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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렌 Jun 27. 2020

공정? 공평? 평등?

법으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이 사회의 두 기둥으로 떠받치는 나라에서?

대학입시, 취업, 이후 사업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앞에 공정하고 공평함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건 100퍼센트 착각이다.


식물, 동물처럼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공평한 세상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가치가 소중하다거나, 인간이 그 가치를 위해 나아가는 것과는 별개의 본질적인 이야기다. 원래 이상은 이상이니까 추구하는 것이다.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부르짖는 것이다.


인간은 특별하다고? 맞다. 특별히 사악하고 특별히 유일하게 다른 종을 수도 없이 멸종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존재니까 특별하다. 특별하다는 게 선하다는 뜻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가치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대해 존중하고 때로 존경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의 생계를 두고 가치를 위해 투쟁하고 싸우는 것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특히나 돈이, 먹고사는 것이 전부인 자본주의 세상에서. 그러나 여기에도 단서가 붙는다. 나의 직접적인 이익과 관계없는 가치에 대해서라는 것이다. 나의 이익을 위한 가치를 위해 싸우는 건 그다지 대단한 게 아니다. 미안하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 위대하고 존경할만한 것은 나의 이익과 무관한 보편적 가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불공평한 게 세상이다. 극단적으로,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예로 누구는 장애인으로 태어나 평생을 불공평한 공간과 제도와 관계에서 살아간다. 그들에게 당신은 얼마나 공정한 세상을 위해 노력해주었으며 그들에게 당신은 눈길 한 번 제대로 준 적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잠깐 우리가 관심 갖지 않는 범죄 피해자들을 보자. 우리는 범죄자를 욕하고 벌 주는 데만 관심이 있다.  범법자에게 어떤 종류의 피해를 입어도 법은 국가와 사회를 위해 그 가해자를 처벌할 뿐 피해자를 위해 하는 일은 없다. 피해자는 피해를 보전 받기 의해 돈을 법률 서비스 제공자에게 내고 또 법에 호소해야 한다. 그런 - 돈싸움인 - 민사재판에서 이기면 얻는 건 종이 한 장이다. 그건 내가 또 다시 법조계에 돈을 내고 강제집행을 하지 않는 이상 종이쪼가리일 뿐이다. 범죄 피해자가 계속 돈을 쏟아부어도 이 사회는 기껏 사회구성원에게 알량한 기회만을 준다. 돈 내라면서, 결과는 모르겠고 기회만. 그런데 당신은 이런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인 적 있나? 이런 시스템에 문제제기를 한 적이 있나?


이런 건 수도 없이 많다. 선진국, 개도국, 후진국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느냐 하나로 인생의 빈부는 절반 이상이 결정된다. 나는 여기에 선택권이 없다.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니다. 태어났는데 부모가 모두 생존해 있는 가정인지 아닌지도 마찬가지다. 공정, 공평, 평등, 그런 거 없다.


인생은, 생명에게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고, 때로 개연성 없이 발생하는 어떤 운이라는 것이 있고 그게 생명이 겪는 당연한 일생이다.


물론 그렇다고 불공정함을 용인하느냐, 인정하냐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나도 인정하기 싫고 가급적 공정하길 바라지만 세상이 그래야 한다고 여기거나, 그렇다고 믿고 살다 불합리한 일을 겪으면 삶이 너무 힘들다.


