인 척하며 살아왔던 듯싶다. 스스로를 논리적인 사람이라 믿었다. 하지만 직관이 먼저였고, 논리는 언제나 그 직관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일 때가 많았다.
‘그 작품이 왜 좋은지, 그 음악은 왜 좋은지, 그 아티스트는 왜 좋은지...’
그냥 끌리는 마음을 조금 더 구체화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다양하고 풍부한 표현이 필요하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왜 싫은지’가 아니라 ‘왜 좋은지’를 설명하고 싶다는 점이.
좋은 것에 대한 논리를 위해, 지금 나에겐 더 넓은 어휘와 더 섬세한 마음의 언어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