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렌 Aug 10. 2020

마흔 넘어 돌아보는 친구란, 인간관계란.

미니멀리즘의 추구는 물건 아닌 관계부터

난 인간관계의 폭을 넓게 가져가지 않는 사람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친구와의 관계도 복잡해진다. 어렸을 때는 빈부나 혹은 종교, 직업 따위는 물론 부모나 가정사에도 무관하게 사귀었다. 성인이 되니 대학 이름이, 그리고 다니는 대학의 지역에 따라 변화가 왔다. 새로운 대학 친구들은 같은 대학이라는 이유로 가까워졌지만 군대나 어학연수, 그리고 집안 사정 등에 따라 예전만큼 쉽지 않음을 느꼈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는 남들과 다른 길을 환경에 의해 강요받았고, 성인이 된 후에는 내가 스스로 원하는 길을 선택하다 보니 나와 비슷한 환경을 가진 이들이 선택하는 길에서는 멀어져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 이후부터 계속되던 인생의 작은 갈림길마다 나는 자의건 타의건 계속 소수의 선택지를 선택했던 것이다. 어느새 다수의 친구들이 걷는 소위 메인 스트림은 내 길과 방향이 달랐다.


제법 어른이 된 후, 대다수의 친구들이 고시를 보고 대기업과 공기업에 들어갈 때 난 그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 나은 직업을 가지거나 취업을 늦게 하거나 대학에서 배운 것 더 배우려고 대학원에 가지도 않았다. 난 열쇠 세 개를 받고 결혼하던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런 모습에 가까이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이제 중년의 길로 들어선 지금 보면, 소위 그렇게 잘 나가는 친구들 주변에서 아직도 어슬렁 거리며 같은 리그를 구성하려고 애쓰는 애들을 본다. 미안하지만 약간 역겹다.) 난 그런 삶에는 로망이 없었다. 이미 아버지가, 작은 아버지들이 다 보여준 삶이었다. 희생하는 아내의 모습도 어머니를 보고는 원치 않게 되었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었고, 행복은 또 돈과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음을 20년 넘게 똑똑히 보았기에 옆으로 치워두었다. 다행히 부모님은 성인이 된 나를, 이미 혼자 살고 있던 나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게 나를 놓아주셨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독립적인 인간이 되어 있었고, 홀로 길을 걸으며 내 가정을 꾸렸고, 여느 이삼십 대처럼 친구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여가를 즐기지도 않게 되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일은 이미 대학생 시절부터 남 얘기였다. 난 절친한 친구들과 가까운 곳에 거주한 지 이미 꽤 오래된 상태였다. 마음이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거리가 상당했다. 여러모로 그다지 많거나 다양한 친구가 필요하다 느끼지 않았다. 내겐 나와 다른 길을 가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불필요했다. 내가 가는 길에 있는 사람들이 내 친구였다. 내가 즐기고 싶은 걸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러면 그만이었다. 일부러 인간관계를 넓히는 것은 이미 의미 없는 일이었다. 피곤함만 가중하는 것이었다. 자연스레 생기는 관계들만 챙겨도 내 삶은 충분히 바빴고 그래도 귀찮거나 불편한 일들이 많았기에 굳이 의도적으로 인간관계를 챙기지는 않았다. 직장 동료들과 최소한의 사적 관계에 할애하는 시간도 많다고 여겨졌다. 여자 친구, 취미, 대학원과 직장, 그리고 가족만으로도 내 여유는 제로였다.


결혼 후엔 내 아내가 싫어하는 친구를 굳이 설득해서 만나지도 않았고, 나를 반겨하지 않는 친구 아내의 모습을 보면 그 친구를 가까이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친구와는 없던 시기와 질투가 부부끼리 만나는 관계가 되니 생겨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때로 질렸다. 필요할 때만 연락해서 도움을 청하는 친구나 지인들은 서른을 넘어서고는 다 칼로 무 베듯 잘라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냈던 친구가 오랜만에 만나 도움을 반복적으로 청할 때 단도직입적으로 단칼에 끊어내는 일도 간헐적으로지만 꾸준히 있었다. 이미 아이가 둘인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 명확히 자각하는 것은 이미 대학생 시절부터 본능처럼 자리 잡았다.