우리 사회의 구조를 보자. 아니 그 전에 유구한 인류 역사상 공정하고 공평했던 역사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고차원적으로 설명하면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단순히 말하면 다수가 모여 게임의 룰을 만드는 것이 지금의 민주주의 사회다. 민주주의 사회는 절대 공평한 사회가 아니다. 그저 다수의 만족과 다수의 행복이 존중되는 사회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인간 역사의 아주 짧은 기간 존재해왔을 뿐이다. 민주주의는 무슨 인간 세상의 절대가치가 아니며, 민주주의는 선이고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악인 게 아니다. 민주주의는 다수에겐 선이며 소수에겐 악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극소수가 절대적 부를 누리는 한편, 절대다수가 노동을 제공하며 일견 정당해 보이는 대가를 받으며, 그런 다수가 대체로 만족하게 하는 숫자놀음의 시스템이다. 우리는 노동은 신성하다거나 수요와 공급, 재화와 용역의 가치, 화폐의 중요성, 시장의 원리 등에 대한 교육을 통해 자본주의의 룰에 순응하게 되는데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는 누군가의 돈을 빼앗아 누군가가 잘 사는 구조다. 이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빚으로 굴러가는 사회이고, 빚이 넘쳐 무너지더라도 그게 혁명으로 이어져 사회를 무너뜨리지 않게끔, 뒤집히지 않게끔 관리되는 사회다. 개인이든 법인이든 국가든 여기에 예외는 없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결국 빚/폭탄 돌리기이고 구성원 모두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낙오가 되더라도 회생할 수 있게 끌어주는 제도까지 갖추고 완전히 나가떨어지지 않게 한다. 노숙자가 늘어나도 노숙자가 혁명을 일으키지 못하게끔 생존의 문제로 치닫게 하지 않고, 부와 제도를 일부 국가나 자본가가 분배하여 그들이 죽지 않고 그 자리에 그저 존재해도 되게끔 유지하는 기능이 발달했다. 심지어 국가 부도가 나도 자본주의 국제사회가 빚을 탕감해준다.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면 이 시스템 자체가 무너질 수 있기에 죽지는 않게, 자폭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법으로 수호된다. 과거 왕국의 역사에서 왕조를 뒤집는 데 성공하면 새 역사를 쓰고, 실패하면 반역죄로 죽임을 당하는 것에서 이 법치국가에서는 다수가 동의하고 약속한 법이라는 이름 아래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다. 법을 어기면 명분이나 이유 따위에 관계없이 그저 범법자가 된다. 법은 그 자체로 변경되지 않는 한은 절대적인 것이며 그에 대한 도전은 그 역시 법에 의거하지 않은 한 결코 용서되지 않는다.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는 나라나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상식임에도 불구하고 법에 거역하는 것은 사회악에 다름이 아닌 것으로 취급된다. 혁명이라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시스템이 현대 법치국가다. 사회의 일원이 되는 순간 법의 아래에서 법에 순응하도록 성장한다. 순응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주홍글씨를 새긴다. 어긋나면 범죄자 거나 실패자가 된다. 내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명분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사회에 이득이 되더라도 법에 없거나 법에 어긋나면 불법이다. 다수가 합의하고 지키기로 한 법은 결코 너그럽지 않다. 현대사회의 법은 일부 과학기술 발전을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을 뿐 거의 모든 것을 규정하고 있고, 예외를 두면 다수를 통치할 수 없으므로 예외를 최소화한다. 심지어 법적 이슈가 생겨 법조계 내의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역시 돈으로 이용해야만 한다. 법도 자본주의 안의 법인 셈이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는 형사법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큰 기업이나 조직, 국가에 법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적 대응은 돈싸움이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가치나 마찬가지인 명문화된 법을 상대적인 가치로 만드는 법은 오직 법 개정뿐인데 이것도 법에 의해서만 개정이 가능하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또 다수의 동의가 필요하다. 입행위는 국회라는 장소에서 정당과 국회의원들에 의해 또 다수결의 원리에 의거하여 이루어지게 되고 그 기준은 다름 아닌 '이익'이다. 명분도 때로 중요하지만 결국 정당 간의 이익관계가 기준이다. 국회의원들은 정당의 이익, 혹은 지역구의 이익, 유권자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명분이 아무리 좋아도 손익 관계에서 다수에게 손해라는 판단이 서는 순간 법은 통과되지 못한다.


이게 우리 사회의 대전제인 셈이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법치국가. 이 세 틀 안에서 지켜지는 것은 생명이고, 현상유지이고, 존치, 존속이지 평등이 아니다. 이 시스템 안에서는 자유와 평등이 불가능한 가치라서 그걸 추구하는 것이다. 


수능이 평등한가? 공채가 평등한가? 과거에 그랬던 제도가 있나? 자본주의 사회에 고시는 평등한가? 돈이 학습의 효율과 기회를 좌지우지하는 세상에 고시가 평등한 제도라는 게 말이 되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양대 축으로 하는 법치국가는 전복되지 않고 존속되기 위한 가장 발달된 시스템이고 분명 다수의 안녕을 보장하지만 분명히 여전히 부조리하고 불공평하다. 


