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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렌 Aug 04. 2020

공간에 투자해라.

자산 증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취향을 키우기 위해

공간이 사람을 만든다. 그러니까 공간에 투자해라. 자식에게 물려줄 것이 적다면 좋은 취향을 물려줘라. 자기가 배움이 짧고 가진 게 적어 사업에 어려움을 겪거나 속된 말로 상류사회로 진입하는데 장애가 느껴진다면 그건 취향 문제이고 취향을 가다듬게 하는 것은 공간이다.






좋은 취향을 가진 사람은 디자인 공부 없이도 상품/공간/시각 디자인 분야의 사업을 해나갈 수 있고 자영업을 해도 그 바탕이 되는 공간을 다룰 수 있다. 옷을 입어도 적은 돈으로 더 잘 입을 수 있고, 같은 옷도 다르게 풀어낼 수 있다. 좋은 취향을 가진 사람은 빈부에 무관하게 돈을 풀어내게 하는 능력을 가진다. 취향이 좋은 사람 중 부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이 사실이라 취향이 좋으면 부자들을 상대로 하는 비즈니스가 가능하다.


끔, 놀라울 정도로 들인 돈이 없는데 카페나 음식점, 사무실, 영업 공간을 멋지게 연출해낸 경우를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경우가 단적인 예다.


아무리 돈을 들여 디자인 회사에 의뢰해도 판에 박힌 디자인으로 찍어내듯 나오는 게 대다수인만큼 - 이게 어쩔 수 없이 당연한 일인 것이, 대학도 그렇게 가고 대학에서도 그다지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고 교수가 학생을 자기 스타일로 만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장과 수요자들은 트렌드 하기 그지없고. - 이런 취향은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의 '능력'이다. 기억하자, '취향은 능력이다.'. 그리고 취향을 위해 공간에 투자하는 것은 오래 걸리기는 하겠지만 높은 수익률로 회수할 수 있다. 그것도 유무형 모두로.(투자가 꼭 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취향은 오랜 기간 자연스럽게 길러지지 않으면 돈을 들여 좋은 취향을 경험하고 배워나가야 한다. 전자가 당연히 후자보다 효율적이다.


부자이건 빈자이건, 학력이 어떤 수준이든 전공이 무엇이든 사람이 빈해보이거나 혹은 옷을 좋은 걸 입혀도 태가 안 나거나 갖고 다니는 물건들이 제멋대로인 것에는 취향의 문제가 있다.


30억짜리 강남 40평대 아파트가 아무리 해도 2-3억의 땅값에 건축비 3억짜리 잘 지은 단독주택만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기업이 효율과 보편성, 그리고 자산 개념으로 똑같이 찍어 만들어내는 아파트는 공간에 대한 고민이 우선적으로 담기고 건축주의 라이프 스타일과 건축가의 철학이 담기는 집보다 감동이 없다. 취향이 반영되어 공간에 묻어나야 감동이 생긴다.(개인적으로 최근에 아파트의 인테리어를 기가 막히게 풀어내는 유튜버를 본 적이 있는데 그의 손을 거친 인테리어에 대해 말하기 전에 왜 우리가 사는 아파트의 인테리어가 후진지에 대한 그의 의견에 공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빠르게 빨리 찍어내기 위해 어떤 인부가 와도 다 비슷하게 나올 수 있도록 하는데 이게 결국 몰딩이나 기타 자재들로 덮어버리는 방식이라 결국 공간이 쪼개지고 디테일이 사라지고 가려지는 것이다. 자재의 가격 전에 선과 면, 그리고 조명의 위치와 모양 등이 우선이어야 하는데 선과 면을 다듬고 조명을 유려하게 만드는 것은 퀄리티가 중요하니 인부의 손길이 중요한데 이게 대형 건설사 입장에서 컨트롤이 안 되고 인건비가 증가하고 공기가 늘어나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당연히 빠르고 쉽게 적당한 품질을 표현할 수 있게 덮어버리는 식의 마감이 늘어난다.)


물론 소위 개취, 개인의 취향은 제각각이고 감히 무엇이 옳다 그르다 할 수 있는 주제나 사안은 분명히 아니다. 정답은 분명히 없다. 다만 누구나 취향의 문제를 인정하고 볼 때 좋고 나쁜 정도는 안다.


예를 들어 공간이 참 돈을 많이 쓴 느낌이 나는데 내 취향은 아닌 곳이 있고, 반면에 돈도 많이 썼는데 내 취향을 떠나 아예 아니다 싶은 공간도 있다. 전자는 괜찮다. 그저 내 취향이 아닌 것은 그 취향인 사람들에게 어필할 것이니. 그러나 취향 문제를 떠나 퀄리티의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 싸고 비싸고의 문제가 아니다.


인테리어 하는 사람들 중에 전공을 해서 잘하는 사람이 있고 전공도 완전히 다른 분야이고 대학교도 나오지 않았는데 기깔나게(!) 풀어내는 사람이 있다. 이유는 그냥 그가 좋은 취향을 가지고 공간이 주는 핵심 요소를, 공간의 기본 요소를 알기 때문이다. 옷도, 상품도, 헤어스타일도, 액세서리나 문신도 그렇다. 


