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렌 Aug 06. 2020

꼰대를 위하여

라떼는 잘못이 없다.

전쟁이 있었다. 집과 고향을 잃었다. 가족이, 형제가 죽거나 없어졌다. 죽도록 가난했다. 열심히 일했다. 일단 먹고사는 게 급한 세상이었다. 주말에 일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일해야 먹고살고, 일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남자는 응당 이래야 하고 여자는 그래야 한다는 말은 진리에 가까웠고, 자식은 부모를 따라야 하고, 학생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 했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선생님을 당신의 선생님 보듯 존중하고 스스로를 낮춰야 했다. 먹고살만해지면서 독재자와 싸웠고,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 사회는 너무 빨리 변했다. 어느 순간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대체할 거라 했다. 온라인은 비용 절감을 가져올 거라 했다. 주산을 배웠던 이들이 컴퓨터에 겨우 적응하니 모바일 시대가 왔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체벌하면 영상을 찍었고 선생님을 협박했고 부모는 학생들 앞에서 선생님 따귀를 때린다. 선생님들은 스승의 날에 꽃 한 송이도 불편하다. 학교는 못 가도 학원은 가야 한단다. 회식할 때 아랫 직원이 윗 분에게 술 따르는 건 예의였는데 이제 여자 직원은 그건 성희롱이라며 해서도 시켜서도 안 된단다. 그들은 머리는 때로 이해하지만 행동은 따라가지지가 않는다. 자기가 살아왔고 배워온 것이 이제는 틀렸다고 하고, 심지어는 범죄라고 한다. 옳고 그름이 언제부터 법만으로 정해졌는지, 왜 언제나 새로운 것이 오래된 것보다 좋은지 그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야기할 곳이 없다. 미디어로 가득하고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가득한데 그들이 자라고 익숙해진 세상에서는 그걸 사용해본 적이 없다. 불편하다. 입도 다문다. 그리고 그냥 둔다. 피곤하다.






젊은이들은 지금 시대가 옳다고 여긴다. 솔직히 나는 수능세대이고, 아직 중년의 초입인 40대 초중반의 나이임에도 종종 부모님 세대가, 60년대 세대나 그 이전 세대들이 불쌍하다고 느낀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본다. 부모님이 태어났던 전전 시대, 그리고 유년기를 보낸 전후 직전의 50년대, 그리고 60-70년대를 거치며 극도로 발달하기 시작하는 사회, 모두가 성장하기에 정신이 없던 시절들, 결혼과 출산, 전통의 가치와 현대의 효율에 끼여 살아온 세월. 난 답답하다. 숨을 쉴 수 없을 것만 같다. 모든 게 너무 빨리 바뀌었는데 보이는 것들, 유형의 것들은 그래도 적응을 하겠지만 무형의 것, 가치들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 내가 배워왔던 것들이 모두 틀렸다 말하는 젊은이들에게 뭐라 말하고 싶지만 그들은 그저 꼰대라고, 라떼 이야기하며 비웃는다. 나라도, 얘기하기 싫을 것 같다.


유튜브로 밥 먹고 사는 유튜버도 광고 표시 기준을 몰랐다며 협찬과 광고에 대해 헷갈려한다. 그 정도로 변해가는 속도가 빠르고 새로운 것이 등장하고 그에 따른 사회문제나 제도 변화들이 계속 들쭉날쭉 변하는데 정신이 없다.


나는 딸에게 여자애가 왜 그러냐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우리 부모님이 손녀에게 여자애가 몸가짐이 어쩌고 하신다면, 그래서 딸애가 힘들어하거나 기분이 나쁘다면 나는 할머니에게 뭐라 하기 전에 딸아이에게 할머니가 살았던 시절에는, 엄마가 어렸을 때는 이라는 말을 해주면서 그게 할머니가 잘못된 게 아니라 할머니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서 지금의 세상과 기준이 다른 것이니 상처 받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각자 다른 기준에서 살아왔다는 걸 이해하고 스스로 강하게 마음을 먹고 강해지라고 이야기한다. 인류 역사에서 여성과 남성이 어떤 역할을 해와야 했는지 알려준다. 엄마는, 아빠는 어떤 세상에서 어떤 가르침을 받으며 컸는지 이야기해준다. 답이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체벌이나 아동학대에 대해서도 말한다. 인권에 대해서도 말한다. 지금 기준이 옳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저 변해가는 것인데 답은 모른다고 말한다. 다만 나와 아내가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인류의 역사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은 아주 짧으며 수천 년 이상 남녀가 다른 역할을 가져왔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달랐으며 그 와중에 옳고 그름이 있는 게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 있을 뿐이라고 말해준다. 법은 법이고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고.


