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가 몸에 익은 시간들
인내라는 단어가 나에게 익숙해진 것은 언제부터일까.
생각해보면 ‘나’라는 사람과 인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 편이었다. 참지 않고 즉각적인 반응이 컸던 사람에 속했다. 학교와 사회라는 공간에서 수많은 인간관계를 겪으며 조금씩 스며들었지만, 지금처럼 몸에 익게 된 계기는 육아였다. 육아를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수많은 인내를 견디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육아라는 것을 말이다.
인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성실함이 함께 따라온다. 현재의 힘듦을 묵묵히 참고 견디며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일은 중요하다. 모두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아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고 계획대로 끝맺는 일은 드물다. 쉽지 않은 길을 끝까지 걸어낸 사람만이 비로소 완수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 끝맺음이 있을까 싶지만, 아이들이 고등학교까지 마치면 흔히 ‘육아가 끝났다’는 표현을 쓴다. 1월과 2월, 졸업 시즌이 되면 아이들의 졸업사진과 관련 글이 많이 올라온다. 어제는 삼성가 이부진 사장의 아들 고등학교 졸업 영상이 SNS에 도배되듯 올라왔다. 졸업식에 참석한 그녀의 모습은 여느 엄마들과 다르지 않았다. 아들을 바라보는 사랑 가득한 엄마의 표정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우리나라 최고 재벌도 아들과 함께할 때 가장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누군가는 이런 댓글을 남겼다.
‘아들은 엄마의 영원한 짝사랑이다.’
아들을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짝사랑이면 어떤가.
서로를 향한 사랑의 양과 질이 같을 수 없기에, 나는 그렇게 정의한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 말하지만, 사랑에 이기고 진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되, 적당한 거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사랑을 오래 지속시키는 비결이다.
육아가 끝나려면 아직 몇 년이 남아 있는 지금, 육아를 끝낸 이들이 무척 부럽다. 그러나 그들은 말한다. 아직 끝이 아니라고. 그 이후로 이어지는 대학, 군대, 결혼 등 더 신경 쓸 일이 많다고 말이다. 다만 그때는 성인으로서의 삶이기에 부모로서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은 자연스레 줄어든다. 자녀를 믿고,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과 신뢰를 키울 수 있도록 조언과 도움을 주면 되는 것은 아닐까.
개인적인 바람은 너무 오래도록 육아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부모의 자리에서 인내하며 성실하게 그 역할에 임하겠지만, 오래 붙잡고 싶지는 않다. 그들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 조용히 손을 내밀 수 있는 자리에 남아 있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