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들어선 지 한참 된 듯한데 아직도 바람이 차다. 3월에 잠시 스치듯 느꼈던 봄기운은 어느새 먼 기억처럼 느껴진다. 봄바람이 아직 살랑거리던 3월, 대만 고객사로의 월간 출하량이 역대 최저점을 찍었다. 반도체 소재 업계에서 10년 넘게 일했지만 처음으로 마주하는 출하량과 매출액에 정신이 아찔했다. Foundry 업체의 Wafer 출하량이 감소하고 있는 것은 에이젼트와 실제 고객사 미팅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측하고 있던 것들이 현실이 되어 OSAT 업체들로부터 원자재 입고 일정이 미뤄지자 덜컥 겁이 났다. 혹시라도 반지하 아래 지하 1층, 2층이 있는 것은 아닌지 OSAT업체들의 Forecast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지금 글을 쓰고 있는 4월에는 상황이 호전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장기 재고 소진에 따른 신규 제품 발주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업황의 전환을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3월 말 삼성전자가 결국 감산을 공식화했다. 사실 이미 자사 패키징 라인의 가동률이 50% 이하인 상황이었기에 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삼성전자가 과감한 결단이라도 내린 양 추켜세우기 바빴으며 경쟁사의 주가는 폭등했다. 심지어 하반기에는 감산의 효과로 인해 메모리 반도체 시황이 좋아질 것이라며 기대에 찬 기사를 쏟아냈다. 개인적으로는 언론의 과장된 설레발에 현혹되지 않았으면 한다. 전 세계 반도체 1,2위를 다투는 회사가 감산을 공식화했다는 것은 그 거대한 회사가 상상이상으로 벼랑 끝에 몰렸다는 뜻이다. 2분기부터 시작한 감산의 효과가 단기간에 발현될 것이었으면 감산을 선언할 필요도 없었다. 삼성전자에서 감산을 선언한 것은 메모리 반도체 재고 소진을 위한 장기전에 돌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관리 범위를 벗어난 재고 레벨을 관리 가능한 수준까지 끌어내리는 데에는 최소 3분기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된다.
지난달까지 TSMC의 선점을 극찬하던 언론은 TSMC의 3월 실적이 작년 대비 대폭 감소하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제 이들의 관심은 시장의 핫한 주목을 받는 2차 전지 관련 업체들에게 있는 듯하다. 언론의 주목 여부에 관계없이 대만 반도체 업체들뿐만 아니라 이들과 연계된 업체들의 매출 동향을 지속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대만 업체들의 월별 매출 변화를 통해 다운 사이클의 단서를 찾았듯이 다시금 이들을 통해 시황 반전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서두에 밝힌 바와 같이, TSMC의 3월 매출은 작년 동월 대비 15% 넘게 떨어졌다. 작년부터 이어진 반도체 시황 악화로 인해 TSMC의 선단공정을 사용해야 하는 대형 Fabless 업체들의 위탁 생산량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최근 인공지능 챗봇의 활약으로 강력한 연산능력을 가진 인공지능 칩의 수요가 폭증했다고는 하지만 인공지능 반도체 카테고리 하나만으로는 TSMC의 거대한 생산능력을 커버하기란 불가능하다. TSMC뿐만 아니라 대만의 모든 Foundry업체들이 급격한 매출 하락에 시달리고 있다. Wafer 가공 물량이 줄어드는 만큼 OSAT업체로 이관되는 Wafer 수량도 감소할 수밖에 없다. 타이밍이 좋지 않은 업체들은 펜더믹 시기에 신규 투자를 통해 마련한 공장과 설비는 제대로 가동도 못해보고 재무적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Foundry 업체들의 Wafer 출하량이 감소세를 멈출 때까지 OSAT 업체들의 가동률 하락은 장기화될 것이 자명하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예견한 ASE 그룹은 이미 1만 대가 넘는 Wire Bonding 설비의 발주를 취소했다. 전자 산업의 생태계에 있는 각각의 업체들은 어떤 식으로든 모두 연계되어 있기에 경기 침체는 Fabless의 매출 감소로 이어지고 이는 Foundry, OSAT를 넘어 장비, 소재 업체들에게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2020년 코로나 펜더믹으로 인해 2021년 급격히 늘었던 반도체 생산량은 2022년을 거쳐 2023년 1분기 현재까지 서서히 속도를 늦추고 있는 중이다. 시장은 어느새 2020년 수준으로의 회귀를 눈앞에 두고 있다. 최근의 시장 분위기만 놓고 보자면 이제 "L"자 하락의 모서리에 근접한 듯하다. 반도체 산업이 바닥을 치고 "V"로 반등하는 것을 기대하는 분들이 많지만 시장 상황은 장기 횡보를 대비해야 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는 전자 기업들의 전자기기를 위탁 생산해 주는 EMS업계의 실적을 봐도 알 수 있다. 작년 이맘때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며 전자 제품 생산량이 줄어들고 있다. EMS업체들은 일반적으로 1분기가 비수기이기 때문에 4월부터의 매출 변화가 향후 전자산업 전체의 향방을 가를 것으로 보인다.
