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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렌 Mar 15. 2020

실패와 좌절에 대하여

사람의 성장은 실패의 경험과 그 극복에 달렸다.

일전에 알쓸신잡2를 보다가 뇌과학자 양반이 '사람이 성장하는 것은 성공했을 때보다는 실패를 극복했을 때'라는 의미의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저 말이 맞다. 물론 연이은 성공의 경험은 자신감에 충만하게 해 줄 뿐 아니라 능동적으로 뭔가를 하게 하는 힘이 된다. 하지만 성공의 질적 측면에서 보자면 결국 실패, 좌절, 혹은 위기를 극복하고 해내는 성공일 때 더욱 극적인 성과를 보게 된다. (때로 스포츠 스타들이 지도자가 되었을 때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난 그게 역할의 차이도 있지만 그들이 실패와 좌절 후에 성장한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에 비해 부족한 평범한 선수들의 그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가끔, 요즘 너무 염치없는 세상이다 라고 느낄 때가 있다. 염치란 체면,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라고 하는데 잘못을 해도 뻔뻔하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변명으로 일관하는 모습에서 염치가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 거의 모두가 그렇다. 대기업 오너 치고 전과 없는 사람 찾기 어렵고, 국회의원 치고 털어서 교도소 가지 않을 사람 거의 없으며, 교수들 치고 요즘 사회 문제가 되는 갑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 또한 거의 없다. 뭐 그렇다고 사회 지도층만 그런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주 극히 일부의 존경스러운 사람들을 제외하면 각자 자기 위치에서 스스로의 기준에 의거하여 괜찮다고 생각하는 수준에서 부정부패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동일한 도덕적 법적 잣대를 가진 사람인데 나보다 더 권력이 많은 사람은 나보다 더 큰 부정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사고의 연장선에서 나는 있는 놈들이 더 하다는 말은 그들이 특별히 더 나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소위 없는 사람들보다 할 수 있는 게 더 많다고 이해하곤 한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우리 모두가 잘못과 실수를 하고 살고 있는데 사람됨의 차이는 결국 인정하고 사과하느냐, 혹은 그러지 않느냐, 그리고 부끄러워하며 반복하지 않으려 하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해서 내게 중요한 것은 나든 타인이든 과오를 사과하고 뉘우치느냐 아니냐이다. 그리고 그건 본인만 안다. 타인이 아는 방법은 그 후에 반복되느냐 아니냐 일 것인데 반복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런 특정 상황이 발생하지 않아 벌어지지 않는 것과 발생했는데 안 한 것은 구분이 어려우니 쉬운 일은 아니다. 타인의 관점에서는 사람은 주로 믿고 싶은 것을 믿기 때문에, 진실이 항상 드러나거나 인정되진 않는 것 같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실수, 잘못, 인정과 사과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아이들은 커가며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익히고, 실수를 하며, 잘못을 하고 부모에게 그리고 어른에게 혼이 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변명을 하고, 부인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인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나의 치부를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양육, 교육이란 이렇게 때로 어른에게 더 가혹하다.

"아빠가 6학년 때 숙제를 안 했는데 혼나기 싫어서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해서 '숙제를 했는데 집에 놓고 왔다.'고 거짓말을 했거든. 그랬더니 예전 같으면 넘어갔을 선생님이 갑자기 끝나고 집에 가서 가져오라는 거야. 그래서 학교가 끝나자마자 헐레벌떡 뛰어가서 열심히 숙제를 하고 다시 학교에 갔다? 그런데 선생님이 그 사이에 집에 전화해서 할머니랑 통화해서는 다 확인한 거야. 아빠한테 왜 거짓말했냐고 물어보는데 고개도 못 들겠더라."

내가 숙제를 안 가져왔다고 했을 때 내 흔들렸을 눈빛을 보고 선생님은 알아챘을 것이다. 어린아이의 거짓말이란 어른의 예리한 눈을 속일 수는 없으니까.


학교에서나 뉴스에서 '괴롭힘' 혹은 '따돌림'에 대한 주제가 나왔을 때 또 이야기한다.