왜 지금 세상이 언제나 옳다고 여기는지 모르겠다. 전통 그 자체를 지금의 잣대로, 효율과 논리의 해석의 범주에 넣고 그것은 구태이고 적폐라고 한다. 인간이 동물이길 부정하면서까지 인간이 특별하다고 여기게 만든다. 그리고 인구가 마구 늘어나고 지구는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사실 지구의 기준에서 보면 인간은 암세포 같은 존재일 수 있는데 암세포는 그것을 모른다.


타국에 살면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전통을 폄훼하고 짓밟고 경시하며 발전했는지 알게 되었다. 전통악기 하나 다룰 줄 모르고 민요 하나 부를 줄 모르는 걸 넘어 제대로 된 한복 한 벌 없다. 부끄러웠다. 우리는 이제 우리말과 글의 주요한 부분인 한자를 가르치고 배우지 않으며, 심지어 국사도 영어 수학 저 뒷자리에 놓이게 했다. 난 한자보다 영어를 중시하는 것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아파트가 세상 최고라며 한옥의 구조도 모른다. 내 고향에 가면 콘크리트 괴물들만 가득할 뿐 흔적도 없다. 아직도 고향이 중요한 민족이, 국민들이, 사람들이 많은데, 전통이 법보다 우선하는 경우도 많은데 우리나라는 마치 그런 것들이 잘못된 것이고 이 새로운 질서가 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법도 계속 변한다. 계속 변하는 법이 절대기준이 될 수 있을까? 50년을 다른 기준에서 산 사람이 바뀐 지 3년 된 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강력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실형을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과연 정당하고 합리적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온 세상이 다르고, 내 자녀가 살아온 세상이 다르며 내 부모가 살아온 세상이 다르다. 지금의 세상의 기준이 모두에게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거의 기준이나 잣대가 모두 틀렸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님은 자명하다. 그 법은 또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비록 헌법이라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이 존재한 이래 불법이었던 것이 형량이나 세부 기준이 바뀌는 것 수준이 아니라 합법이 불법으로 되거나 아예 새로운 법규가 생길 때 우리는 기성세대에게, 지금 새로 생긴 법률과는 다른 법률 하에서 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사람들에게 너무 엄격하게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난 부모님에게도 맞아봤고, 선생님들로부터도 맞으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렇지만 난 내가 아동학대를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나를 가장 많이 때린 우리 엄마가 아동학대자였다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는다. 난 맞을 짓을 해서 맞았다는 말에 상처를 받지 않았고, 내가 아는 건 내가 어지간히 잘못하지 않으면 맞지 않으며, 나를 때리는 엄마는 나를 사랑하는 엄마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게 내가 아는 진리다.


그저 일상화된 구타를 하는 선생님도 있었지만 그건 길에는 때로 신호위반을 하는 자동차들이 있는 것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이 언제나 나를 공평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주었고 피해야 할 위험을 감지하게 해 주었으며, 나를 보호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난 그 선생님을 욕하지 않는다. 나를 때린 부모님이나 선생님은 그들이 자란 것에 견주어 그들이 옳다고 여긴 행위를 한 것일 뿐이다. 그 안에 비록 바람직하지 않은 점이 있었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그 자체로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사회생활이고, 난 학교 생활에서 이 사회를 안전한 테두리 안에서 시뮬레이션을 통해 배웠고 그 덕분이 각종 사건사고를 겪으면서도 심리적 붕괴 없이 견뎌내어 이겨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법은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 법이 실제로는 평등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유전무죄를 떠나 법은 모두에게 제각각으로 적용되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모든 나라에서 그러하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법이 모든 것인 양 군다.


평등? 인류 역사에 그런 가치가 실현된 적이 있나. 인간이 동물인 이상 그런 가치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법으로 아무리 이야기해도 마찬가지다. 법이 무효하다는 말을 하는 거냐고? 그렇지는 않다. 법은 필요하다.  그러나 합법과 불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데 있어서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같은 기준을 강요하고, 예를 들어 50년을 이런 기준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이제 갓 성인이 되어 스스로 법의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과 같은 기준으로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우리는 지금의 잣대가 미래에 바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좀 더 조심해야 하고,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를 비난하고 희화하기 전에 역사를, 과거를, 그들의 시대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당신도, 나도 없다. 그 세상이 틀렸다 하지 마라. 그 말인즉 이 세상도 틀렸다는 뜻이니까.






끝으로 나는 꼰대라는 말 자체를 쓰는 사람을 싫어한다. 꼰대는 없다. 그저 공감능력이 부족하고 자기 이야기만 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자가 있을 뿐이다. 그걸 꼰대라는 말로 윗 세대를 통째로 비하하고 비웃고 싶은, 철없고 오만한 어리석은 당신이 있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간에 투자해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