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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렌 Aug 16. 2020

노브라를 매일 본다.

유두의 공격성이나 성적 억압의 문제가 아닌 익숙함의 문제일 뿐.

이런 옷차림의 여성들을 매일 마주치며 보고 산다.





나는 노브라, 탈 코르셋은 젠더 이슈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래 인간은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며, 낯선 것을 싫어한다. 사회를, 조직을 만들고 나면 관습, 관행을 만든다.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관습을 벗어난 것들을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다 받아들이는 생명체가 아니다. 그게 인간이고 인간이 모여 만드는 조직의, 사회의 특성이다.


노브라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개인의 가치관에서 젠더의 이슈가 될 수는 있지만 노브라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그저 사회의 일반적 관습이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고, 그것은 익숙해지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


우리는 해변이나 수영장에서 비키니를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그것이 처음 나왔을 때는 이슈였지만 비키니는 사실 여성 억압이나 남성의 욕구 충족 차원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비키니는 그것이 응당 있어야 할 곳에서는 익숙하다. 레깅스도 그렇고 탱크탑도 그렇다. 양쪽 엉덩이가 완전히 드러나는 비키니는 젠더 이슈가 아니라 그저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익숙한 건 아니라 그런 것뿐이다.






내가 노브라와 관련해서 갖고 있는 첫 기억은 1995년 여름 방학이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는 두 살 어린 한 여자애와 소개팅을 했는데, 미국에서 10년째 살고 있던, 잠깐 한국에 놀러 온 친구의 사촌 여동생이었다.(나나 내 친구나 당시 기준 전국 최소 상위 5퍼센트 이내의 나름 성적 괜찮고 자기 앞가림하던 학생들이었으니 고교생 소개팅이라고 날라리 운운하진 말자.) 롯데월드에서 만났는데 청바지에 흰 반팔 티 한 장 입고 나타난 키 170cm의 그녀가 노브라였던 것이다. 1995년 롯데월드에서 고등학생이 흰 티셔츠에 유두가 눈에 띄는 또래 여학생과 소개팅을 한다, 상상해보시라. 휴. 롯데월드에서 놀고 지하철을 탔을 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 애 가슴을 보고 있었다. 어른 몸을 한 여드름 난 사춘기 여학생이니 더 이질감이 느껴지는 장면이었으리라. 내 기억에 그 날 기억의 90퍼센트는 젖가슴과 유두였다. 그리고 헤어질 때 나는 '한국에서는 속옷을 입는 게 좋겠어'라는 말을 했다. 그 애는 자기가 지낸 곳에서는 아무렇지 않아서 그래도 될 거라 생각했고 나올 때도 아무도 속옷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아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하철에서 보니까 아닌 것 같더라 라고 했다. 그다음 만날 때 그 아이는 속옷을 입고 나왔다. 그리고 나도 그때가 더 편했다.


25년이 지난 지금 내가 사는 곳의 경우 노브라는 물론이고 몇몇 해변에서는 토플리스도 심심찮게 본다. 사실 노브라는 길에서도 거의 매일 본다. 주로 서양인들인데 때와 장소도 없다. 더운 나라인만큼 아주 얇은 옷 하나 걸친 채 스쿠터를 타고 맞바람을 맞으며 유두를 뚜렷이 드러내고 다닌다. 간혹 현지인들이나 동양인들도 어렵잖게 본다. 마트, 레스토랑, 카페 등 해변과의 거리도 관계없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할 때면 노브라 여성을 대여섯 명 이상 본다. (그러나 또 로컬 지역에서는 이런 풍경이 일상은 아니다.) 서울에서 노브라를 익숙하게 접하고 살지 않았지만, 그게 일상적인 풍경이 되고 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가끔 때때로 성적인 느낌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건 그냥 커피 향이 진하게 퍼진 카페 앞을 지날 때 커피 한 잔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자연스런 일이다. 노브라가 가끔 야해 보이는 것은 정상적인 남성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해변에서 토플리스로 상체를 드러내는 여성도 보고, 마트에서 노브라로 축 늘어지는 옷을 입고 상체를 휙휙 숙여가며 속을 다 드러내 보이는 여성들도 보는데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갈 때야 있지만 그렇다고 욕하거나 성적 환상에 휩싸이거나 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저 그 풍경이, 장면이 자유로움을 상징하고, 건강해 보인다.


