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반도체 다운사이클이 시작되면 업체들은 원자재 구매와 자체 생산 물량을 줄여 재고를 조절한다. 그동안 통상 몇 개월간 생산 물량이 줄었다가 다시 이전 수준으로 회귀했다. 하지만 이번 사이클의 경우, 물량이 줄어든 지 상당기간이 지났지만 반등의 조짐이 보이지 않다. 심지어 현재 분위기면 더욱 감소할 가능성까지 내비치고 있다. 경쟁이 치열한 소재의 경우, 소재 수요량 줄어들 것으로 예측되자 가격 인하에 인색하던 소재 업체들이 먼저 가격 인하를 제안하고 있다. 발주 물량의 감소가 본격화되면 경우에 따라 생산 원가 인상분을 감내하면서까지 물량 확보를 위해 자발적으로 제살 깎기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불과 1년 사이에 소재 업체들과 반도체 생산업체들이 정반대의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문제는 전방 산업의 회복이 더딘 상황에서 반도체 업체들의 감산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스템 반도체를 주로 생산하는 대만의 OSAT업체들은 이미 작년부터 생산량이 대폭 감소했다. 특히 전자 제품에 폭넓게 사용되는 범용 저사양 반도체의 생산을 주업으로 하는 업체들이 큰 타격을 받았다. 마지막까지 시황악화에 저항하던 대만 최대 OSAT인 ASE와 SPIL까지 매출액이 감소하고 있다. 대만에 위치한 메모리 반도체 패키징을 하는 OSAT의 매출 역시 작년 4분기부터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국내 OSAT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가파른 수주 절벽에 직면해 있다. 감산을 공식화한 SK hynix의 Wafer 출하량 감소 여파가 본격적으로 시장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 올해 1분기가 채 끝나기 전에 국내 OSAT들의 가동률은 한 단계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삼성전자 역시 생산된 Wafer의 패키징을 늦추고 있는 만큼 패키징 물량을 위탁받는 OSAT들은 이미 수주량 감소에 시달리고 있다. 2015년~2016년, 메모리 반도체 과잉으로 인해 국내 OSAT업체들을 벼랑으로 내몰았던 수주 가뭄의 시기가 2023년에 다시 도래할 것으로 보인다.
메모리 반도체와 함께 우리나라 OSAT업체들이 많이 생산하고 있는 DDI칩의 상황도 녹록지 않다. 글로벌 TV, 스마트폰의 재고 증가로 인해 패널 업체들의 발주가 줄었기 때문이다. Wafer Bumping부터 DDI 패키징 소재 업체까지 이미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모두들 이 같은 상황이 길어지지 않기만을 기원하며 전자 산업의 회복만을 바로고 있다.
결국 반도체 수요가 회복되려면 전방에 있는 전자 산업이 정상화되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2020년 반도체 시장의 수급 이슈 때문에 업체들은 경쟁적으로 재고를 늘렸다. 재고 비축을 위한 중복 발주가 겹치고 겹치면서 전자 업체들은 양손 가득히 반도체 재고를 들고 있다. 그러던 중 2022년 하반기부터 이미 전자 기업들은 팔리지 않는 전자 제품으로 인해 생산량을 줄여 왔다. 사견이지만 전자 기업들의 반도체 재고는 2021년 상반기에 이미 충분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본다. 이후 1년 넘게 쌓아 올린 반도체 재고가 현재의 상황을 초래했다.
2022년 연준의 급격한 금리인상과 전쟁, 봉쇄가 어우러지면서 경기 위축이 본격화 됐다. 주머니가 얇아진 사람들이 전자 제품의 구매를 줄이자 전자 제품 재고 소진에 적신호가 켜졌다. 전자 기업에서 밀어낸 제품들이 대리점까지 가득 찬 상황이다. 전자 제품의 재고가 넘쳐나자 전자 기업들은 신제품 출시에 부담을 갖게 됐다.
일례로 2022년 하반기 출시예정이었던 전자 기기의 출시가 지연되면서 이 전자기기에 탑재될 반도체의 양산 일정이 취소됐다. 반도체 양산을 위해 준비됐던 원자재의 사용은 요원해졌다. 다른 패키지에 적용이 가능한 자재가 아니라면 유효기간의 경과로 인해 폐기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신규 반도체 패키징 개발이 대부분 멈춰 서면서 OSAT의 패키징 개발 인력들이 남아돌게 됐다. 실제 현업에서 한 달에 수십 건의 신규 패키징 개발이 진행되던 게 2022년 10월을 끝으로 뜸해졌다. 양산 물량과 개발 프로젝트가 감소하면서 생산량이 정점에 있을 당시 힘겹게 충원해 놨던 인력 운영에 대한 고민이 커져가고 있다.
