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소하게 살라고?
미래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의 하이 리스크 시대에 검소함은 미덕만은 아니다
경제 위기는 과거 1990년 이전에도 있었다. 대공황도 있었고 석유파동도 있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전쟁이 사라진 것 같지만 걸프전도, 아프간 전쟁도 있었고 중동은 화약고였다.
하지만 2천 년 이후 경제위기가 매우 잦다. 세계적 호황은 막을 내렸다. 중국이 10퍼센트 대 성장에서 이제 5퍼센트나 지키는 선으로 후퇴했는데 그마저도 이제 전 세계가 코로나에 휘말리며 불가능한 상황이다. 코로나 백신이나 치료제가 나오면 잠시 반등하겠으나 이번 판데믹은, 코로나는 이제 유사한 바이러스의 등장 주기가 짧아지고 강력해질 것을 예고하고 있다. 더불어 이에 각국은 자국우선주의를 내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국제정세가 안정적이냐, 그렇지도 않다. 중동은 여전히 화약고이고 아프리카와 중남미는 정치가 극심할 정도로 불안정해 내전 위험성이 상존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중국의 팽창주의에 중국과 경계국들의 관계도 만만치 않다. 더불어 무기 생산량이 쌓이면 미국은 전쟁을 만들어낼 것이다.
장기적으로 미래 예측이 어려울 때 가치가 변동하는 화폐에 근거한 자산가치도 변동성이 높지만 사실 더 큰 문제는 일자리가 크게, 급속히 줄어갈 것이라는 점이다. 그 어느 국가도 이걸 막을 방법을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인력을 줄이는 것이 기업의 이익을 보장하는데, 그걸 국가가 직접 지원해주며 고용을 유지하게 하지 않고 실직자에게 복지를 늘이는 형태로 하면 방향성 면에서나 흐름에서나 걷잡을 수 없다. 이 부분에서 게임은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더불어 전쟁이 아닌 질병, 예측 불가능한 바이러스와 그 변이에 대해서는 언제나 뒷북을 칠 수밖에 없으니 항상 얼마간의 인명을 담보로 한 후에나 한 고비 한 고비를 넘기는 상황이 현실화되었다. 국가 간의 빈부와 개인 간의 빈부가 이제 전례 없는 극적인 차이로 나타날 것이다.
여기에 의문이 든다.
과연 미래가 불확실할 때 검소함은 어디까지 유효할까?미래 리스크가 가득한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개인이 욕구를 참아가며 검소함을 유지하는 것이 미래에 어떨 결과를 보장해줄까? 모은다고 불어나는 단순함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지금 시대의 투자는 검소함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당연히 오늘만 보고 오늘을 사는 인생은 아니다. 그러기엔, 여전히 내가 10년 후를 살 확률은 매우 높다. 그건 현명하지 않다고 느낀다.
다만 이제 시대는 개인들이 20년 후를 내다보고 준비하며 사는 시대는 지났다. 과거 세계가 지금처럼 연결되기 전에는, 각국의 불황이 전 세계적인 문제가 되는 데는 시차도 있었고 그 정도 역시 에너지 문제를 제외하면 차이가 났다. 하지만 대륙 간 국경도 인접국과의 국경 정도로 가까워진 지금은 매우 빠르고 단시간에 전방위적으로 영향이 나타난다. 중국이 뭐 하나 하면 미국 증시는 당일에도 순식간에 빠지는 상황인 것이다.
어떤 걸 계기로든 경제위기가 5년 정도 주기로 온다면 어떻게 사는 게 좋을까?
사실 이것에 대한 답은 개개인에게 있다. 정답이 없기 때문에, 누구도 정답을 얘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고민해보는 것에 가치가 있다. 정답이 있으면 따라가면 되는데 이건 잘 배운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확률이 똑같은 수준이다.
내 경우는 과소비는 언제나처럼 불필요하나, 검소함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 불미스러운 사고를 경험해본 사람들은 약간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언제 갑자기, 이유 없이 사건사고로 순간 죽을 수 있다는 걸 피부로 체감하는 순간, 사람은 큰 허탈감을 느끼고 우울해지곤 한다. 하지만 그런 우울함은 오늘을 즐겁게 충만하게 사는 것으로 어느 정도 덜어낼 수 있다. 먼 미래에 대한 생각보다는 당장 오늘과 내일에 집중하면 된다. 아주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를 묻지마 범죄나 교통사고, 암 등 질병으로 잃어본 사람은 공감할 것이다. 실패로 얻었던 모든 걸 일어본 사람도 조금은 이해할 것이다. 먼 미래보다는 오늘과 가까운 미래만 고려 대상이 된다.
