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덧 설 연휴가 지나고 2월을 코앞에 두고 있다.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간다. 개인적으로 해마다 1월의 시황을 바탕으로 그해 반도체 시장을 가늠해 왔다. 물론 절대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2018년 하반기에 닥친 기습적인 다운 사이클 같은 예상치 못한 사건에 고전한 적도 있었다. 매해 12월이면 반도체 업체들의 재고 조정을 마무리하고 신규 발주 계획을 수립한다. 그래서 한 해를 시작하는 1월의 매출액 변화 추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월이 마무리되는 현시점에서 반도체 시장을 조망해 보고 조심스럽게 올 한 해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의 2023년 실적 전망이 암울하다고 한다. 유수의 반도체 기업들 뿐만 아니라 장비, 소재 업체들 역시 힘든 상황에 직면해 있다. 반도체 업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현재 상황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 언론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대부분의 정보는 업계 상황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설령 반도체 업계에 종사하고 있더라도 자신이 속한 업체의 업(業)에 따라 시장의 상황을 모두 다르게 인식한다. 반도체 생산 업체, 반도체 제조용 장비 업체, 반도체용 소재 생산업체 등 업체들은 모두 각자의 눈을 통해 시장의 변화를 추종한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들이 가진 각양각색의 시선을 모을 수 있다면 반도체 시장을 조금 더 높은 곳에서 관조할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 반도체 업계의 현 상황을 가감 없이 들여다보고 이를 통해 2023년에 시장이 어떤 양상으로 흘러갈지 함께 고민해 봤으면 한다.
반도체 시장이 위축되거나 반등할 때, 이를 가장 먼저 피부로 느끼는 곳은 소재 업체들이다. 일부 소재 업체들은 아직 시장이 뜨겁던 2022년 1분기부터 매출액이 줄기 시작했다. 소재업체들을 뒤따라 2022년 하반기로 갈수록 거의 모든 반도체 관련 업체들의 매출액이 감소했다. 반도체 수요가 감소하다 보니 OSAT, IDM(종합 반도체 회사)의 공장 가동률이 저조하다. 생산량이 줄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소재의 사용량도 회복이 더딘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올해 들어 시장이 회복될 것으로 기대하며 의지를 잔뜩 반영해 매출 계획을 세웠던 업체들은 불과 한두 달 사이에 올해 목표를 재점토하고 있다.
현재 소재 업체들이 마주한 문제의 시발점은 공급망 곳곳에 적체되어 있는 재고 이슈이다. 언론에서는 삼성전자, SK hynix의 반도체 재고가 위험 수준에 이르렀다고 연일 떠들고 있지만 정작 반도체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원자재의 재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대기업 위주의 경제 정책을 기반으로 성장한 국가에서 대기업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반도체 다운 사이클이 길어진다고 해서 우리나라 대기업이 쓰러질 일은 절대 없다. 일부에서는 반도체 불황이 길어지면 이번 기회를 통해 삼성전자의 메모리 반도체 지배력이 강화될 수 있기에 호재라고 한다. 이는 전 세계적인 반도체 다운 사이클이 가속화되는 시점에 일부 업체의 특정 상황만으로 희망 회로를 돌리는 것과 같다. 전체 시장 규모가 100에서 70, 60으로 줄어버린 상황에서 시장 점유율이 소폭 상승한다한들 이게 정말 호재일까? 심지어 이와 같은 기대에 치킨게임이라도 벌였다가는 국내 경쟁업체인 SK hynix가 막대한 손실에 흔들릴 수 있다. 아무리 냉혹한 경쟁이 난무하는 반도체 시장이라고 하지만 국내 업체들끼리 멱살잡이를 한다면 공급망 안에 있는 업체들은 몸져누울 수밖에 없다. 시장이 회복되어 늘어난 시장 점유율이 빛을 발하기도 전에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미래 성장 기반이 붕괴해 버릴까 걱정스럽다. 불황이 길어지면 마지막에 웃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반도체 공급망을 짚어가다 보면 영세한 규모의 업체까지 반도체 생태계의 순환을 위해 힘을 보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022년부터 누적된 다운 사이클의 피로감으로 인해 공급망 시스템을 구성하는 중소형 기업들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 일부 업체들은 이미 생산 공장이나 시설을 매각했거나 생산 시설의 가동을 중지했다. 줄어든 일감으로 직원이 떠나면서 공급망을 구성하고 있는 업체들의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다. 향후 업황이 반등했을 때, 이런 기업들이 생산하던 제품들을 구하려면 더 높은 가격, 더 많은 수량을 담보로 해외 업체들로부터 조달해야 할 수도 있다. 소부장 산업에 대한 중요성이 날로 커지는 시기에 그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반도체 산업은 대기업이 단독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중견, 중소기업들의 조력이 합쳐진 결과물이다. 반도체 산업 최상위에 위치한 업체들에게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현재 상황의 심각성의 수위를 오판할까 두렵다. 개인적으로 지금은 반도체 생산을 보조하는 소부장업체들의 생존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경기 위축으로 인해 전자 제품의 재고가 급증하면서 전 세계 전자 기업들은 반도체 업체들에게 연일 Order Cut을 통보하고 있다. Order Cut은 부지불식간에 통보되기 때문에 반도체를 생산하는 업체들이 보유하고 있는 제품들과 생산 라인에 있는 재공품 그리고 원자재까지 영향받게 된다. 생산의 최종 단계에 이른 재공품은 제품화를 완료할 수밖에 없지만 고객사의 주문량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규 생산을 위해 원자재를 투입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다. 특히 메모리 반도체는 전자 제품이 필요로 하는 반도체의 기능이 업그레이드되는 테크 전환이 발생할 경우, 패키징이 완료된 제품으로는 업그레이드된 디바이스의 사양을 충족할 수 없다. 그래서 발주 물량이 줄어든 디바이스의 패키징을 최대한 늦춰가며 시장의 변화를 주시하고 있다. 반도체 업체들은 생산량을 줄이며 제품 재고 증가를 억제하고자 하지만 패키징을 위해 수급해 놓은 소재의 유효기간이 이를 기다려 주지 못한다. 소재의 유효기간이 제품화 시기를 놓쳐 경과하게 되면, 기능상 전혀 문제없는 재고들이 폐기 처분된다.
