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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형 J, 살림 앞에선 P

by Balbi


요즘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면 자연스레 MBTI를 묻는다. 과거 혈액형과 별자리로 사람의 특장점을 파악하고 분류하던 것이 지금은 MBTI로 넘어왔다. 지구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을 너무 단순하게 몇 가지의 특징으로 분류하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묘하게 들어맞는 부분들도 많다. 그 내용을 보며 서로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고, 나와 다른 상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곤 한다. 그러나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 몇 가지의 분류로 상대를 규정지으며 미리 재단하고 단정 짓는 일이다. 그것만 아니라면 서로를 이해하는데 좋은 심리검사라는 생각이다.


난 여러 번 검사를 해봐도 매번 나오는 건 ENTJ다. 몇 년 전 처음으로 INTJ가 나왔던 적이 있는데, 당시 약 복용 직전의 우울증을 겪었던 때라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매번 E가 나오고 있지만 문득문득 ‘나 I 같은데…….’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진짜 I 성향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조차 안한다니 난 그냥 E인걸로 생각하기로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이를 먹으며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성질이 여러 경험을 통해 변화된 것이다. 다양한 경험과 인간관계를 통해 다듬어지고 잘려나가며, 스스로 치유를 거쳐 내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변화된 부분을 또 하나 꼽자면 소문자 j에서 대문자 J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변화도 선택적이다. 모든 부분에서는 확실하게 대문자 J가 맞는데, 왜 유독 집안 살림에는 대문자 P 가 되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본다.

‘태생적으로 집안일이 나와 맞지 않아서 아닐까?’


ENTJ는 기본적으로 바깥일에 특화된 성향이라는 생각이 크다.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이 집에 콕 틀어박혀 살림을 하려니 선택적으로 대문자 P가 되는 것이다. 계획적으로 살림을 하려고 몇 번 시도해 봤으나 번번이 무산됐다. 요일과 시간을 정해 세탁기, 청소기를 돌리고 냉장고를 뒤져 반찬을 만드는 등 나름 대문자 J다운 살림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실패, 실패.


글을 쓰며 다시 한 번 살림에도 대문자 J다운 태도로 도전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겨난다.

냉장고에 무엇이 있나? 표고버섯, 양파, 가지, 오이, 단호박, 당근, 애호박, 무, 두부, 계란.

냉동실에는 시레기, 양념된 불고기와 제육, 냉동 새우와 해산물.


창의력이 넘쳐나야 이 재료들로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를 텐데, 순간의 멍해진다. 위의 재료들을 보고도 오이무침과 된장찌개만 생각나니 창의성의 부재다.


애정을 갖고 재미가 있으면 창의성이 막 샘솟을 텐데……. 결국 창의성도 노력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재미가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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