그렇다고 오늘, 놀고먹으라는 게 아니다. 밸런스를 찾으라는 것이다. 일도 취미도 사랑도 모두 중요하다. 다 잡으려는 욕심은 내려놓자. 다만, 어느 정도의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한 내려놓음은 필수적이다. 모두 다 가지려 하면 다 놓친다. 다 가지려 하면 내일 무너질 때 후회만 몰려올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국가는 언제나 낙오자를 건져준다. 낙오자를 죽지 않게끔, 혁명을 일으키지 않게, 사회 불안 요소가 되지 않게 해 준다. 이건 무슨 뜻인가. 이런 국가의 태도나 제도는 내가, 우리가 낸 세금을 바탕으로 한다. 자, 얍삽하지만 여기에 믿을 구석 하나가 있는 것이다. 열심히 산 당신은 보험이 하나 있다. 먼 옛날 같으면 굶어 죽겠지만 지금은 그래도 사회보장 시스템이 작동하고, 심지어 뭐 개인도 유튜브나 타 모바일/인터넷으로 기부를 받는 경우도 있으니 이제 극단적인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가능하면 일상의 밸런스를 유지하며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소비하며 즐기길 권하는 쪽이다. 30억 아파트 위에 올라앉아 더 올라가 보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10억 아파트로 내려가 더 쓰며 여유롭게 즐기는 게 낫다고 본다. 월 1000~2000만 원을 버는 30~40대 부부라면 이제 20억대로 올라선 강남 집 사려고 소비 감축하고 끝 모르는 재테크에 몰두하기보다는 그 소득과 자산으로 어떻게 하면 이른 은퇴를 하고 편안하게 즐기며 살지 D-day를 잡는 게 낫다고 본다.
20대에는 몰랐지만 30대가 되며, 혹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다 보면 부모님에게도 여러 위기가 있었음을 알게 되거나 친구, 지인의 부모님들이 돌아가시는 걸 보게 된다. 그분들 중 일부는 사고로, 일부는 사고나 매한가지인 질병으로 돌아가신다.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그분들의 인생은 즐거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마흔을 넘어선 지금 나는, 반환점을 도는 지금은 아이들을 보며 어느 정도가 밸런스가 맞는 삶인지, 오늘은 잘 보냈는지, 내일 무슨 일이 생겨도 후회는 없을지 생각해본다.
노인이 되어 젊은 날 모은 돈으로 세계여행을 다니고 스포츠카를 타고 여유롭게 사는 모습은 그다지 부럽지 않다. 지금 마흔이 넘은 내가 보기에 그들은 사실 즐길 여유가 별로 없이 힘들 것 같다. 여행은 실상 피곤한 일이고 건강한 육체가 없다면 고될 뿐이다. 세계여행은 실상 젊을 때 얻을 게 많지 나이 들어 보면 세계 어디 가나 사는 것은 다 거기서 거기다. 감흥도 줄어든다. 그것도 내 에너지에 비례하여 느끼는 것이다. 대단한 관광지여도 따져보면 내 인생만큼 대단치 못하다. 남미에 갔을 때의 20대의 나는 건강했지만 지금 같은 코스로 여행을 가면 산티아고 도착 후 이틀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여행을 마치면 입원할지도 모른다. 아마 늙어 그렇게 다니다 보면 젊은 나이에 온 사람들의 청춘을 부러워할 것 같고 내 맘 같지 않아 힘들어하는 노구를 원망할 것도 같다. 노는 것도 때가 있고 건강해야 즐기는 것이다.
적게는 예순, 많게는 일흔이 되면 자연 속에서 건강함을 유지하며 나의 자녀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라며, 아내와 차 한 잔 마시며 걷는 게 좋을 것 같다. 사실 젊었을 때 밸런스를 유지하며 가정이 화목하고, 일상을 즐겁게 건강하게 살아야 이것도 가능하다. 그 이상의 대단한 부는 필요 없지 않을까 한다. 죽을 때 내 뒤로 남는 것은 가급적 적을수록 잘 산 것이 아닐까.(아이들은 스스로의 몫을 스스로 얻어내야 한다.)
적당한 수준에서 오늘 즐기면서 아쉽지 않게 사는 것은 일종의 중도를 찾는 일이다. 그 밸런스를 찾는 것이 쉽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20대에, 30대 초반까지만 열심히 노력해도 경제적으로 완전히 자립하고 가정을 꾸린 후라면 스스로 조절이 가능하니 해봄직 하다 생각한다. 자존감과 성취감을 챙겨가며 건강을 유지하는데 신경 쓰면서 밸런스에 대한 고민을 하고 욕심을 지나치게 부리지 않는 것이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지금의 시대에 더 잘 맞는 것 같다. 사치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검소하게 살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원래 검소보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것쯤은 기본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