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 논쟁이 붙을 수 있는 주제지만 이건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것이니 이점을 참고하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때는 2010년 즈음이지 싶다. 월요일 아침에 일을 하고 있는데 타 부서 신입여직원이 내부 메신저로 면담을 청했다. 그녀는 당시 두 달 전 채용한 대졸 신입 공채로 들어왔는데 이런 경우가 많지는 않은 터라 무슨 일이 생겼나 싶으면서도 고충 처리 차원이겠거니 예상은 했다. 채용/인사 담당자에게 신입직원이 커피 한 잔이 아닌 '면담'을 청하는 경우라면 대충 연봉 문제 거나 신변 문제일 가능성 외에는 딱히 없기 때문이다.
회의실에서 만나서 안부를 전하고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요약하면 주말 밤 그녀의 부서 담당 임원과 팀장이 그녀와 다른 신입여직원 둘을 술 한 잔 하자고 불러내어 가볍게 한 잔을 하고 노래주점으로 갔는데 거기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둘이 각각 여직원 둘을 옆에 앉게 한 후에 술을 따르게 하고, 손을 잡기도 하고, 허리와 어깨를 두르는 등의 행위를 했다고 했다. 펑펑 울지는 않았지만 감정이 올라오는 걸 참지는 못하고 가끔 눈물을 흘렸다. 그 두 놈은 룸살롱 대신 노래방 가서 멋 모르는 신입 여직원 하나 씩 끼고 재미나게 놀았던 것이다. 다만 둘 중 다른 친구, 그러니까 팀장이 옆에 앉힌 신입은 팀장이 조심스러웠는지 터치를 하지는 못한 것 같고 임원 옆에 앉았던 그녀는 좀 당한 것이다.
내 상황을 조금 적자면, 나는 그 팀장보다 직급이 같았지만 짬밥으로나 나이로나 살짝 아래였고 사내에서 인망이나 자리도 조금 불안정한, 경력직 입사 2년이 채 되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관리부서는 타 부서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다만 난 그 임원을 평소에도 술담배 문제가 있어 좋게 보지 않는 편이었고 그 팀장도 아부가 심하고 전형적인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게 구는, 양아치 기질이 있는 편으로 보고 있었다. 둘 다 인사는 하지만 딱히 호감이랄 게 없었고, 나는 워낙 속내가 티가 나는 타입이다보니 그 둘도 아마 내 생각을 어렵잖게 읽고 있었을 터였다. 2년이면 타 부서여도 그 정도는 알만한 시간이다.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듣고 내가 '그 임원의 처벌을 원하냐'라고 분명히 물었을 때 그녀는 정확히 그렇다고 답을 했다. 면담을 마치고, 고민을 잠시 한 후 혼자 사실관계만 추가로 확인을 했다. 그러고 나서나는 내 윗 임원을 건너뛰고 - 그는 당시 내가 아는 한 '뭐? 왜 그랬데 그 미친놈은... 야 그걸 어쩌냐? 아 새끼 술은 하여튼 좀 작작 처먹고 다니지 왜 그랬데'하고는 좀 놔둬보라고 시간만 질질 끌다 유야무야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 오후에본부장님에게 바로 들어갔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좀 과격하게 개인 의견을 덧붙였다. '날려버려야 한다'라고. 덧붙인 주장의 근거 중에는 그 임원, 가해자는 근무시간에도 취한 모습으로 자주 책상에 발을 올리고 잠을 잔다는 것, 이미 팀장급에도 그런 영향이 있어 근태가 나쁘다는 것, 그리고 여직원이 대다수인 우리 회사에서는 치명적인 부분이라는 점이었다.
다행히 내 의견은 묵살되지 않고 받아들여졌고,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대표의 결정이 났고 그 달 말일로 그 임원은 사직했다. 해고가 되지 않은 것은 안타깝지만 그래도 그가 회사에 기여한 부분이 당해연도에 거의 절정이었던 데다 사안의 경중에 미루어, 반복된 사건이 아님을 감안할 때 그만하면 당시로서는 충분한 결과였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다. 능력이 매출로 직결되는 부분이 있던 만큼 회사도 사실 큰 결정을 한 셈이었다.
다만, 이 사건은 몇 달 지나지 않아 내게 그대로 돌아왔다. 저 사건에 더불어 한 번 더 조직 문제를 드러낸 것이 누적되었는지 조직개편 때 내가 다른 자리로 밀려나 파견을 권고받은 것이다. 관련하여 몇몇 사업부 임원들이 임원을 건드리는 일개 직원인 나를 계속 벼르다가 조직개편 때 이런저런 이유를 합리적인 것처럼 포장하여 내가 그쪽을 맡아서 정리해야 한다는 이유로 6개월 파견을 보내기로 의견을 모았다는 것이다.
본부장님이 나서서 불합리하다는 의견을 개진하였지만 대표는 사업부 임원들의 그 의견을 받아들였고 나는 파견을 지시받았다. 그리고 나는 바로 사표를 썼다.