20~25년 전 캐리비안 베이에서 또래 친구들과 비키니를 보던 혈기왕성했던 20대의 나와 길에서 노브라에 내 눈을 사로잡는 백인 여성의 유두를 보는 40대의 나도 다르다. 굳이 따지자면 전자가 훨씬 강렬한 성적 체험이다. 왜, 내겐 그때 그런 모습이 더 낯설고 덜 익숙했고 더 강렬한 장면이었으니까.


익숙해지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더운 나라이니 여성들이 노브라가 편하고 누가 보든 말든 그렇게 다니니 현지인들도, 나 같은 보수적인 동양인 도시 남성도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런 풍경을 건강하고 활기차며 생명력 넘치게 보는 것이다.


7~8월 해운대 해수욕장 길 건너편 편의점에 비키니 차림으로 음료수를 사는 여성을 보는 것은 일상적인 모습이다. 그렇지만 2킬로만 더 들어가서 주택가, 아파트 단지로 그런 차림으로 들어가면 그것은 다른 이야기가 되고 이질적인 모습이 된다. 그런 것이다.


내가 첫 직장을 다닐 때 어느 날 회식자리였나 부서 남자 직원들과 임원 몇 명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 TV에서 어떤 여자 모델인지 배우인지가 가슴 쪽이 깊게 파인 원피스를 입고 나오는 장면에서 임원 중 한 분이 막 웃으면서 '우리는 저런 여자를 옆에서 보면 옷 속으로 손을 넣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라고 하고 주변의 아저씨들이 맞장구를 쳤던 기억이 난다. 그 표현은 저질이지만 그들이 변태인 것은 아니다. 그 양반들은 그런 옷차림의 여자는 술집에서 밖에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장소에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게 전부다.






익숙하지 않은 무언가를 조직 안에서 사회 안에서 누리거나 행하려면 불편한 시선 따위는 감수해야 한다. 젠더 문제가 아니라 마조리티와 마이너리티의 문제이고, 변수를 보는 상수들의 관점이고, 개들 세계에 똑떨어진 고양이가 겪어야 하는 당연한 일이다.


과거, 내가 새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다.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출퇴근하던 나는 회사에 구두와 옷을 가져다 두고는 남들이 출근하기 전에 먼저 출근해서 헬멧과 자켓, 기타 장비류를 남들 시선을 최대한 끌지 않게 책상 아래와 사물함에 넣어두고 신발과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다듬고 앉아 일과를 시작했다. 그렇지만 내가 이런 노력을 기울였다고 해서 나를 특이하게 보는 사람들이 없다거나 뒷다마에서 자유로웠을 거라 생각지는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바이크를 타고 출퇴근한다는 것만으로 난 언제나 튀었다. 지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남들의 시선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고 소수로서의 자각이 있었기에, 일은 정상적으로 해냈기에 대놓고 손가락질을 받고 비난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내가 내 자유만을 이야기하며 너무 튀게, 과격하게 굴었다면 당연히 조직에서 눈 밖에 날 것이고 선한 이건 악한 이건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인간 조직과 사회의 특성이다.


난 한국에서 바이크를 타는 내내 그런 시선 안에서 살았다. 법적으로 인정받은 새롭지도, 문제 될 것도 없는 교통수단이지만 아무도 좋게 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난 억울해하지 않았다. 내가 속한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몰랐던 것도 아니고 내가 택한 거니까 받아들인 것이다.


