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글감 [오랜만에]를 보니 문득 그때가 떠오른다.
1990년 봄.
여중을 다니다 남녀공학으로 배정된 고등학교는 낯설었다. 그때의 나는 어떤 아이였는지 기억이 희미하지만 지금처럼 용감하지 않았다는 건 확실하다.
점심시간이면 친구들과 창문에 매달려 운동장의 아이들을 구경했던 기억이 있다. 또렷하게 기억나는 장면은 농구대에서 늘 핑크색 셔츠를 입고 농구를 하던 아이다. 어느 순간부터 핑크색 셔츠가 계속 눈에 들어왔다. 농구와 어울리지 않는 셔츠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농구 폼이 멋있어서였을까. 어쨌든 그에게 눈이 가고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노란색 셔츠, 어떤 날은 하늘색 셔츠를. 유난히 셔츠가 잘 어울리는 아이로 기억한다.
그때의 소심했던 나는 관심의 표현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멀리 전학을 갔다. 그래서일까 핑크색 셔츠를 보면 자꾸 그때가 생각난다.
그리고 그때 점심시간에 흘러나왔던 노래. 김현철 1집이 유난히도 자주 나왔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그 노래들이 흘러나오면 어김없이 그때의 풍경이 스쳐지나간다. <오랜만에>와 <동네>를 들을 때면 그때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던 핑크색 셔츠의 그 아이가 떠오른다. 봄을 느끼고 싶고, 풋풋했던 감정을 다시 꺼내보고 싶을 때면 그 노래들을 찾아 듣는다.
아침을 <오랜만에>로 시작했다. 아직 추운 날씨지만 노래 덕분에 봄이 온 듯했다. 봄을 생각하다 그 시절 학교 뒤편에 환상적인 풍경을 선사해주던 배꽃이 떠올랐다. 배꽃이 활짝 핀 모습은 마치 팝콘 같았다. 당시엔 그 풍경의 아름다움을 만끽하지 못했다. 지금이면 그 풍경에 넋을 놓고, 감탄을 연발 할 텐데 말이다. 그때는 그저 지나치던 풍경이었는데, 지금의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을 것 같다. 아마도,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그것이 봄이었다는 걸.
요즘 민감하게 느끼며 알아차리고 있는 것 한 가지가 있다.
나는 무언가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 말을 걸면, 그 흐름이 끊기는 것이 싫다. 그러다 보니 대답을 건성으로 하거나 때로는 짜증을 내기도 한다. 그러다 깨달은 것은 이것이 반대라면 참 기분 나쁘겠구나.
나이를 먹으며 성숙해진 덕분일까, 아니면 책을 읽으며 알아차림의 중요성을 깨달아서일까.
임경선 작가의 <태도에 관하여>를 읽으며 내가 생각하는 나를 살아가게 하는 가치들에 대해서 하나씩 생각해 본다. 그래서 오늘은, 짜증을 조금 덜 내보려 한다.
그때의 나는 핑크색 셔츠를 바라보기만 했고, 지금의 나는 누군가의 말을 흘려듣기도 한다. 어쩌면 나는 여전히 표현에 서툰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배꽃으로 가득했던 봄을 기다리며, <오랜만에>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