시스템 반도체 Foundry업체인 TSMC, UMC, VIS, nuvoton, Win Semiconductor를 한데 묶어 각 업체들의 2020년 1월 매출액을 초기 값으로 설정하고 3년 3개월간의 매출액 변화를 살펴봤다. nuvoton의 경우, 메인 사업 Item인 MCU가 자동차용 반도체 수요 급증이라는 제트기류에 편승했기에 他업체들 대비 급격한 상승세를 보였다. 같은 그래프에 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조축으로 옮겨 별도로 표기했다.
* '23 3월 매출액 : TSMC 6.22조 원, UMC 7,573억 원, nunoton 1,558억 원, VIS 1,070억 원,
Win Semi. 392억
전자 산업이 유지되기 위한 적정 레벨의 반도체 생산량과 수요량이 있다. 지난 2년간 과도하게 생산된 반도체 재고로 인해 2022년부터 전자 업계는 장기간에 걸쳐 반도체 재고를 소진해 왔다. 그 결과 저가의 범용 반도체를 시작으로 재고 소진의 기미가 보이지만 전자 기업들은 예전과 달리 필요량 이상의 재고를 보유하지 않으려고 한다. 전자 기업들의 재고 관리 기준이 타이트해지면서 범용 반도체를 설계하는 Fabless들은 2020년 월별 매출액을 하회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이들의 매출 의존도가 높은 Foundry업체와 OSAT업체들은 그 여파를 고스란히 받게 된다. 예를 들어, 경쟁사들보다 규모가 작고 공정 노드가 뒤처지는 Win Semiconductor는 펜더믹 기간 중, 이렇다 할 반등을 경험하기도 전에 가장 먼저 매출액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Win Semiconductor에서 가공된 Wafer를 패키징 되는 TICP, Lingsen, GREATEK의 상황 또한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반도체 산업은 규모의 경제 싸움이다. 규모가 큰 업체들이 시장의 충격을 가장 늦게 받는다. Win Semiconductor의 매출이 최고치를 경신한 이후, 업체 규모 순서대로 VIS, UMC, TSMC가 시간 차를 두고 월매출액 정점을 지났다. 현재 줄어든 Fabless의 주문량이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2분기까지는 Foundry의 wafer 출하량이 지속적으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높은 수준의 생산량이 장기간 유지되면서 Wafer 투입량 감소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것처럼 자칫 예상하는 범위를 넘어 2020년 수준을 하회하는 업체들이 다수 등장할 수 있다.
대만 메모리 반도체의 시황 변화를 확인하기 위해 Nanya, Winbond와 같은 IDM과 메모리 반도체 Foundry 비중이 높은 Powerchip의 월별 매출액을 한 그래프에 담았다.