다시 옷차림, 노브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법이 전부인 것처럼 굴지만 사회에서 명문화된 법은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조직과 사회에서는 암묵적으로 갖는 관습이 먼저다. 그걸 깨면 그로 인한 불편함은 모두가 감수해야 한다. 나는 노브라를 일상적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이지만 이런 나라도 서울의 은행에 취직해서 회의하는데 옆 신입직원이 유두가 티 나는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면 그렇게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이다. 이정도는 그야말로 상식적인 얘기다. 화성, 금성 운운하지 않아도 남자의 본성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노브라는, 특히 노브라임이 드러나는 옷차림, 특히 유두가 도드라지게 보이는 옷차림은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이지 않다. 그걸 억지로 받아들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걸 젠더 이슈로 만들어서 주장해도 그게 자연스러워질 수는 없다. 그건 그런 사람들이 다수의 시선과 비평과 비난을 감수하고 행하면서 그게 일반적으로 보이거나 최소한 낯설지 않을 때 자연스러운 일상이 될 것이다. 내가 나 스스로 자연스러울 때 남들도 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개인으로서는 유두가 도드라지지 않는다면 사무실에서도 괜찮다고 생각하나 이건 사회적 합의가 아닌 나의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서, 그것도 인구의 50퍼센트가 서울 수도권의 대도시에 사는 나라에서 노브라가 과연 자연스러워질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제대로 된 성교육 좀 할라치면 엄마들이 학교에 항의 전화하는 나라에서는 십수 년이 지나도 요원할 일일이다. 콘돔 착용법을 남녀공학의 중고등학교에서 비디오와 체험용 도구를 들고 가르치면 그 선생님은 뉴스에 나오고, 징계 먹고, 해고될 것이다. 기독교계가, 교회가 들고 일어날 것이다. 안 봐도 삼천리다. 노브라가 자연스러울 수 있는 한국의, 서울의 사회란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란 이들이 사회의 과반수를 차지할 때나 가능한 일일 것인데 그건 아무리 빨라도 내가 죽은 후일 것이다.


내가 사는 이곳에서는 맨발로 다니는 것도 어느 정도 익숙한 일상이다. 그렇지만 맨발로 해변가에 있지 않은 쇼핑몰을 다니는 건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고 맨발로 입장하려 하면 쇼핑몰 입구에서 제지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노브라는 전혀 해당 없다. 이런 것에 명확한 법규는 없다. 그렇지만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젠더, 성평등이 관심사인 사람들에겐 모든 것이 젠더 문제로 귀결되고, 현상을 그걸로 풀어내고 싶겠지만 그게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이런 것이다. (이곳에서 노브라로 다니고 그런 차림을 선호하는 것은 특히나 서구권 중에서도 러시아, 동유럽 여성들인데 그 나라 여성 인권이 높아서 그런 건 아니다. 그 나라들은 여성 인권이 바닥인 나라들이다. 러시아 남성들의 가부장적 인식은 유명하고 상식이다.)


'빡빡이 아저씨'가 레깅스를 입고 유튜브를 찍는데 중요부위의 도드라짐을 감추거나 카메라나 편집이 때로 부자연스럽게 그런 장면을 커버하는 건 그게 성적이거나 혐오스러워서가 아니라 그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운동할 때 여성이 탱크탑에 레깅스를 입는 것에 비해 남성이 성기가 도드라지는 레깅스를 입고 같이 운동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덜 익숙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남녀 차별도, 여성의 몸에 대한 성적 대상화도 아니고.






끝으로, 난 내 아내나 내 딸도 그들이 그래도 될 법한 장소에 노브라로 다녀도 괜찮다. 실제로 큰 딸은 가끔 가족과 나갈 때 노브라로 나간다. 사회적 인간으로서 성숙하고 정상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그럴만한 장소와 아닌 장소는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들은 노브라로 다닐 권리라던가, 탈코르셋 시대라던가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때와 장소를 가려가며 주변에 융화되는 것, 혹은 나를 드러냄에 있어 거기에 수반되는 책임과 무게가 있다면 그걸 감내하고 이겨내는 것이 사회적인 존재로 그들이 가져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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