반도체 시장이 선순환을 재개하기 위해서는 교체 주기를 넘긴 스마트폰을 최신형으로 기기변경 하는 것처럼 전자 제품에 대한 수요가 살아나야 한다. 이를 통해 쌓여 있는 전자 제품의 재고가 소진되어야만 신규 제품에 대한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반도체 업체들의 생산 라인 가동률이 오르게 된다. 하지만 금리가 고공행진하는 동안에는 이와 같은 전자 제품에 대한 수요 증가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번 반도체 다운 사이클의 기간이 길고 사이클의 낙차가 크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만약 올해 상반기 중, 범용 저사양 패키지에 사용되는 소재 수요량이 2019년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는다면 OSAT의 저조한 라인 가동률이 올해 내내 이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소재업체들로서는 최장기간의 수요 침체를 눈앞에 두고 있는 셈이다.
언론에서는 중국의 제로 코로나 포기로 인해 금방이라도 중국 시장이 전 세계 경제의 회복을 이끌 것처럼 얘기한다. 세계 경제가 코로나 이전으로 단숨에 회복될 것처럼 들떠 있지만 현지 OSAT업체들의 상황은 암울하기 그지없다. 소재 업체들의 체감상 중국 전자 기업들의 반도체 수급 여력은 전혀 살아나질 않고 있다. 제로 코로나 시기에 봉쇄를 반복하며 중국인들의 소비 여력이 대폭 급감했음을 애써 무시하는 분위기이다. 그저 중국인들의 저축률이 올랐기 때문에 보복소비에 나설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으며 현실과 괴리된 정보만으로 호도하고 있다.
2023년 반도체 시장의 마지막 보루로 여기는 자동차용 반도체 상황도 심상치 않다. 언론에서는 아직도 차량용 반도체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 차량의 출고가 늦는다고 얘기한다. 지난해 경기 위축으로 스마트폰의 수요가 급감했을 때, 언론에서는 수요 급감의 원인으로 DDI 칩의 수급 이슈를 지목하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러면서 올해 메모리 반도체는 부진하겠지만 자동차용 반도체가 반도체 산업을 견인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지난 글에서 몇 차례 다뤘지만 지난해 4분기부터 DDI칩 설계 업체들의 Foundry 위탁 물량이 대폭 줄어들고 그 자리를 자동차용 반도체가 채우기 시작했다. 이미 가공이 끝난 Wafer가 동남아에 위치한 IDM, OSAT를 중심으로 패키징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자동차용 반도체의 패키징 소재에 대한 Forecast가 반짝 증가했다가 다시 감소하고 있다. 즉 Foundry에서 가공이 완료된 Wafer가 패키징 되면서 반도체 생산량은 늘었는데 자동차 OEM업체들의 주문량이 기대보다 저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익히 알고 있듯이 금리 인상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자동차 계약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으며 중고차 시장에는 주인을 찾지 못한 차들이 가득하다. 2021년과 같은 자동차용 반도체의 Over booking이 사라지며 수요가 정상화되고 있다. 지금 상황이 지속된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짧은 시간 내에 자동차용 반도체의 공급 초과 뉴스를 접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전자 산업이 처한 상황을 종합해 보면 언론이나 증권사에서 말해온 2023년 하반기 반도체 시장의 회복에 대한 낙관론은 더 이상 힘을 받기 어렵다. 전자 산업의 현 상황을 비유하자면 마치 만수위에 다다른 저수지와 같다. 물(전자 제품)이 저수지에 가득 찼는데도 밖으로 흘러나가는 양은 적고 상류에서 물(반도체를 비롯한 원자재)은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다. 수위가 지속적으로 올라 위험 수위를 넘어섰음에도 손쓸 방법이 없다. 상류에서 유입되는 물의 양을 조절하더라도 저수지 안에 고여 있는 물(전자 제품)의 수위가 내려가지 않으면 현 상황의 개선은 더딜 수밖에 없다.
주머니에 쓸 돈은 없지만 전자 제품은 소진되어야 하는 진퇴양난의 사황이다. 쌓여 있는 전자 제품의 재고를 줄이는 획기적인 방안이 나오지 않는다면 반도체 다운 사이클의 빙하기는 장시간 지속 될 것으로 보인다. 작년 반도체 시장 조사 업체들은 연간 반도체 시장의 성장 예측치를 매분기마다 하향 수정했다. 장담컨대 올해도 신규 보고서가 발행될 때마다 성장 예측치의 저점을 지속 갱신할 것으로 보인다. 파격적인 규모의 반도체 감산과 전자 제품의 재고 소진이 없다면, 우리는 2023년을 넘어 2024년에도 다운 사이클의 회복을 고대하고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