그러나 이것이 악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요즘, 2천 년대 들어 매일 같이 듣는 공평, 평등, 인권 이런 단어들은 사실 약간 과장되어 마치 우리 곁에 있어야 하고 당연히 존재해야 할 가치처럼 들리는데 그렇지 않다. 역사가 기록된 이래 지금까지 없었던 가치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도 법이라는 규정 아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의 가치 아래 엄연히 존재한다. 덜 폭력적이고 덜 자극적이며 어쩐지 부드럽게 표현되고 이어질 뿐이다. 신분제도는 없지만 평등하지 않다는 건 누구나 안다. 이렇게 하면 분명 겉으로는 덜 폭력적이고 인간적이다. 때리지 않고 부리지 않으니까. 그런데 대신 합법적으로, 돈으로, 제도로 더 많은 사람들을 안전하게 구분하고, 정리하고, 부린다. 지배층 입장에서 한없이 안전한 상태가 민주주의, 자본주의인 법치국가이다.


세상을 공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건 아니지만, 인류 역사상 인간 사회는 내공정하지 않았다는 걸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좀 더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 사회 역시 그런 맥락에서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인지하게 해야 한다. 솔직하게. 포장하지 말고. 지금의 선진국들이 근현대에 저지른 일들을 알고 보면 선진국이 하나도 부러울 수가 없다. 소위 사회지도층이 얼마나 썩었는지 알면 그들을 존경할 수가 없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해서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아이들 세대에는 조금 더 나은 제도와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게 해야 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최종판인 것처럼 가르치면 안 된다. 민주주의도 과거의 많은 제도처럼 지나갈 제도일 수 있고 더 나은 제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인간이 생명체인 이상 약육강식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세상은 험하고, 불공평하다. 학교에서도 선생님이 아이들을 대할 때도 불공평하다.


나는 안타깝지만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친다. 이유 없이 너를 싫어하는 선생님도 있을 것이고, 가 가져야 마땅한 기회를 앗아가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다만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안전장치 내에서 조금 덜한 강도로 겪을 것이고 너는 그 안에서 세상에, 너에게 불합리하게 작동하는 시스템이나 너를 불합리하게 대하는 다른 존재들에 대응하는 법을 배우는 거라고. 때로 정도가 지나치면 부모인 내가 나서서 보호해주겠지만 그 정도가 심하지 않다면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고. 그 안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평등하고 공정하지 않음에 저항하는 무슨 대단한 저항정신이 아니라 나중에 부모의 보호에서 벗어났을 때 벌어질 수 있는 각종 일들에 대응하는 법이라고.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인간은 이해득실을 이성과 본능을 모두 동원해서 따지기 때문에 이 약속된 사회 안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먼저 배우는 거라고 한다. 약속은 때로 아름답지만 법이라는 이름의 약속은 무서운 것이라는 걸 알게 한다.






끝으로 불공정한 세상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으면, 그 생각과 행동을 존중받고 싶으면 스스로의 이익과 무관한 것에 목소리를 높였으면 한다. 자기 개인의 이익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일에 목소리를 높이는 건 그냥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고 무슨 독립운동처럼 존중받을 가치는 아니다. 어차피 자기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건데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인가. 모두 자기를 위해 산다. 그리고  때문에 세상은 불공평하다.


민주주의 사회는 공평과 평등에 가치를 가지는 게 아니라 다수의 만족과 편익에 치중된 사회일 뿐이다.(51대 49에서 51이 존중되고 49는 무시되는 게 평등해? 숫자 제시가 너무하다고? 70대 30에서 30이 무시되는 건? 괜찮나? 30%가 300만명이면?) 자본주의 사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평등함과 공정함을 말하는 것 같지만 그들도 다수의 이익을 또 다른 다수의 이익 수준으로 만들려는 것뿐이다. 장애인에게, 범죄 피해자에게,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에게 먼저 눈길을 보내지 않으면서 무슨 평등이니 공정이니를 운운하고, 환경오염보다 자기 편리를 우선시하는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 공정, 공평, 평등을 말한단 말인가. 솔직하게 그냥 나와 내 동료들의 이익을 위해 싸운다고 했으면 한다. 가끔 그 뻔뻔함에 역할 때가 있다.


아,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말자. 그렇다고 그런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나서서 하는 캠페인이나 운동들이 다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다. 그저 솔직하지 못하게 너무 포장하는 것이 불편할 뿐이다. 진짜 억울하고 소외된 소수들, 이익집단을 만들지도 못하는 소수들, 목소리를 같이 낼 사람들을 스스로를 드러내 소리 높여 찾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두고 공정, 공평, 평등 같은 위대한 가치를 자기와 또 다른 다수의 이익을 위해 들먹이는 게 불편할 따름이다.


(그래, 사실 어쩌면 내가 이제 나이가 들어서인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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