어느 날 유명 작가 한 명이 '살아보니 친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라고 한 말에 동의했다. 서른 즈음까지는 '힘들 때 곁에 있어주는 것이 진짜 친구.'라거나 '내가 잘 나갈 때 친구가 의미가 있지 내가 망하고 밥벌이 제대로 못하면 그 친구들 다  떠나고 소용없다.'는 이야기로 친구에 대해 스스로 인지하고 주변에 조언하고, 그에 따라 생활했다면, 서른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저 유명 작가의 말 - 인용하자면 "쓸데없는 술자리에 너무 시간을 많이 낭비했다. 맞출 수 없는 변덕스럽고 복잡한 여러 친구들의 성향과 어떤 남다른 성격, 이런 걸 맞춰주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읽을걸. 잠을 자거나 음악이나 들을걸. 그냥 거리를 걷던가. 결국 모든 친구들과 다 헤어지게 된다." - 처럼 친구는 내 뇌 속에서, 생활 속에서 울타리 바깥 곁자리에 있게 되었다.


요컨대 서른까지는 내 여건이 되는 한 맺은 관계들은 잘 유지하려고 애도 썼다. 사업을 시작하고는 애는 안 쓰고, 있는 관계들을 유연하게 유지하고 적은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10년 이상 오래된 관계는 그래도 흔치 않으니 전보다 집중해서 유지하려 했다.


지금은, 그냥 둔다.


20년 넘는 성인으로서의 인간관계 역사에서 희한한 점은, 그리고 항상 일어났던 일은 애썼던 관계가 유지되거나 남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학창 시절을 공유하지도 않았던 사람들, 사생활 하나 모르고, 묻거나 알려고도 하지 않고 물 흐르듯 놔두었던 사람들이 10년 넘게 지난 지금 안부도 더 자주 묻고 더 자주 이야기한다. 이삼십 년 지기와도 다르다. 난 그들의 어린 시절을 모르며, 묻지도 않으며 그저 지금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게 좋다. 그들이나 나나 억지로 뭉치자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도 가족이 있는데 우리는 서로의 가족 간에, 부부끼리 보자거나 하는 시도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배우자들로 인한 갈등이 전혀 없으니 관계가 편안하다. 그냥 물 흐르듯 두었더니 그 강이 지금 곁에 흐르는 상황인 것이다. 물이 불거나 줄어들면 물줄기가 다르게 흐르고 누군가 우리 곁에서 둑을 쌓으면 안 흐르기도 할 것이다. 그럼 또 그런대로 두면 된다. 이게 지금 내 생각이다.






이런 내가 블로그, 유튜브, 인스타 그리고 브런치까지 하고 있는데 이걸로 사람을 만나려고, 인관관계를 형성하려고 하는 목적은 없다.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그런 관계들은 생겨난다. 다만 나 스스로 먼저 그런 관계들을 맺으려고 노력할 열정까지는 없다.