최상위 고객사의 Order cut은 반도체 생산업체들 뿐만 아니라 원자재를 공급하는 업체, 그 원자재를 생산하기 위한 소재를 공급하는 업체들에게까지 영향을 준다. 원자재 생산업체는 반도체 생산업체의 생산 계획을 사전에 통보받아 즉각 대응 가능한 제품(안전 재고)을 미리 생산해 놓는다. 그런데 시황의 악화로 인해 Order Cut이 발생하면 보유 재고의 납기가 한없이 늘어지게 된다. 후속 제품 생산을 위해 사전에 준비해 둔 자재들은 생산라인에 투입하지도 못한 채 마냥 창고에 쌓아 두어야 한다. 납기가 지연되면서 제품이든, 자재든 유효기간을 경과하게 되어 못쓰게 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원자재 업체들에 귀속된다.
원자재 업체들의 생산 계획에 따라 소재를 준비 놓은 하위 업체들 역시 동일한 상황에 직면한다. 생산량 감소로 인한 피해는 한 업체에 국한되지 않고 마치 도미노처럼 공급망을 타고 넘나들며 피해가 확산된다. 더구나 반도체 패키징 소재는 대부분 짧은 유효기간을 가지고 있다. 원소재의 상당 부분은 해외에서 조달된다. 지난해 3분기 강달러 시기에 원자재를 구입했다가 제품화를 못하고 폐기할 경우, 그 피해 규모는 더 클 수밖에 없다.
위에서 언급한 사례는 비단 어느 한 특정업체가 처한 상황이 아니다. 2020년 반도체 수급 이슈로 인해 전자 산업의 위기감이 팽배해진 이후, 극한으로 밀어붙인 반도체 생산량 증가의 여파로 인해 공급망 내 거의 모든 업체들이 필요 이상의 재고를 쌓았다. 전방에 위치한 전자 산업부터 재고가 쌓이면서 후방에 위치한 모든 업체들에게까지 충격이 전이되고 있다. 막대한 양의 재고가 공급망 안에 적체되어 있으며 상상 이상의 소재가 공급망 안에서 폐기되고 있다. 업체별로 상당한 피해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대다수가 쉬쉬하며 재무제표 상에서 이를 떨어내고 있다.
일부 업체에서는 평소라면 이미 소진하고도 남았을 재고를 유효기간을 넘겨 사용했다가 품질 이슈가 발생하는 일이 발생한다. 심지어 창고에서 출고를 대기하느라 시간이 경과된 재고를 마다하고 신규 생산 제품으로 납품하라는 업체도 있다. 모두가 유효기간과 재고 관리 그리고 비용 절감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한다.
IDM(종합반도체업체)과 Fabless의 반도체 생산 계획이 감소하자 OSAT업체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원자재의 발주를 부랴부랴 취소하는 한편, 장비 업체들에게 납품 대기 중인 장비의 입고 지연이나 취소를 요청하고 있다. 적지 않은 업체들이 입고 지연에 따른 보관비를 지불하면서까지 장비 반입 시기를 2024년 이후로 늦추고 있다. 부득이하게 입고를 결정한 업체들도 언제 생산 장비를 가동할지 요원하다. 장비의 가동률이 급감하자 추가 장비 발주가 계획이 전면적으로 재검토 중이다. 아직 생산이 이뤄지지 않은 장비들의 발주가 줄줄이 취소되면서 장비 업체들은 수주 절벽에 직면했다. 장비 업체들은 2022년에 입고해야 할 장비의 입고 시기를 2023년으로 지연하여 매출을 배분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장비의 수주가 끊겼다는 얘기는 장비를 구성하는 프레임, 전자 부품에 대한 수요가 감소했다는 것을 뜻한다. 프레임을 제작해 장비업체에 납품하는 업체들과 전자 부품 생산업체, 해외에서 전자 부품을 사 와서 국내에 유통하는 업체들까지 영향을 받는다. 수주 절벽의 여파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장비 조립이나 Set up을 외주 받는 인력 업체들의 일감까지 빼앗아 가고 있다.
- "2023년 반도체 시장에 대하여②"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