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떠나야 한다. 늘 그랬듯이.
어린 나그네가 꿈을 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유난히 여행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어디론가 떠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 봐야 고향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뵈러 가는 것일 뿐이었지만, 고향까지 내려가는 그 길이 몹시도 좋았다. 반나절이 꼬박 걸리는 긴 시간이었지만, 느릿느릿 역 하나하나를 거쳐 흘러내려가는 무궁화호 완행열차를 타면서도, 매끈한 새마을호의 식당칸에서 멋모르고 엄마가 주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정읍에서 장성을 오고 가는 통일호 통근열차를 타면서도 마냥 즐거웠다. 오고 가는 기차의 생김새와는 무관하게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낯선 풍경들이 나에게는 새로운 세상의 시작일 뿐이었다. 어느덧 열차에 올라탄 대부분의 승객들이 지쳐 잠이 들 때쯤이면, 나는 창 밖 너머의 끊임없이 나열되는 이미지들을 머릿속에 아로새겨 넣었다.
어린 나그네의 꿈은 현실이 되어갔다.
어느덧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되었을 때도 여행은 여전히 나에게 재밌는 장난감과 같았다. 어디를 갈지, 가서 무엇을 하고 올 것인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막연히 어디를 가고 싶다 생각하다 보면, 그곳에서의 여행 계획을 막연히 세우기 위해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다른 사람들이 남겨놓고 온 여행사진들과 기록들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가고 싶다는 열망이 커져만 갔고, 그래서인지 먹고살기 위해 이 곳 저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받은 돈들을 한 푼, 두 푼 모아서 여행경비를 만들곤 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내일로 여행을 가기도 했고, 가까운 일본을 가기도 했다. 조금 생활이 빠듯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 닿는 대로 여행을 떠난 것에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악착같이 벌어서 여행을 갔다 왔다는 것에 나름 뿌듯하기도 했고, 그렇기에 더더욱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고 자기 위안하기도 했다.
현실에 부딪힌 나그네의 꿈일지라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여행지에서 정말이지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삿포로에서 삿포로 맥주를 먹으며 홀로 공원을 산책하기도 하고, 후쿠오카의 이름 모를 온천에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내일로 여행을 떠나서는 오로지 기차로만 전국을 일주하면서, 우리나라 철도의 최북단, 최남단, 최동단을 횡단하며 이 곳 저곳을 신명 나게 유랑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 무렵 집안이 힘들어지게 되었고, 부모님의 지원을 더 이상 받을 수 없었던 나는 반강제적으로 경제적 독립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원치 않게 턱 밑으로 쫓아온 생활비의 압박과 그동안 애써 외면했던 쌓인 학자금 대출금을 상환하기 위해 작은 회사를 들어갔다. 회사에서 잦은 야근과 주말 특근으로 온몸이 파김치가 되는 일이 허다해질 때면, 집에서 드러누워 잠만 자는 일이 늘어났다. 그럴 때면, 이렇게 내 시간과 젊음이 회사에 귀속되어가는 듯한 왠지 모를 불안한 감정이 새어 나왔다.
피곤에 찌들어버린 손가락을 간신히 들어, 예전에 갔던 여행지들의 사진을 주욱 훑어볼 때쯤이면, 그저 막연히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솟구쳐 올랐다. 반년 전에 갔던 삿포로, 1년 전에 떠났던 내일로 여행, 2년 전에 갔던 후쿠오카. 있는 돈, 없는 돈들을 쥐어짜고, 한 달 내내 물류창고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모았던 돈을 들고 무작정 떠났던 여행지의 사진들이 카메라 앨범에서 하나둘씩 떠올랐지만, 이젠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떠나자. 다시 한번.
모아놓은 돈이라곤, 통장에 한 달씩 쥐꼬리만 한 월급에서 조그맣게 떼어 적금을 들어놓은 얄팍한 통장뿐이요, 생활비를 마련하고 한 달에 한 번 월세를 내는 것과 쌓인 학자금 대출금을 적은 돈이나마 갚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내가,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뿐이었다. 금전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연차조차도 회사 사람들의 눈칫밥 때문에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에 장기간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칠 대로 지쳐버린 몸과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것은 여행뿐이었다. 비록 긴 기간은 아닐지언정,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잊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나그네의 꿈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월말에 금요일 야근도, 토요일 특근도 없는 주말이면,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행선지만 정해놓고서는 퇴근하자마자 기차를 타고 무작정 떠났다. 꼭 유명한 관광지에 가서 거창한 것을 구경하고 오겠다던지, 재밌는 액티비티를 즐기겠다는 당찬 포부 따윈 없었다. 다만 스스로가 재충전할 시간이 필요했고, 낯선 곳에서 새로운 것들을 경험한다는 것에 의의를 둘 뿐이었다. 막연히 바다가 보고 싶어 강릉 가는 무궁화호를 타기도 하고, 돼지국밥 한 그릇이 먹고 싶어 부산 가는 무궁화호를 타기도 했다. 꼭 구체적이고 완벽한 계획이 있어야만 훌륭한 여행이 되는 것은 아니더라. 본능과 이미지에 충실해도, 쌓아온 삶의 노하우들은 여행을 서툴지만, 보다 가치 있고, 아름답게 색칠하기에 충분하다. 그렇기에 우린 오늘도 어디론가 떠나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