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예상치 못한 기회로 18년 동안 몸담았던 반도체 업계를 떠나 이차전지 관련 업체에서 일하게 됐다. 불과 2달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지만, 어느새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반도체는 이차전지로 치환되었다. 이와 더불어 새로운 환경과 생소한 업무, 그리고 경험에 보지 못한 산업에 적응하느라, 지난달에는 1월 실적을 정리해 놓고도 업로드를 하지 못했다. 2월 실적에 대한 정리도 3월 중순에 마무리했지만, 반도체 패키징 업계 정보를 입수하는데 한계가 생기면서 해당 자료의 업로드를 한참 동안 고민했다.
그동안 반도체 패키징 업계의 현황은 3가지 정보를 조합하여 업데이트해 왔다. 업체들의 실적을 통해 과거를 조망하고, 에이젼트와 고객사를 통해 업계의 현재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내가 맡았던 패키징 소재의 출하량 정보를 기반으로 향후 시장의 변화를 예측했다. 하지만 장기간 핸들링했던 패키징 소재를 내려놓고, 인적 네트워킹을 통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던 업계 정보가 끊기자, 업체들의 실적을 나열한 데이터는 단지 숫자 이상의 가치를 갖지 못한다.
과거의 경험으로 데이터의 외면적인 형태는 해석이 가능하지만, 숫자의 이면에 있는 업계의 현황을 전하는 것은 이제 어렵게 됐다. 기존에 축적해 놓은 적지 않은 데이터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실적을 추가하여 데이터를 갱신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다만 좀 더 깊이 있는 시장 정보를 전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2월 실적의 업로드마저 놓쳐버린다면, 다시는 반도체 시장에 대한 글을 쓰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숫자뿐인 정보이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업계 변화에 대한 정보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어, 다음 달부터는 실적을 제때 정리하여 공유하고자 한다. 늦었지만 2월 실적을 업로드하며, 3월 실적부터는 빠른 업로드 대신 가급적 말을 아끼고자 한다.
지난 3월 4일 중국 1위 OSAT인 JCET가 Western Digital이 보유한 상하이 낸드플래시 패키징 라인(舊SanDisk)의 지분 80%를 6.4억 달러 현금으로 인수한다고 밝혔다. 향후 WDC는 JCET를 통해 낸드 플래시 패키징을 지속할 계획이기 때문에, JCET는 이번 투자를 통해 안정적인 고객사와 3D 낸드 패키징 기술 2가지 토끼를 모두 잡게 됐다. 자금의 출처는 차지하고서라도 중국 OSAT들이 그동안 각고의 노력을 통해 내재화하려던 3D 낸드 적층 기술을 JCET는 WDC 패키징 라인을 매입함으로써 해결해 버렸다.
이는 2015년 JCET가 StatsChipPAC를 인수했을 때의 파급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번 딜을 통해 JCET는 대만 PTI에 이어 2번째 규모의 메모리 반도체 OSAT로 발돋움하게 됐다. 이렇게 되면 글로벌 OSAT 2위인 Amkor의 매출액에 바짝 다가서며, 향후 메모리 업황 개선 여부에 따라 2,3위의 위치가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로써 중국 반도체 업계는 Payton, 元成科技(舊PTI Suzhou), TSHT Nanjing, TFME Hefei, Taiji Semiconductor, JCET (Jiangyin + Shanghai)까지 중국 내에서 필요로 하는 메모리 반도체 물량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만큼의 패키징 시설을 보유하게 됐다.
중국 내에 판매할 반도체 제품은 중국에서 패키징 하는 것은 이제 반도체 업계의 불문율이 됐다. 그동안 대만의 OSAT들에게 발주를 주던 미국과 일본의 메모리 반도체 회사들은 중국향 패키징 물량을 위에 언급한 회사들로 이관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메모리 패키징 업체들이 규모의 경제를 이루며, 미국과 일본의 메모리 반도체 패키징 물량이 이탈하면서 대만 OSAT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또한 중국 내 생산 거점을 확보한 일본 반도체 소재들의 시장 장악력이 더욱 굳건해질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2월은 긴 설연휴와 다른 달 대비 짧은 조업 일수로 인해, 매출액이 1월 대비 대폭 감소한다. 그럼에도 2022년 하반기부터 이어진 급격한 시황 악화의 영향을 받은 2023년 2월 실적으로 인해, 2024년의 2월은 기저효과를 톡톡히 봤다. 대만 전자기업들의 실적을 보면 Fabless와 Foundry 업체들이 他산업군 대비 양호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매출실적을 취합한 그래프도 진폭이 크지만 그래도 우상항하고 있다. 그런데 반도체를 패키징 하는 OSAT와 이들의 주요 고객사인 EMS들은 부진한 모습이다. OSAT와 IDM에서 반도체 패키징을 위해 사용하는 주요 소재인 Substrate(UNIMICRON & Nanya PCB & Kinsus)와 Lead Frame(CWTC)의 매출 변화도 지속적으로 우하향하고 있다. EMS와 같은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전자기업들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데, 반도체를 설계와 웨이퍼 가공을 담당하는 Fabless와 Foundry 업체들의 실적이 견조하다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과 같이 지금의 반도체 시장은 오로지 인공지능 반도체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3월 중순, 글로벌 운송 업계 분과 잠시 정보 교류를 할 기회가 있었다. 고객들을 만나보면 시장을 보는 눈의 기준을 코로나 전, 혹은 정점에 두느냐에 따라, 현재의 물동량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고 한다. 이제 반도체 칩과 소재의 물동량은 2023년의 충격을 딛고 코로나 전과 유사한 수준으로 올라왔지만, 2022년을 기준으로 삼는 업체에게 시장의 회복이란 요원하기만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짐작한 것과 같이, 글로벌 전자 기업들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간간이 소식을 전하는 대만의 지인들도 OSAT의 영업 현황이 순조롭지 않다고 말한다. 반도체 소재 출하량은 2020년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코로나 기간 중에 단행한 가격 인상과 높은 환율 효과로 인해 매출액이 커져 보이는 착시현상을 겪고 있다. 이렇듯 인공지능 반도체와 관련되지 않은 대다수는 반도체 시장의 향방에 대해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향후 시장의 전망을 부정적으로 보는 쪽이 더 많지만, 이 역시 오랜 경험에 의존한 경우가 많다. 코로나 시기의 반도체 시장의 업사이클과 이후의 다운사이클은 예고하고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시장 변화에 빠르고 적절하게 대응한 기업만이 시장 평균을 웃도는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홈런을 치기 위해 잔뜩 힘을 주고 배트를 길게 잡기보다는, 진루를 위해 몸에 힘을 풀고 배트를 짧게 잡는 것과 같이, 이제는 시장 변화에 기민한 대응이 더욱 중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