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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프레젠테이션 : 덕질하는 엄마의 시선

by Balbi


나는 지금 덕질 중이다.

덕질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깊이 빠져드는 행위를 뜻한다. 단순히 아티스트나 스포츠 스타를 좋아하는 행위만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찾아보고, 모으고, 몰입하는 행위도 포함된다.


요즘 나의 덕질은 사춘기 아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덕질을 해보니, 이것이 호불호가 강한 사람들이 주로 하는 행위 아닐까 싶다. 우리 아들도 나만큼이나 호불호가 분명하다.

‘얜 도대체 누구 닮아서 이런 거야?’ 하고 생각해보니 답은 명확했다. 바로 나였다.

누굴 탓하겠는가. 유전자는 어쩔 수 없는 걸.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명확하고 확실했던 아이였다. 그러나 내 꿈은 일찍 좌절되고 말았다. 핑계일지 모르지만, 35년 전에는 인터넷도 없고,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는 데 단 하나의 방법밖에 없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지금 같았으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 봤을 텐데…….


35년! 쓰고 보니 엄청나게 오래된 시간이다. 그동안 강산이 열두 번도 더 바뀌었을 세월이다. 나는 조금 돌아가긴 했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다. 가끔은 생각한다. 만약 잘 닦여진 고속도로처럼 곧고 빠른 길을 걸었다면 어땠을까? 내 삶의 방향이 지금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가끔 엄마도 오래전 이야기를 꺼내며 “뒷바라지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하신다. 그럴 때 나는 “그때 그렇게 해줬으면 나 지레 질려서 안 했을 수도 있어!” 하고 웃으며 넘기지만, 아주 가끔은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웃기게도 나이 오십이 되어서도 이런 생각을 한다. 채워지지 않은 결핍은 평생 가슴 한편에 남아있나 보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아이들이 강하게 무언가를 희망할 때, 열심히 뒷바라지는 못해주더라도 그 길을 막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살고 있다.


요즘 아들은 기타에 푹 빠져 있다. 중학교에 갓 입학한 3월에는 과학고에 가겠다고 하더니, 불과 몇 달 만에 예술고에 가고 싶다고 한다. 아이의 생각이 시시각각 변하지만, 그냥 흘려들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예고 관련 정보도 찾아보고, 실용음악 학원도 알아보며 나름대로 정보를 하나씩 모으고 있다.


몇 주 전, 아들은 학교 밴드부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며 부서진 통기타 대신 새 기타를 빨리 사야 한다고 조르기 시작했다.


“엄마 영상 봐봐. A 모델은 바디가 예쁘고 소리가 찰랑거려. B 모델은 소리가 묵직해.”

아들은 기타 모델을 열거하며 며칠 동안 내 정신을 빼놓았다.


결국 일요일 오후, 또 기타 이야기를 꺼내기에 “PPT를 만들어 비교 분석해 와”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녀석! 한두 시간이 지나자 PPT를 다 작성했다며 프레젠테이션을 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아들은 TV와 컴퓨터를 연결해 작성한 PPT를 띄우고 프리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어머…….너 뭐니?’

장난스런 PT가 아니고 너무나 진지하게 인사까지 하며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크래프트 갓인어스, 헥스 CA500CE, 고퍼우드 i365RCE 기타 비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아들은 기타 바디 설명부터 각 모델별 가격, 사양, 특장점을 하나하나 설명하며 비교 분석해 최종 점수를 매겼다.


-크래프트 갓인어스 7

-헥스 CA500CE 4

-고퍼우드 i365RCE 3


“세 개의 모델을 비교 분석해서 점수를 매긴 결과 크래프트 갓인어스가 7점이 나와 세 개의 모델 중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깜짝 놀랐다. 막연히 “이게 젤 좋아요!”라고 주장하는 대신, 분석과 비교를 통해 논리적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는가! 너무나 진지하고 설득력 있는 PT를 보니 기타를 안 사줄 수가 없었다.


새로 산 기타는 기타를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디자인이 예쁘고 소리가 아름다웠다. 아들은 기타를 받자마자 학원 갈 시간도 미뤄가며 기타와 한몸이 되었다. 심지어 친구들까지 불러 모아 기타를 자랑하고 연주하느라 학원 숙제도 제대로 못 했다. 첫날이니 이해는 했지만, 언제까지 잔소리를 참을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아들의 기타 PT를 보며 깨달았다. “네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일에는 이렇게 열정적이구나.” 공부를 대충대충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속이 터지고 뚜껑이 열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좋아하는 일에는 이렇게 몰두하는 모습을 보니 잔소리를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아이를 지켜보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 하지만 덕질하는 마음으로, 아들의 열정을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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