"아빠는 네 나이 때 친구들이랑 다 함께 어떤 친구를 괴롭힌 적이 있는데 그때 그 친구가 살던 1층 그 애 방의 열린 창문에 흙이랑 모래를 집어던진 적이 있어. 엄청 못 되게 굴었지. 나중에 그 친구 엄마가 집에 찾아왔었는데 벨이 울리고 할머니가 나가고 문 틈으로 그 친구 엄마를 봤을 때 아빤 바로 방에 도망치듯 들어갔어. 밖으로 못 나오겠더라. 그다음부터는 안 그랬어."


부끄러운 이야기는 안타깝게도 끝이 없다. ㅠㅜ


"아빠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리면서 동네 음반가게를 돌면서 가게 CD를 훔치고 다닌 적이 있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때 아빠 반 반장부터 거의 10명 넘는 애들이 다 그러고 다녔다. 그러다가 한 가게에서 같이 들어간 친구가 CD를 훔치다 걸렸고 아빠도 같이 걸려서 가게에서 밤 9시까지 무릎 꿇고 손 들고 있다가 할머니가 가게 주인아저씨 전화받고 데리러 온 적이 있어. 기억에 할머니는 별로 혼내지도 않았는데, 아무튼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랬다.

다행히 아직 저 때 두어 번이지만 삥 뜯고 다녔던 얘긴 안 했다. 순전히 아직 얘기할만한 계기가 일어나지 않아서......;;; (아이들에게 배운다는 것은 이런 것도 포함해서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런 옛날 일을 말할 때면 난 참 가지가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한편으로 참 자신이 참 한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일은 그저 나이 든다고 경험할 일은 아니다. 부모니까 겪는 것이다.)

항상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아빠보다 낫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래서 난 우리 애들이 어지간한 일을 해선 놀라지 않을 것이고 실제로도 난 별로 놀라지는 않는다.

고 1 때 음반 가게 사장님이 경찰에 전화하지 않고 집에 전화해서 부모님을 오게 한 것이 내겐 행운이었다. 어쩌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저런 다양했던 많은 상황 속에서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거나 더 큰 잘못을 하지 않고 그만둔 것이고.(이럼에도 불구하고 난 소위 '문제아' 범주의 소년은 아니었다.)

살면서 부끄러운 짓을 하는 것은 끝이 없다. 실수는 끊이지 않고 잘못도 계속 반복된다. 나 같은 범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또 반성하는 것뿐이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부터 재계, 정계, 학계를 막론하고 모든 분야에서 힘 있는 자들이 일으키는 사건 사고에서 내가 느끼는 분노는 어쩌면 그저 사과하지 않는 뻔뻔함 그것뿐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 자리에 있은들 얼마나 깨끗하고 얼마나 도덕적이겠나 생각해보면 말이다. 요즘 세상은 결국 불법이냐 합법이냐가 중요하지 정도의 차이로 용인되는 사회는 아닌 것 같다. 법의 영역은 법에서 다룰 일이고 개인의 이해 영역에서는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해도 난 결국 염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편,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일은 '연애'인데, 10대, 20대가 온통 그 빛과 그림자로 가득하다. 감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연애'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야말로 절절하다.

자초지종을 쓸 수는 없지만 그놈의 연애 때문에 탈영도 해봤다. 잠시 근무지 이탈 아닐까 하고 변명할 생각도 해보지만 냉정히 탈영이라고 보는 게 맞다. 물론 아무에게도 걸리지 않았고 결론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 실상 병사들 선에서는 다 보고하고 했던 일이긴 하다.(여기서 읽는 분들에게 조심해주십사 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군대는 현역이라 해도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의외로 매우 다양한 형태가 있으며, 복무의 형태는 물론 군영의 형태도 일반적이지 않은 특수한 곳들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내가 복무했던 곳은 특히나 그런 곳 중 하나로 당시 우리 부대에 탈영의 경험이 있던 병사들만 해도 30%를 족히 넘을 것이라 - 그 덕에 고참들 허락받고 탈영했던 것... - 평범한 부대를 떠올려서 이제와 굳이 여기서 비난하는 것은 자제해주셨으면 한다. 게다가 이미 20년 전이다.) 나를 비롯해 아무도 피해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얼마나 똘아이 짓을 했는지는 나 스스로 제대로 알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실패의 경험이다. 이런 경험들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강렬해서 국민학교 6학년 때 거짓말 사건부터 모두 내 머릿속에 초고화질 영상으로 저장되어 있고 꺼내 볼 때마다 미쳐버릴 것 같은 부끄러움에 사로잡힌다. 아마 죽을 때도 꺼내 볼 수 있을 만큼 생생할 것이다.