내가 짜증이 반쯤 섞인 웃음을 지으며 사무실로 와서 관두겠다고 전할 때 내 윗 임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주가인 그도 한패였을 것이다.
내가 그만두게 된 때 피해자도 그 직전인지 그 직후인지 그만두었다. 아마도 조직 내에서 입지가 신입으로 견뎌내기에는 조금 무리였던 것 같다.
가해자는 이후 창업해서 거래처 대표가 되어 회사를 들락거렸고, 밑의 팀장이나 그 옆에 불려 가서 술을 따랐던 여직원은 자리를 지켰다.
일부러 건조하게 적었다. 이게 현실이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문제를 드러내면 문제와 관련된 자들을 모두 어떻게든 쳐내고 조직은 그전과 비슷하게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보통이다. 뭐, 그렇다 이 세상은.
전형적인 위계에 의한 성희롱, 성추행인데 내가 뵈는 게 없고 아쉬울 게 없는 마음가짐으로 회사를 다니지 않았더라면 과연 피해자를 도울 수 있었을까.(난 파견에 반발한 자발적 퇴사로 실업급여도 못 받았다.)
나에게 피해를 호소했던 피해자가 나에 대해 잘 알 리는 없었다. 난 사업부 직원들과 교류가 많지도 않았고 그리 친절하지도, 친근하지도 않은 존재였다. 그녀와 밥 한 끼 따로 한 적도, 커피 한 잔 한 적도 없다. 여직원들 사이에서 별다른 이야기가 돌았을 리도 만무하다. 난 종 치면 퇴근하는 류의 직장인이었기에 어쩌면 개인주의적인 사람이라고 알려졌으면 알려졌지 정의로운 인간이라거나, 약자를 돕는 이미지 따위와는 거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실제로도 그렇고.)
아마 내가 아니었다면, 내가 순리를 따라 윗 임원에게 보고했다면 아무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가해자와 나, 피해자 모두 떠났지만 조직은 그대로인 게 하나의 증거다.
난 그녀가 특별히 강했다거나 용기가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주말 밤에 임원이나 팀장이 부른다고 나가는 사람이 그리 강한 사람 일리는 없지 않나. 강단 있는 사람이었다면 '몇 신데, 미쳤나?' 하고 불러도 씹고 안 나갔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건 그녀가 사건 직후 빠르고 솔직하게 피해를 말했기에 나도 나설 수 있었다.
난 한편으로 생각한다. 피해자가 위계에 의한 역공과 피해가 무서워 숨고 감춘다면 과연 그 주변인들 중 역시 힘의 관계에서 하위에 있는 자들이 도울 수 있겠나 하고 말이다. 내가 피해를 입은 게 없는데 굳이 피해를 공론화하지 않는 피해자를 돕겠다고 위험을 무릅쓰며 나서겠냐고.
원래는 맥락이 다른 말이지만 이럴 때는 다른 의미로 쓰고 싶다.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스스로 피해 구제를 위해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주변에서 나설 리가 없다. 위계에 따른 관계에서 나와 동료들도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용기를 내지 않는데 굳이 누가 용기를 내어 뛰어들까. 그의 힘은 내게도 유효한데 말이다.
냉정한 말이지만 용기를 내지 않는 피해자가 피해를 키운다. 사람 사는 세상도, 인권 운운하는 이 세상도 약육강식의 세상이다. 여성들이여, 내가 스스로 안 나서면서 남이 날 도와줄 거라 생각하지 말자.
난 당시에 둘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가정의 외벌이 아빠였다. 내 아내는 당시에나 회사에서 떠밀리듯 나왔을 때나 나를 탓하지 않았었지만, 어쩌면, 어떤 아내였다면 '왜 괜히 나서서 밉보이고 손해를 보냐', '당신이 뭐가 잘났다고, 당신이 무슨 히어로라고 거기에서 나서서 이 꼴이냐', '이제 어쩔 거냐'라고 한 소리 들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론화되면 모두가 피해를 본다. 이건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용기 있게 제때, 적절하게 나서야 주변에서도 나선다.(솔직히, 그래도 나서서 안 도와줄 사람이 태반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선 내 입장에서도 똑같은 상황에서 안 나서는 사람에게 화살을 돌릴 수 있겠냐 하면, '글쎄, 뭐 그럴 수 있지' 싶기도 하다.)
가해자는 말할 것도 없이, 방관자도 가해자를 돕고 피해자를 양산하는 것이고, 냉정히 말해 입 닫고 그저 피하는 피해자도 가해자를 방조하고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데 일조하는 것이다. 용기가 모두에게 있긴 어렵겠지만 이런 책임의식은 모두에게 공히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해를 입는다면 제 때, 제대로 용기를 내시길 바란다. 종국엔 모두 피해를 입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면 누군가는 당신을 도와줄 것이고, 세상은 못 바꿔도 최소한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하고 스스로의 자존감은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존감은 그렇게 해서라도 지킬 가치가 있다. 인생은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