좋은 취향은 돈 주고도 쉽게 빠른 시간에 갖기가 어렵다.


일의 측면에서 보면, 좋은 취향을 가지면 기술은 기술자를 이용하면 된다. 사업을 한다면 기술은 타인의 것을 이용하면 그만인데 취향은 아니다. 취향은 자신만의 것이 있어야 한다. 철학이 바탕이 된 취향은 마치 본능처럼 작동하며, 모든 의사결정의 근본이다. 자기만의 취향이 있어야 디렉터가 될 수 있다.






공간을 굳이 계속 언급한 것은 취향을 키우는 일등공신이 공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걸치거나 이용하는 패션, 소비재 이런 것들은 아예 인간이 그 안에 존재하며 일상을 보내는 공간에 비해 취향에 미치는 효과가 덜하고, 학교 공부는 결코 취향을 키워주지 않는다.


부모님의 교육, 먹이고 입히는 것들, 물론 중요하지만 취향은 대개 그 사람이 먹고 자고 일하는, 사는 공간에 절대적으로 의지하여 발전한다. 그래서 그 공간을 부모가 취향을 반영하여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부모와 사는 공간, 부모가 쓰는 물건, 부모가 입는 옷들 이런 것들이 자녀의 취향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들은 자녀 입장에서는 모두 공간 안에 녹아난다.


좋은 취향을 가진 사람은 없이는 살아도 거지 같이는 못 산다. 비싼 가구를 놓지는 못해도 색상과 질감, 톤으로 공간을 멋지게 연출한다. 자기를 드러내는 물건들로 방을, 집을 꾸민다.


독서실이나 고시원에서 공부하면 단순하게 한 시험을 준비하는데 집중하게 한다는 면에서 좋을 수는 있지만 우리는 모두 고시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다. 학생의 책상에 대해 고민하기 전에 책상이 놓이는 공간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하고, 남들이 다 하는 도배와 브랜드 가구, 단순히 짧은 안목으로 지금 유행하는 트렌드로 공간을 채우는 것을 지양할 필요가 있다.(미니멀리즘도 마찬가지다. 채울 취향이 없어 비우는 건, 비우니 편해 비우는 건 차선책 정도는 되겠지만 그건 전략적 선택일 뿐 취향이 아니다.)






과거 현대자동차에서 에쿠스 2세대 모델이 출시했을 때 아내와 어디를 가다가 에쿠스에 대해 내가 '근본 없는 화려함'이라고 한 적이 있다. 딱 그랬다. 범퍼 등 외부에 크롬 몰딩을 너무 많이 집어넣어서 화려하게 번쩍이게만 만들었었다. 그것은 페이스리프트에서 몰딩이 최소화되면서 조금 나아졌다.


돈으로 채우는 인테리어, 돈으로 만드는 공간, 비싼 명품으로만 휘감는 것이 취향을 가진 자에게 감흥이 없는 이유는 취향에 앞서 브랜드 이름과 가격으로 채우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건강한 몸을 만드는 노력 없이 뚱뚱하고 가꾸지 않은 몸을 취향이 결여된 명품으로 휘감아본들 패셔니스타가 될 수 없다. 잘 생기고자 노력한다고 잘 생겨지지는 않지만 자기 피부 톤을 알고 체형을 가꾸고 취향을 반영하면 싼 옷을 걸쳐도 태가 난다. (심지어 체형도 취향의 반영이다!)


모든 것이 취향이다. 사람을 보고자 한다면 그가 입는 옷, 가방, 액세서리를 보고 그가 사는 공간을 보자. 그러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단박에 드러난다. 명품으로 휘감는 사람인지 아니면 자기만의 철학이 있는 사람인지, 소비에 가치관이 묻어나는지, 별로 개의치 않는지 알 수 있다.


다만, 밖에서 옷이나 차로는 취향을 감출 수 있지만 집으로는, 방으로는 감출 수가 없다. 취향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배우자를 고르는 요령이기도 하다. 당하는 사람이 의도를 안다면 불쾌하겠지만 불시에 애인의, 관심 있는 사람의 공간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본다면 그의 민낯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보라고 권하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공간이 그 사람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한편, 굳이 단독주택을 지으면서 아파트의 구조와 인테리어를 따오는 것은 정말이지 멍청한 짓이다.)


모 정당 대표의 서울이 천박한 도시라는 말에 완전히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편리라는 이름으로 무형의 가치를 무시하고, 효율이라는 명분으로 전통을 훼손하고, 기술로 철학과 인문학을 찍어 누르는 트렌드를 가진 도시인 이상 외국의 유수의 멋진 도시들에 비해 천박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철학이 없거나 계속 변하는 이상 그 안에 취향이 존중받고 취향이 살아나는 공간은 생겨나지 않는다. 그저 핫하고 트렌디하고, 또 순간 반짝이는 곳들이 생겨나고 사라질 뿐이다.