매우 부끄럽지만 저런 경험들에 의해 성장한 결과가 지금의 나이고, 지금의 나 또한 계속 과정 속에 있고 또 운이 좋다면 계속 성장해나갈 것이다.

헤어지는 게 힘들다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거부하면 새로운 사랑은 시작되지 않는다. 실패가 무서워서 주저하면 성공의 열매를 맛볼 수도 없다. 학교에서든 직장에서든, 그리고 인간관계에서도 언제나 실패한다. 실패를 피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


사업도 마찬가지다. 사업은 반드시 실패한다. 성공을 하더라도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다. 운 좋으면 재기가 가능한 실패를 하는 것이고 운이 나쁘면 재기를 못하고 끝이 나는 것이다. 10년 성공해도 실패는 순간이다. 사업을 한 번 할 게 아니라면, 시한부로 할 게 아니라면 반드시 실패를 경험하게 되어 있다. 실패를 경험하고 재기를 해본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아니 두렵지만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중학교 때 키우던 강아지가 물구나무서기 연습하던 내 뒤쪽에 와서 뒷목을 핥았다. 간지러워하던 내가 뒤로 넘어졌고 강아지가 목에 살짝 깔렸다. 그런데 강아지 갈비뼈가 부러지고 그게 폐를 뚫어 죽고 말았다. 생후 8개월쯤으로 데려온 지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일이다. 매일 데리고 자던 녀석인데, 당시 내 자책감이나 슬픔은 말로 할 수가 없다. 오늘도 문득 그 생각을 했다가 소름이 끼쳤다. 그래도 나는 또 강아지를 데려와 조심에 또 조심해서 잘 키웠고, 지금도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 고양이도 언젠가 죽을 것이다. 운 좋게 명이 다해서 죽을 수도 있고 아이들이나 누군가의 잘못, 혹은 사고로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좌절과 슬픔에 멈추면, 행복도 없다. 설혹 만의 하나 아이들의 실수나 잘못에 죽는다고 해도 우리 아이들은 나보다 더 잘 이겨낼 것이다.

저 위에 말한 나의 잘못들에 대해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도덕적인 비난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군가 내 옆에서 딱 붙어서 기댈 수 있게 해주기만 한다면 그 비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성장해나갈 수 있는 게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실패와 좌절, 실수와 잘못의 경험의 차이와 정도의 문제가 있을 뿐 모두가 그러한 경험을 하고 살아간다. 내 아이들도 언젠가 할 큰 실수나 잘못의 늪에 빠지기 전에 인정할 것 인정하고 부끄럽게 여기고 한 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물론, 지금 우리 아이들은 나에 비하면 정말이지 순한 양이고 너무나 얌전하기 그지없지만.)

종종 능동적이지 못한 사람을 볼 때가 있는데 이 경우는 성공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스스로 성공해본 사람들이 아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행위의 본질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공의 경험은 실패의 수에 비례하고, 확률의 문제 또한 있으니 경험의 수는 실패의 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실패를 경험했는데 좌절하지 않고 일어나면 성장한다. 대단한 성공 따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면서 부끄러웠던 경험을 다시 반복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히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하다 보면 성공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성공은 신화가 아니다.

성장은 실패 후에 일어나니, 두려워도 계속 경험해야 성장한다.

다행히 우리에겐 마법의 주문이 있다.



Hoc quoque transibit! (이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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