하이텔, 나우누리 시절에는 일부러 관계를 만들려고도 했다. 시간이 흘러 블로그를 시작하던 때는 이미 그런 건 없었다. 이미 겪을 만큼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기면 또 막지는 않았기에 블로그를 매개로 만나는 일들은 생겨나고 관계도 만들어졌다. 그 덕에 가까이 지내진 않지만 언제나 공감대를 갖고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볍디 가벼운 온라인이 매개여도 10년이 넘으면 그 안에서 비록 가깝진 않아도 가치관을 공유하고 공감대로 엮이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난 블로그와 유튜브, 인스타 등을 엮지 않는다. 다 따로따로 그 미디어 특성에 맞춰서 각각 이용한다. 그래서 팔로워를 늘이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한쪽으로 집중시켜 유입을 늘여 수익을 추구하거나 인기를 모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브런치도 마찬가지로 연동할 생각이 없다. 내게 이 미디어들은 각각의 특성을 기반으로 내 마음대로 이런저런 시도를 할 수 있는 바닥일 뿐이다. 블로그가 오랜 취미이자 일상이자 속내를 드러내기도 하는 약간은 정성스러운 기록지라면 인스타는 가벼운 일상 속 단편적 기록일 뿐이다. 페북은 극소수와만 공유하고 옛 친구가 아닌 이상 친구 신청이 와도 맺지 않는다. 동창들이 종종 신청하는데 그냥 모른 척한다. 이제 와서 찾는 인연이라면 없어도 되지 않나 싶은 생각이다. 외국에서 살다 보니 막 안면을 트거나 알게 되는 사람들, 그러니까 현지인과 외국인들이 서로 친해지기 위해 맨 처음 하는 게 페북을 트는 거지만 나는 안 한다. 관계가 복잡해지는 게 싫기 때문이다. 나는 핸드폰 자판을 4개 국어로 사용하다가 그것도 복잡스러워 3개 국어로 줄였다. 가끔 중국과 대만 페친들이 중국어로 이야기하면 써야 할 때가 있지만 잦지 않아 이젠 그냥 번역기 돌려서 어색한 것만 수정해서 따서 붙인다. 귀찮을 땐 간단한 영어를 섞으면 그만이다. 알아서 알아들을 거라 믿는다. 블로그 건 유튜브 건 서로이웃, 맞구독, 맞팔 따위는 하지 않는다. 관심 없으면 아무리 매일 와서 이것저것 눌러주고 댓글을 달아주어도 그의 것에 찾아가지 않는다. 한 때 유명세도 타보았고 사생활을 일부 터놓을 때도 있다 보니 거리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과 장소에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느끼는 건 '편치 않음'이었는데 - 내가 착한 사람은 아니라 그렇다 - 다행인지 불행인지 선을 넘는 일이 생길 만큼은 아니어서 계속하던 대로 하고 있다. 이것들 모두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뿐이고 이걸로 이루려는 건 없다. 브런치도, 책을 내려는 목표도 없다. 이미 출간하여 아직도 신기하게, 왜지 싶을 정도로 팔리고 있고 쥐꼬리만도 못한 인세가 안부 전하듯 일 년에 두 번 잊을만할 때쯤 들어오는데 다시 책을 쓸 의욕은 아직 나지 않는다. 자연스레 두다 보면 생길 수도, 아니 생길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온라인 기반 인간인 것은 아니다. 난 여전히 문자보다 전화를 선호하며 대면 관계를 지향한다. 메신저로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만나거나 전화로 통화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일부 현대인의 그것은 내겐 해당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면서 하는 말 중 하나가 '우리 소통해요.', '소통하고 싶어서' 같은데 그런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데 만나거나 전화하는 것을 피하거나 메신저를 선호하는 경향이 생겨나는 건 이상한 일이다. 더군다나 덧글에 답을 하는데 고작 한 줄 두 단어를 넘지 않는 것도 그 소통이 거짓, 가짜라는 반증이다. 그들은 로봇처럼 따다 붙일 뿐이다. 그런 이들은 비판적인 덧글이라도 달릴라치면 다 삭제해버린다. 칭찬과 공감만 남겨둔다. 그걸 소통이라 부를 수도 없고 소통 따윈 애초에 관심 없다. 그저 그들은 유명해지거나 많은 팔로워를 갖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소득창출이 하고 싶고, 그걸 명함으로, 나 팔로워 몇 명이라고 그걸로 그 세계에서 계급 놀이를 하고 싶을 뿐이다. 경험상 일일 방문자가가 만 명이 되고 덧글이 매번 50개만 달려도 정성껏 대하자면 일상에 지장 이 있을 정도다. 길에서 누가 나를 알아보면 부담스럽다. 이게 보통이다. 걸핏하면 누가 와서 인사하고, 밥 먹는데 누가 자꾸 쳐다보고 와서 말 붙이고 이러면 사실 정상 생활이 안 된다. 달린 덧글에 정성껏 답글을 하려면 사실 덧글 수가 적당히 적어야만 가능하다. 안 그러면 내 삶의 여유가 사라진다.


가끔, 혹은 종종 순수하게 욕구가 돋는 것을 내 뜻대로 내가 스케쥴링해서 한다. 내 삶은 딱 심심치 않을 만큼 심플하고 난 내 마음대로, 내 철학대로, 내 가치관대로 산다. 30대 때의 나와 달리 인간관계의 스트레스가 없다. 심지어 본가도, 처가도 물리적 거리만큼 물러섰으니 부부에게 부담이 없다. 부부가 여력이 있으니 자녀교육도 무게가 그렇게까지 무겁지 않다. '가짜사나이'를 보고 돌아보니 내 몸은 여전히 건강하고, 신체는 여느 20대보다 좋으며 신경은 일체의 무뎌짐 없이 예민하다. 인간관계가 단순하니 밤에 술도 안 마시고 야식 먹을 일도 없다. 당연히 그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나 갈등도 없다.


사람에게 필요한 물리적, 공간적 영역이 얼마인지는 모르겠다.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적절한 수준의 대면 접촉이, 관계의 폭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대 도시의 인간은 인간의 DNA가 가지고 있는 수만 년의 역사 속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있다. 과거 어떤 특정 시점의 사람도 지금 현대인처럼 많은 사람들과 만나 말을 섞고 네트워크를 이루며 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피로한 것은 당연하다.


삶이 피로하다 느껴지면 애먼 물건 탓하지 말고 복잡한 인간관계부터 단순하게, 가볍게 해볼 일이다. 관계가 단순해지면 중요한 것에 더 잘 집중하게 되고 일상과 삶에 여유가 생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짜 미니멀리스트, 이미지로 소비되는 가짜 미니멀리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