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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렌 Jun 27. 2020

커피 한 잔의 가치

당신은 어떤 커피를 마십니까?

나는 아메리카노를 마시지 않는다. 더워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지는 않는다. 많아야 1년에 두어 번,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라 그냥 뭐 하나 시켜놔야 하는 자리, 동행과 동일하게 주문해 테이블에 놓아둘 때나 마실까. 가정에서 흔히 쓰는 캡슐 커피도 마시지 않는다. 맛이 없다. 핸드드립도 그저 푸어 오버로만 편하게(?) 마신다.


 주로 아메리카노를 제외한 커피, 특히 따뜻한 에스프레소 베리에이션 커피들을 마시고, 차가운 종류는 스타벅스에서 더블샷 아이스 셰이큰을 시키되 얼음을 빼고 시럽은 1/3만 넣어 마신다. 가끔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는 콜드 브루를 만들어 한 이삼 일 두고 마신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까다로운 입맛을 가졌거나 커피에 무슨 조예가 있는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난 미식가가 아니며, 음식을 그다지 가려먹거나 파인 다이닝을 찾아 먹지도 않으며 그냥 주는 대로 잘 먹는 스타일이다. 먹방을 세상 무가치하게 보는 사람이고, 맥주나 콜라 맛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며-정확히 말하면 그런 걸 굳이 신경써서 구분해서 마실 이유를 못 느끼는 거에 가깝지만- 커피 외 타 음료수는 기본적으로 잘 마시지 않는다.  


다만, 커피는 매우 다양하게 때와 장소, 기분을 고려해서 마신다. 커피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우선 에스프레소/에스프레소 도피오. 에스프레소를 일부러 마시는 일은 요즘엔 조금 줄었다. 새 원두를 사 와서 맛을 봐야겠다 마음먹었을 때, 그리고 막 식사를 마치고 아직 배가 부른데 커피를 꼭 마셔야 직성이 풀릴 때만 마신다. 간혹 비치 클럽이나 풀클럽에서 사를 마쳤을 때도 가능하면 에스프레소를 마시긴 한다. 유일하게 설탕을 넣어 마시기도 하는 커피다. 학창 시절 갔던 칠레에서 에스프레소 바에 간 적이 있는데 바에 서서 에스프레소를 시켜놓고 담배 한 대 피우면서 바텐더랑 몇 마디 하고는 에스프레소를 훌쩍 들이키고 나서던 사람들이 인상적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런 의자가 없는 'standing only' 인 에스프레소 바들이 좀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가격은 2천원면 딱 좋겠다. 드라이브 스루로 에스프레소만 바로 쫙 들이키고 나설 수 있는 카페도 있다면 나는 거기가 바로 천국일 것 같다. 최소한 3종류의 원두와 에스프레소 베리에이션을 다양하게 갖춘 곳이라면 금상첨화다.




수없이 많은 카페를 다녀봐도 정말 찾기 어려운 에스프레소 온 더 Espresso on the rock 이다. 

에스프레소에 물을 타는 것을 싫어하지만 유일하게 긍정하는 것이 바로 에스프레소 잔 가득 차는 얼음 덩어리 하나를 넣어 마시는 에스프레소 온 더 락이다. 자잘한 얼음은 넣으면 바로 녹아 풍미가 사라지니 안 된다. 큰 얼음 하나를 넣으면 크레마가 바로 냉동되듯 딱 제자리에서 두툼하게 그대로 있는다. 에스프레소의 뜨거움이 사라지기 전에, 얼음이 녹기 전에 서너 번에 나눠 찬 얼음과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느끼며 마신다. 오직 집에서만 마시는데 딱 한 번, 역시 외국인 모 카페에서 네모난 유리 잔에 사각 얼음이 몇 조각 들어간 에스프레소 온 더 락스 Espresso on the rocks 를 마셔본 적이 있다. 커피는 역시 좋았는데 개인적으로는 얼음은 잔에 꽉 차는 큰 거 하나가 제격이다. 이 때 잔은 각이 없는 투명한 에스프레소 잔이어야 한다.




메뉴에 있다면 빼놓지 않고 마시는 에스프레소 꼰 빠나. 

안 파는 곳이 많아 그렇지 판다면, 특히 식전이라면 마시는 꼰 빠나/콘 파나. 집에서도 휘핑크림을 사와서 만들어 마시기도 하는데 가급적 자주 마시는 것보다는 가끔 마시는 게 정말 맛있다고 생각한다. 어쩐지 즐기는 느낌이 물씬 나는 커피로 이걸 마시고 나면 끝에는 꼭 다른 커피를 한 잔 더 마신다. 그 날은 행복한 날이다. 크림과 에스프레소의 경계가 투명하게 보이는 글라스 잔은 필수다.




가장 흔히 마시는 건 플랫 화이트.

라떼는 내게 양이 너무 많고 폼의 형태도 플랫화이트가 더 좋다. 라떼가 밋밋하다 하면 라떼에 투샷하면 되지 않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난 그냥 이 정도 양과 비율이 좋다. 처음 가는 카페에 플랫화이트가 있으면 거의 무조건 플랫화이트로 카페의 맛을 평가하는 편이다. 에스프레소 추출도, 맛도 중요하지만 좋은 카페라면, 좋은 바리스타라면 밀크폼을 치는 것도 중요하고 그건 맛과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머그든 글라스든 어떤 종류이든 잔에 마시길 권한다. 종이컵은 질색이다. 씨가 한 대 피울 때도 플랫화이트는 참으로 좋은 페어링 파트너가 되어준다.



플랫화이트의 밀크폼을 내가 만족스럽게 치지 못하거나 너무 마일드한 카페에서는 피콜로(피콜로 라떼) 마신다.

라떼가 우선 양이 너무 많고 에스프레소 대비 우유의 양이 많아 안 마시는 편인데 반해, 피콜로는 내가 딱 원하는 양과 비율이다. 폼을 진득하게 치든 밀도가 떨어지게 치든 까다롭지 않게 마실 수 있다. 플랫화이트는 실제로 라떼와 거의 구분 없이 내주는 곳이 의외로 매우 많기 때문에 실패 확률이 높지만 피콜로는 메뉴에 있다면 최소한 불만은 없이 마시고 나오곤 한다. 사이즈 딱 떨어지는 글라스 잔에 마셔야 제 맛이다.



디저트로 사랑하는 아포가토는 에스프레소에 바닐라 아이스크림만인 것만 먹는다, 아니 마신다?

포가토엔 견과류도 뭐도 다 싫다. 그저 딱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덩이면 된다. 그런 게 있으면 빼달라고 한다. 에스프레소 맛이 좀 떨어져도 괜찮은데 아이스크림은 맛이 있어야 한다. 하겐다즈면 만족한다. 멋 내느라 치장한 아포가토는 싫다. 아포가토는 내게 디저트로서 100점이다.




와인을 즐기는 건 좀 번거로운 일인데 반해 커피는 상대적으로 쉽게 접하고, 한 번에 지출하는 금액도 적고, 거의 어디서나 마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매일 아메리카노 한 잔을 일상적으로 마시는 것도 좋지만 어차피 에스프레소 한 잔이 기본이고, 값도 다 거기서 거기이니만큼 때와 장소, 그리고 기분에 따라 다양하게 즐긴다면 일상이 조금은, 조금은 더 풍요롭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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