이것은 대단한 칼럼도 아니고 비용을 받고 제공하는 글도 아니므로 조금 장황하지만 글이 써지는 김에 덧붙인다.


난 고향이 없다. 격한 표현인지 모르지만 나는 서울 태생인데 내가 태어나서 갓난아기 시절을 보낸 곳은 사라졌다. 집도 골목도 모두 형체도 없다. 내가 태어나 살았던 곳 중이서 현재까지 온전하게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곳은 내가 유치원을 다니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아파트 단지인데 그마저도 재건축으10년 이상 말이 많았었고 뉴스를 보자니 이제는 비로소 한 2-3년 후면 재건축완료기세다. 여섯 살 때 살았던 조금 더 오래된 아파트 단지 이미 십수 년 전 사라지고 거대하게 재건축 단지가 들어선지 오래다. 운 좋게 재건축이 되자마자 그 아파트 단지에 입주하여 살아보았는데 아이들에게 여기가 아빠 애기 때 살던 곳이라고 말할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내 유년시절의 기억 따위을 연상시키는 것이나 전달할 어떤 흔적도 재건축으로 사라진 것이다. 이후 지금으로부터 불과 10년 전까지도 아파트에 살았으니 내가 유년기를 보낸 아파트가 사라진 것처럼 내가 청소년기를 보낸 아파트들조차도 다 사라질 것이다. 시간 문제일 뿐이다. 내가 살았던 공간의 형태와 무형의 가치들이 모두 사라진 곳에, 나의 기억의 흔적을 건져내어 전해줄 매개체가 하나도 남김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자녀에게 물려줄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이 천박한 도시가 되는 것은 이렇게 근본 없는 도시가 되어가고 있어서다.


뿌리와 고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 공간이 사람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 공간이 사람의 취향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사라지니 사람을 파악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그의 고향을 보고 그의 자란 곳을 알면 그가 보이지만 그게 죄다 사라지고 그저 새로 들어선 아파트만 남을 때 겉으로 볼 수 없는 그의 내면을 볼 기회는 사라지고 나의 선택의 리스크는 올라간다.


이게 억지라고 느껴지거나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내 생각에 그렇다면 그는 이미 그 차이를 알지 못할 만큼 무미한 사람이 되었거나 그런 사람으로 키워지고 자랐다는 의미다.


색깔이 있는 사람은 무던히 대하기 쉽지 않지만 색깔이 잘 어울리고 조화로이 맞는다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회색이 될 수는 없다. 내가 흰 배경이 될 테니 너는 내 위에 채색을 해라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채색할 사람이 있을 때의 이야기이고, 그런 사람이 줄어들면 모두 무색무취의 무미건조한 사람들이 되고 다들 자본의 힘에 휘둘리며 대중적인 트렌드에 몰려다니게 될 것이다.


부모로서 내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취향을 갖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첫 고향도 서울의 아파트였기에 그곳은 머지않은 미래에 사라질 것이다. 아이들이 유년기를 보냈고 아이들과 우리가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살았던, 사계절 마당이 예뻤던 강남의 오랜 단독주택도 이번 부동산 대책들을 보니 곧 재개발에 사라질 것이다. 그나마도 30년 남짓 버텼으니 오래 버틴 지역이다. 아이들이 다녔던 유치원도 건물 형체도 안 남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남을 고향의 기억, 공간으로 존재할 가장 오래된 기억은 이 동남아의 아빠가 지은 집이 될 것이다. 자국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겐 나보다는 더 오래 고향의 이미지로 그들을 설명해줄 공간이 남는 셈이다. 이 집이 수십 년 후에 헐리고 다른 집이 들어서도 동네는 한국처럼 변하지 않을 것이고 분위기와 냄새가 남을 것이다.


부모님에게 받은 재물이 없다. 실향민인 조부모님도 부모님께 남긴 유산이랄 게 없다. 한 지의 땅도 없다. 나도 아이들에게 고국의 땅을 한 뼘도 주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국가가 허락하지 않은 유년 시절의 고향을 남겨주고, 그들만의 색깔과 취향을 잘 갖출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 나의 아이들이 강남의 아파트를 물려주는 부자 아빠의 덕을 보지는 못하겠지만 아빠가 준 공간 안에서 뭔가 느낀다면 그보다 값진 취향을 가지게 될 것이다.




당신의 방이 당신을 설명한다. 값비싸고 미려한 인테리어가 아니다. 공간이 주는 냄새, 공기의 미묘한 느낌들이다. 당신의 흔적들이 있는 장식, 이유와 사연이 있는 가구들이 그것이다.

취향에는 답이 없다. 하지만 색깔이 있고 주관과 철학이 있는 취향을 가진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힘이 된다. 공간은 당신을 설명하고 취향을 갖게 한다. 어렸을 때부터 공간을 스스로 꾸미게 하고 취향을 반영하게 해라. 공간에서 주고받는 상호작용 속에서 아이는, 당신은 좋은 취향을 갖게 될 것이고 그건 훗날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사람을 대하든 큰 무기가 되어 줄 것이고 또한 자존감을 감싸주는 거대한 방어막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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