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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렌 Jul 11. 2020

권할 수 없는 취미 두 가지.

나는 즐기지만 권하지는 않는 취미 두 가지 중 첫 번째

살면서 많은 체험과 경험을 하면서 나의 취향을 파악한다. 좋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좋아하지만 즐겨하지는 않는 것, 혹은 좋아하지만 굳이 일부러 찾아 하지는 않는 것도 있다. 남들과 함께 하면 좋은데 혼자 하기는 뭣한 것도 있다. 잘하고 좀 빠져드나 싶다가도 깊이 파고 들어가지 못하고 그만두는 것도 생긴다.


그렇게 많은 경험을 하다가 즐기고, 좋아하고, 혼자서든 다른 이들과 함께든, 언제나 그 시간이 행복하면 그건 그렇게 취미가 되고, 그렇게 더더 깊이 들어가다 타인보다 뛰어나면 특기가 되기도 하고, 때로 운이 따라 그걸 업으로 삼고 살면 직업이 되기도 한다.


성인이 되기 전 학창 시절에도 많은 취미가 있었지만 그건 제외하고, 성인이 된 후에 내가 즐기는 것 중에서는 재미도 있고, 나름의 깊이도 있고 삶에 도움이 되는 것도 많지만 -엄밀히 말해 알아둬서 도움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며, 잘해서 쓸모없는 게 또 어디 있겠냐만- 사실 그중 일부는 추천을 하거나 선뜻 권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경험에서 말하는 것이기에 동의하지 않는 분도 있을 수 있겠다. 쓰는 나는 진지하지만, 진실로 가벼운 이야기이니 어디까지나 가볍게 읽으시길 바란다.


오늘은 그 두 가지 중 첫 번째 것에 대한 이야기다.




양아치, 날라리 하면 다양한 이미지들이 떠오르겠지만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역시 최고의 날라리, 양아치는 오토바이를 탔다. 뒷 쇼바를 여성 킬힐마냥 잔뜩 추켜올린 '청룡 쇼바'에, 이상한 불꽃이나 일본어 스티커가 붙은 오토바이를 타고 뒷자리엔 갈색 긴 생머리에 껌을 씹고 있는 또래 여자애를 태우고 담배 물고 서 있는 놈. 그렇다, 이게 내가 중학생 시절 겪은, 학생수 2천 명이 훨씬 넘던 전교에 열 손가락도 채 없던 '찐' 날라리다.


운동을 즐기고, 적당히 공부도 좀 하고, 싸움도 한 가닥 하던 나는 그런 날라리들은 안중에 없었다. 오토바이에 담배, 껌과 침. 그게 그 공부 못하고 놀기만 하는 날라리의 상징과도 같은 이미지였다.


시간이 흘러 대학에 가고 난 후, 날라리란 단어는 내게서 없어졌다. 그런 이미지의 날라리는 대학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양아치는 학교 밖에서 종종 볼 뿐이었다. 청룡 쇼바에 엑시브를 타던 날라리를 눈에 볼 일이 없어진, 달라진 일상이었다.


그 날라리의 상징이었던 오토바이가 나에게 떡하니 나타난 건 내가 아버지가 된 서른의 어느 날이었다. 달라진 건 내가 10대가 아닌 30대가 되었다는 것, 청룡 쇼바 엑시브가 '밀워키 바이브레이터' 할리데이비슨이 된 것이다.


뜬금없이 바이크를 타겠다고 한 건 인생의 즐거움이 사라진 탓이었다. 이제 꿈은 접고 한 남편이자 아버지로 살기 위해서, 그 삶에 전념하겠다고 고르고 고른 -아, 여기서 키 포인트는 우발적이거나 우연한 계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관찰과, 검색과 공부, 그리고 판단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취미라는 점이다.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 알고 하다가 슬금슬금 하게 된 게 아니라. 취미를 고르다가 알아보고 공부하다가 바로 이거라며 선택했다는 게 바로 그 날라리가 타던 '오토바이'였던 거다.


보통은 수많은 고비가 따를 선택인데, 내겐 아무 장벽이 없었다. 범생 타입은 아닐지언정 술 담배, 클럽, 도박, 무절제한 생활과는 나름 담을 쌓고 살던 나이기에 가족 설득은 전혀 장벽이 아니었다. 난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바이크를 타는 것이 아내에게도 별로 걱정되지 않을 만큼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부모님은 조금 다른 문제라, 추후로 미뤘다.


난 모든 취미, 모든 분야에는 깊이와 과학과, 천재들의 열정이 숨어있다고 봤고, 지금도 그리 생각한다. 나는 과거 '한때' 공부할 때 그랬듯, 자료를 찾아다녔다. 시대는 기술적으로 매우 발달하여, 책상에 앉아서도 시속 300km로 달리는 미친 열정의 아마추어 레이서들의 경험이나, 동네 배달부의 이야기, 소위 침 좀 뱉어본 중딩시절 날라리들의 충고, 해외의 다양한 기후와 취향을 가진 라이더들의 경험, 전문 저널리스트들의 글들을 접하고 고민할 수 있었다. 라이딩 포지션도 시뮬레이션해서 체크해볼 수 있었고 초보가 죽지 않고 안전하게 탈 수 있는 방법을 공부할 수 있었다. 오토바이는 이제 내게 '중학생 날라리가 타던 두 바퀴'가 아니라 절제할 줄 아는 어른의 여유와 열정을 자유에 실어주는 애마였다.


난 마음을 먹고 반년이 지나 소위 오버 리터급 바이크를 손에 넣었다. 태어나서 처음 탄 바이크는 면허학원의 '오도바이'였지만 내가 실제 도로에서 처음 탄 바이크는 바로 나의 첫 바이크, 무려 할리 데이비슨이었다.


