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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와 가치

The Complexities of Tennis

by 필렌

최근에 소셜미디어에서 테니스 단식과 복식 선수들 간에 설전이 오갔다. 혼합 복식을 비롯한 복식이 인기가 없기 때문에 많은 변화를 꾀하려는 한 대회의 룰과 시합의 방식, 더 나아가 참가자격에 대한 변경 공지 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이게 이슈가 되도록 불을 지른 것은 오펠카가 소위 복식 스페셜리스트 선수들에게 '단식에서 실패한 자들'이라고 한 점이다. 참으로 잔인하고 오만하며 뼈 때리는 말인데, 사실 이건 동의하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다. 실제로 테니스고 배드민턴이고 탁구고 기본은 단식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상금이나 선수 명성 모든 면에서 단식이 복식을 압도한다. 사실상 라켓 스포츠에서의 꽃은 단식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니까 테니스 본연의 매력, 한 스포츠로서의 본질적인 가치와 개성은 모두 일단 단식에 기초한다고 봐도 무방하다.(복식 위주인 한국 테니스 동호인 문화에 푹 빠진 분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나는 언젠가는 복식을 치긴 하겠지만 아직은 순수하게 단식을 기준으로 테니스를 바라본다. 복식 경기는 아직 보지도 않는다. 단식만 보기에도 시간은 부족하다.


이런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 테니스와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나는 테니스의 어디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테니스의 어디에서 가치를 찾는지, 테니스의 무엇이 가치를 지니는지 따위의 질문을 한다.


운동이든 학문이든, 어떤 현상이든 모든 것은 깊이가 없으면 흥미라는 휘발성 관심만을 준다. 수 년, 혹은 수십 년, 인생을 두고 즐기고 탐구하려면 깊이가 필요하다. 그 깊이를 찾아낼 수 있으면, 깊이를 느낄 수 있으면 긴 시간에 걸쳐 푹 담궈질 가치가 있다.


다양한 운동을, 유소년 시절부터 때로는 전문적으로 또 특기와 취미로 해본 입장에서 테니스의 가장 큰 가치와 매력은 그 복잡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기술적으로 모두 매우 복잡하다.


어느 라켓 스포츠보다 넓은 코트에서 다양한 기술을 구사하며 공격과 수비를 하는데 하나 하나의 기술을 잘 익히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기술들의 종류도 상당히 많고 매번 다른 속도와 방향, 깊이에서 다른 의도로 구사해야 한다. 그런데도 테니스는 기술이 아닌 발로 하는 운동이라고 표현할만큼 엄청나게 뛰어야 하고 그 스텝 또한 매우 스마트하게 효율적이고 에너지를 발산하게끔 밟아야 한다. 라켓이나 도구로 공이나 그에 준하는 것들을 때려야 하는 운동들이 많은데 사실 따져보면 그 타격하는 방식의 다양성과 복잡성에서 압도적이며, 게다가 가장 넓은 코트를 앞뒤좌우로 뛰는 것도 모자라 점프하고 주저 앉아가며, 때로는 슬라이딩해가며 때려야 한다.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오는, 정해진 거리와 지점에서 던져서 날아오는 공을 때려서 수비수를 피해 안타나 홈런을 만들어야 하는 야구의 타격보다도 메커니즘적으로 월등히 복잡하다. 명예의 전당급 에이스 투수라면 3-4가지 정도의 플러스 구종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지만 결국 같은 자리에서 같은 곳을 향해 던진다. 물론 타자의 타격을 이겨내야 하지만 테니스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반면 이렇게 어려운 걸 하는데 그로 인해 세계 100위, 어떤 리그의 상위 100명도 아닌 전세계 100위 선수들이라고 해도 별로 상금 수익이 높지 않아서 대부분의 운동능력이 뛰어난, 특히 남자들은 다른 운동을 더 많이 택하게 된다. 자연스럽다. 기대수익이 너무 낮으니까. 반면에 여자선수로 봤을 때는 타 운동종목에 비해 세계 탑급이 되면 그 어떤 종목보다 많이 벌기 때문에 남자와는 사정이 좀 다르다.)


야구가 장기 같다면, 테니스는 바둑 같은 복잡함과 깊이가 있다고 할까. 이 복잡함은 도전욕구를 불러온다. 단순히 신체 능력, 운동 능력과 운동 신경만으로 1-2년에 어느 수준에 오르기가 어렵다. 기본적으로 익혀야 하는 기술도 많은데 농구와 달리 코트 표면도 다양하며 호흡이 긴 승부에서 바둑이 그렇듯 테니스도 멘탈이 굉장히 높은 중요성을 갖는다. 경기 중 작전 타임도 없고, 인게임 코칭도 불가해서(이제 일부 도입하려고 하지만) 탁구, 배드민턴과 달리 온전히 혼자 모든 걸 해결하고 이겨내야 하는 운동이다. 그러니까, 인생으로 치면 때로 친구가 있고 배우자도 있고 가족도 있지만 결국 태어날 때와 죽을 때 모두 혼자라는 걸 생각하면, 그 외로움이나 고독함이나 인생의 책임은 모두 오롯이 혼자 짊어져야 한다는 공통점을 진부하지만 느낄 수 있다.


복잡하고 어려우니까 승부욕도 생기고 도전정신이 잔뜩 긁혀서 재미있다.


무게 이동을 신경쓰면서 스트로크를 치려고 하면, 어느새 스텝이 게으른 나를 발견한다. 스텝을 열심히 밟는데, 순간 스탠스가 좁다. 스탠스를 넓게 가져가면서 스텝을 열심히 밟았더니 호흡을 잃었다. 스트로크가 되니까 발리가 안 된다. 서브를, 위너를 기가 막히게 때렸다 싶어서 순간 방심한 사이 상대방이 기어코 받아낸 공이 내 코트 저 멀리에 들어온다. 아주 짧은 한 포인트에 달린 기껏 두어 번에서 대여섯 번에 걸친 1분에도 못 미치는 공방에조차 100% 집중해서 배우고 익힌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는 게 너무나도 어렵다. 장비도 그러하다. 어떤 라켓과 스트링의 조합이 내게 가장 잘 맞는지 찾아내기란 쉽지가 않다. 스트링의 존재로 인해 야구 배트와는 차원이 다르다.


복잡하고 어려워서 깊이가 있고 재미있다.


모든 운동에 희로애락이 있고 그 안에서 인생을 찾을 수 있지만 테니스에서 느낄 수 있는 희로애락의 정도와 폭, 깊이는 다른 스포츠에 비할 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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