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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렌 Aug 30. 2020

1일1깡 말고 1인1실.

삶의 질을 좌지우지하는 화장실.

아파트.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50평대 아파트 살던 때가 20년 전이라 요즘 신축 대형 평수 아파트 평면을 모르겠다. 하지만 대형 평수가 줄어들고, 선호도가 높은 아파트 평수가 30평대인 이상 보통의 아파트 거주자들은 화장실/샤워실(이후 편의상 화장실이라 함)이 두 개인 주거공간에 살고 있을 것이다. 


부부인 경우 화장실이 1-2개면 별 문제는 없다. 물론 그렇다 해도 할 말이 있는데 이건 아래에 적겠다. 3인 가족도 그런대로 괜찮다. 문제는 4인 가족부터다.


우리 가족은 4인 가족이다. 우리 부부와 딸과 아들인데 아이들은 사춘기가 막 왔다. 우리 집의 가족이 거주하는 공간엔 단독 화장실 1개, 화장실/샤워실이 3개, 그리고 욕실이 1개가 있다. (집에서 일하는 스태프는 스태프 룸과 화장실이 별도로 있다.)


단독 화장실은 1층 거실에 있다. 변기와 세면대가 각 1개씩 있고, 아파트 환풍기 같이 트나마나한 거 말고 강력한 대형 환풍기가 있다.


부부의 방엔 우선 드레스룸에 세면대가 두 개가 있다. 외출 준비를 할 때든 아침, 밤 수면 전후든 편하게 각자 세면대를 사용한다. 화장실에는 당연히 변기, 세면대, 샤워실이 있다. 샤워실이 매우 크다. 샤워실과 화장실은 같은 공간에 유리 파티션으로 구분되는데 샤워공간만해도 킹 사이즈 침대가 들어가고도 남는다. 일반적인 한국 아파트의 거실쪽 화장실전체 사이즈보다 클 것이다. 전에 내가 다리에 깁스를 했을 때 아내가 샤워를 도와주거나 아이들이 다쳤을 때 우리가 샤워를 시켜줄 때가 있었는데 좁은 샤워실이 너무 불편했다. 그리고 훗날 우리 부부가 노인이 되면 또 거동이 불편할 때가 생길지도 몰라 벽에 안전바, 안전 레일을 달 수 있게 크게 만들었다. 벽식 구조가 아니라 심지어 상시 휠체어가 다니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현대 유럽식으로 화장실과 샤워실을 완전히 구분할까도 생각했는데 볼일을 보고 바로 샤워를 하는 습관이 든 우리에게는 공간을 나누면 더 불편할 것 같아서 같이 두었는데 자연환기가 잘 되도록 두 방면에 환기구를 상시 열어두어 5분이면 습기든 냄새든 모두 사라진다. 안방에서 거실 화장실이 가까워 우리 부부는 서로 사용한 화장실을 바로 사용하지 않고 다른 곳을 이용한다.


아이들은 각자의 방에 화장실 겸 샤워실이 있다. 내가 설계를 약간 과하게 한 부분도 있고 각자 원하면 언제든 욕조를 놔줄 생각으로 만들어서 애들 샤워실도 우리 부부 샤워실 사이즈와 마찬가지로 크다. 모든 화장실에는 자연광이 충분히 들어오고 환기구가 두 벽면에 크게 설치되어 있어 역시 자연환기가 된다. 이웃집들이 있어 프라이버시 문제로 창문을 놓진 않았지만 큰 유리블록을 벽면에 크게 쌓아두어 자연채광이 좋다.


욕실에는 2인용 욕조, 큰 게 있다. 아내와 딸애가 많이 쓸 거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내가 제일 많이 사용한다. 스피커로 음악 틀어놓고 뭘 마시거나 하며 쉰다. 애들 눈치가 보여 아내와 목욕하는 건 자제하고 있지만 애들이 집을 비우기만 하면 당연히 1순위가 된다. 욕실엔 창을 두어 열고 즐길 수 있다. 프라이버시 문제가 없다. 자연채광이 한껏 들어 밝고 넓다.


아파트에 살던 결혼 전, 독립 전에 형과 20년 남짓 화장실을 같이 썼다. 단 둘이고, 형제였지만 난 불편했다. 형은 샤워 후 머리카락이나 털을 전혀 치우지 않았다. 샤워 후 팬을 좀 틀어둔다거나 문을 잠시 열어두는 매너도 없었다. 변기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좁은 화장실에서 목욕은 고사하고 뜨거운 물로 샤워라도 좀 편하게 하면 습기에 사방 벽엔 물이 맺혔고 변기 의자에도 습기가 가득해 닦고 앉아야 했다. 형과 같은 화장실을 쓰는 건 정말이지 군대 화장실보다 불편했다.


남매인 아이들은 이제 슬슬 예민해지고 있지만 화장실도 샤워실도 각자 쓰니 편하다. 더럽게 쓰고 남 핑계를 대는 것도 불가능하다. 수건 정리든 화장실 용품 정리든 모두 자기 물건을 자기가 정리한다. 생리를 시작한 딸애는 면생리대를 손세탁하곤 하는데 그때 남동생이나 내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화장실이 습하지 않고 해가 드니 건조도 내부에서 가능하다.


우리 부부는 방귀도 안 트고 사는 부부이니 당연히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럽다. 아내는 환풍기가 강력하고 아늑한 크기의 거실 화장실을 주로 쓰고 나는 안방 화장실을 주로 쓴다. 변기가 더럽다거나 좌대를 올렸네 말았네, 냄새가 나네 마네 가지고 뭐라 할 여지가 없다. 바쁘게 준비할 때도 여유가 있다. 아내가 손빨래를 할 게 있을 때 세면대 하나쯤 점령해도 된다.


10~20억 원이 넘는 고가 아파트여도 화장실과 샤워실이 두 개 밖에 없는 표준형 주거공간과는 삶의 질이 다르다.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는데 씻고 싸는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나 밖에 없어도 화장실 문을 닫는 이유는 심리적인 데 있고, 아파트는 그걸 해결해주지 못한다. 부부라도 가리면 좋은 게 있고 안 터도 되는 게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가급적 일어나지 않게 하는 주거공간은 부부가 좀 더 남녀 사이로 남기 좋게 해 준다. 아프거나 다쳤을 때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없을 때 가족의 손길을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고, 미리 공간 계획만 잘 짜두면 수십 년 살고 나서 노년에 몸을 가누기 힘들 때 휠체어 출입이 되거나 샤워실에 안전 레일 정도는 손쉽게 다는 게 가능한 것이 주택의 장점이다.


포인트 벽이니 조명이니 아무리 제한된 표준 공간에 돈을 들여 내 취향에 맞춰 꾸며봤자 공간이 한정되고 벽을 허물거나 움직일 수 없는 이상 한계가 명확하다.


주택이 좋은 점은, 내가 계획한 기간을 두고 내 가족의 스타일에 따라, 미래의 불확실한 점도 미리 고려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남이 짜둔 표준, 아니 틀에 박힌 공간에 나와 내 가족의 생활습관을 맞추지 않아도 된다. 거실을 바라보는 부엌이든, 넓은 테라스나 발코니의 온실이든, 부부와 아이들의 프라이버시든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


이런 게 가능한 게 제대로 된 주거공간이고, 그런 주거공간이 인간의 삶의 질을 올려주고 유지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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