중년의 바이크라는 이미지도 없지 않았지만 나의 할리는 젊음의 상징이었고, 페라리 운전자도 창문 열고 엄지를 날려주던 녀석이었다.


쌩초보 라이더인 나는 두려움이 없었고, 당당하게 회사에도 바로 타고 다녔다. 옷차림은 일찍 가서 갈아입으면 그만이었다. 1년 사시사철 눈이나 비가 오지만 않으면 재미없는 차 따위는 주차장에 박아두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녀석에 몸을 실었다.(이런 표현 유치하지만 그 심정은 라이더만 안다.) 나는 2년차가 지나면서 때때로 아내를, 아이들을 태우기도 했고, 같이 바람을 맞고 달리던 라이딩 메이트들과 규모와 상관없이 떼를 지어 달리기도 했다. 그래도 대부분의 시간은 혼자 바람을 맞으며, 또 가르며 달렸지만 외로움 따위는 없었다.


라이더가 되겠다 마음먹은 이후부터 10년 넘도록 무사고를 위해 검색하고 공부했다. 사고 영상들을 찾아보고 왜 사고가 나는지 연구했고, 위험한 도로와 그렇지 않은 도로를 파악했다. 외국의 안전 캠페인들도 찾아보고 영어든 스페인어든 자료가 있으면 닥치는 대로 봤다. 안전장비에 대해서는 몸에 대해서보다도 더 많이 공부했던 것 같다.


내가 정지선에 서서 신호가 바뀌고 1빠로 도로를 찢으며 달려 나가는 일은, 새벽 5시 교차로에서 사방 반경 50미터, 100미터 안에 차가 한 대도 없을 때가 눈으로 확인이 되는 때뿐이었다. 언제나 차와 버스나 트럭이 먼저 출발하면 그걸 보호막 삼아 옆에 끼고 교차로를 지나고 그리고서야 속력을 올렸다. 언제나 육감의 레이더를 최대한 활성화시키고, 2.0의 시력으로 넓게 또 멀리 봤다. 음악 따위는 듣지 않으며 전화나 그룹 통신도 하지 않는다. 모든 감각은 라이딩에만 집중했다. 일기예보를 끼고 살았고 바이크를 1년 365일 타려고 욕심 내지도 않았다. 비나 눈이 내릴 가능성이 40~50퍼센트 이상이면 타지 않았다. 술도 거의 안 마셨기에 딱히 밤 약속도 없고, 가족과 함께 하는 저녁 시간을 희생시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가급적 바이크로 출퇴근하기였던 것이다. 자주 타면 충동적이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했지만 바이크를 타며 교통법규를 다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법규를 위반하는 것은 잘못이고 해서는 안 되지만 자유는, 모순되게도, 역설적으로 그걸 어겨야 체감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핑계이고 변명이지만 라이더인 내게 우선순위는 법규보다는 나와 타인의 안전, 그리고 타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는 말자는 것이었다. 난, 법규만 지킨다고 안전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식의 변명은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그저 내가 알아보고 공부하고 경험한 기준이라는 것을 우선시했다. 비난을 받아도 난 라이딩에 있어서만큼은 내 기준이 우선이라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다.


어쨌든 덕분에 10년 넘도록 사고는 없었다. 자동차를 운전하며 딱지를 뗀 적은 주차위반을 제외하고는 대충 서너 번 있었던 것 같지만 바이크를 타는 동안은 십 년이 넘도록  딱 한 번 밖에 떼지 않았다.


그러나 당연히 내게도 위험한 순간들은 있었다. 죽을 뻔했구나 하는 아찔함도 있었다. 후들거려 10분 넘게 갓길에 바이크를 세우고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던 때도 있었고, 떨리는 손발로 시속 50km로 수 km를 기어가기도 했다. 내 눈 앞에서 동행이 날라가거나 고꾸라지는 모습도 목격했다. 하지만 그 위험은 내가 법규를 위반한 때가 아니라, 상대가 법규를 위반하거나 법규와 무관한 때였다. 인생의 운은 언제나 그렇듯, 종이 한 장 차이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고, 그리고 나서 운에 맡겼다. 나는 교통법규는 못 지킬 때가 있었어도 나와의 약속이나 아내와의 약속은 지켰다. 비록 현재 기준의, 한시적 결과론이긴 하지만 나는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게 내 기준에서의 자유를 십수 년 째 만끽하고 있다.


나는 서른 직전에 기억 속 양아치가 아닌 라이더가 되었고, 마흔이 넘어서도 아무 사고 없이 안전하게 바람을 가르고 있다.




섣불리 아무에게나 권하지 않는 취미다. 기혼에게 조금 더 권하는 편이지만 그것도 예전 이야기다. 지금은 지인 누구에게도 권하지 않는다. 내가 사고를 겪은 것도 아니고 나쁜 일도 없었지만 약간의 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간 타는 바이크는 몇 번 바뀌었지만 바이크를 타는 기준은 여전히 동일하고 법규보다 내 기준이 우선시 되는 것도 같다.


수많은 바이크와 라이딩 사진이 있지만 덧붙여 올리지 않는 것은 제목에 썼듯 권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자유만큼은 원한다면 스스로 얻는 편이 좋다.


내가 일흔이 되었을 때, 이십 대 같은 건강한 몸으로 바이크 한 대 타고 달리면 그만인 나이길 바라고, 내 딸과 아들도 즐길 수 있다면 타길 바란다. 아이들이 나와 함께 달려준다면 아마도 나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할아버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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