* '23 3월 매출액 : Winbond 2,947억 원, Powerchip 1,638억 원, Nanya 919억 원
Winbond는 자사의 Special DRAM과 자회사인 nuvoton(지분율 51.21%)의 MCU 비즈니스가 시너지를 내면서 펜더믹 기간 중 큰 폭의 성장을 했다. 비록 2022년 하반기 매출이 줄어들긴 했으나 자사에서 생산하는 반도체의 솔루션이 전기자동차등에 지속 탑재되면서 매출액이 반등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의 전체적인 다운사이클을 거스를 수는 없으나 영위하고 있는 사업 분야가 지속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먼저 반등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Powerchip과 Nanya는 다운사이클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얻어맞아 휘청이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업계가 장기 침체에 들어가며 메모리 반도체 Foundry 업체인 Powerchip의 매출액은 어느새 2020년 1분기 수준까지 감소했다. 메모리 Fabless업체들은 제품이 팔리지 않는 상황에서 위험을 안고 Wafer를 추가 발주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Nanya의 경우, 근래 보기 드문 월매출액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유사한 규모의 매출액을 찾으려면 12년 전 자료를 들춰봐야 할 정도로 힘든 상황이다. 한때 대만 메모리 반도체 업계를 이끌던 Nanya였지만 펜더믹 기간 중, 반도체 수급 이슈라는 시황에 휩쓸린 결과, 아득한 규모의 재고가 쌓여버렸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2021년 하반기 이후 생산된 제품들은 모두 과잉 생산된 제품이라 보면 될 정도이다. 지난달 리뷰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Nanya의 Wafer 출하량 감소세가 뚜렷해지자 FATC의 매출액이 시간차를 두고 급감하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과 연계된 OSAT업체들은 큰 시련에 직면해 있다.
Nanya가 처한 현 상황은 Nanya 한 업체에만 국한된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우리나라 업체들과 여타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이 공통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삼성전자의 감산으로 인해 단시간에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재고 소진이 앞당겨질 수 있다는 말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임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올해 들어 웨스턴디지털의 상하이 패키징 공장과 KIOXIA의 낸드플래시 물량을 패키징 하는 AMKOR 상하이 공장이 개점휴업 상태인 것을 안다면 하반기 급작스런 시황 반전이 얼마나 허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의 고통스러운 상황이 해소되고 메모리 반도체 업계가 정상화되기까지는 상당기간이 필요하다.
삼성전자, SK hynix의 위탁 물량이 줄면서 국내 OSAT의 가동률은 지지부진한 상황을 이어가고 있다. 일감이 줄어들자 직원들을 일주일에 2~3일만 출근시키는 순환출근제를 시행하는 곳이 많아졌다. 업황의 개선이 요원한 만큼 순환출근제가 장기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는 자칫하면 국내 OSAT업계의 미래를 갉아먹는 치명적인 트리거가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국내에서 생산 라인 가동률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외국계 대형 OSAT뿐이다. 국내 OSAT의 인력이 이탈해 외국계 회사로 옮기게 되면 업황 반등의 시기에 공장 가동에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또한 연구 개발 인력이 부족한 국내 OSAT업체 특성상, 한정된 인원들로 진행하던 개발 프로젝트에서 개발 인력이 이탈하게 되면 그 자리를 채우는데 상당한 시일이 걸릴 수밖에 없다. 2015년~2016년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공급 과잉 시기에 국내 OSAT업체에서 외국계 OSAT로 이직 러시가 발생했다. 메모리 반도체 침체가 장기화될 경우, 이번에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심지어 원청업체의 컨벤셔널(Conventional) 패키지의 원가 절감을 위해 패키징 라인을 해외로 옮길 수 있다는 얘기까지 돌고 있어 국내 OSAT업체들의 위기감을 고조시기고 있다.
이 와중에 원청업체들에 적체되어 있는 Wafer들의 유효기간 도래로 패키징이 필요한 시기에는 돌발적인 가동률 상승이 예상된다. 마치 파도가 밀려오듯 위탁 물량이 들쭉날쭉하게 배정되기 때문에 OSAT에서는 인력관리와 라인 가동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또한 패키징 소재를 공급하는 업체들은 소재 공급을 위한 원부자재 관리에 특히 공을 들여야 하는 시점이다. 시황의 시그널을 잘못 읽고 원부자재를 과도하게 발주했을 경우, 사용하고 남은 잔량을 유효기간 내 소진하지 못하고 폐기해야 하는 황당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반대로 발주량이 부족할 경우, 감당할 수 없는 압박 속에서 납기 단축을 위해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환율과 유가 그리고 금리가 여전히 경제 침체의 뇌관으로 남아 있는 가운데, 반도체 관련 기업들의 매출은 상당기간 우하향할 것으로 예상된다. 매출이 바닥을 친다고 해도 그 상태로 장기간 횡보할 가능성이 높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이지만 여기서 정신줄을 놓았다가는 자칫 반등 시점 전에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시장 변화를 더욱 민감하게 추적해야 하며 시황의 변곡점에서 심사숙고하여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 결정 하나하나가 호황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무게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