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찬란한 도피 4일 차
총 28박 29일로 계획하고 있는 내 대만여행을 초반, 중반, 후반으로 나누자면
초반 : 타이중, 타이난, 가오슝(서부)
중반 : 컨딩, 타이동, 뤼다오, 화롄(남부&동부)
후반: 타이베이(북부)
로 구분할 수 있다.
나는 체력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라서 여행을 계획할 때 미리 강행군을 해야 하는 날과 쉬는 날을 적절하게 배분했다.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은 여행을 2~3일 정도하고 나면 힘든 일정을 하나 넣는 식이었다.
그리고 내 여행 초반에서 가장 힘든 일정이 바로 오늘, 아리산 투어이다.
내가 아리산 트레킹을 간다고 했을 때, 주변 지인들은 네가 전문 산악인도 아니고, 무슨 등산이냐! 했지만, 사실 아리산은 이미 관광지화가 되어 있어서 트래킹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다고 한다. 유일한 문제라면 그저 대만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어서 어느 지역에서 출발하든 편도로 기본 2시간 30분 정도를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이에서 아리산까지 자유여행을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돈으로 시간을 산다.'주의인 나는 이번에도 여행 업체를 통해 아리산 투어를 신청했다. (단, 아리산 입장권, 아리산 삼림열차 불포함)
아침 8시,
전날 미리 사놨던 삼각김밥과 파파야우유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숙소 앞으로 나갔다.
숙소 앞으로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도착했고, 아저씨가 차 창문을 내리더니 "아리산?"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yes!"를 외치고는 바로 차량에 탑승했다.
어쩌다 보니 이번 투어 멤버는 나와 대만인 가이드, 홍콩인 모녀로 단출하게 구성되었다.
MBTI가 극 E로 추청 되는 대만인 가이드 아저씨는 만나자마자 나에게 "너 중국어 할 수 있니?"라고 묻고는 바로 폭풍 중국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나의 (강제) 중국어 듣기 평가.
“대만은 언제 왔냐?”부터 시작된 질문은 “대만에는 무슨 일로 왔냐” 등등 사소한 질문부터
“대만의 국민당과 민진당의 대한 개인적 견해”, “대만과 일본의 관계”와 같은 정치적 견해,
“타이완의 소수민족은 16개의 민족이 있다.(그중 하나가 일월담에 있는 구족임)”, “빈랑은 사람들이 직접 엄청 긴 갈고리에 칼을 달아서 딴다.”, ”빈랑을 먹으면 각성효과가 있어서 장거리 운전수들이 많이 먹는다.”와 같은 문화적인 것까지…
끝도 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간혹 민난어가 조금씩 섞여서 잘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아저씨는 10살짜리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이 단어를 하나하나 풀어서 다시 설명해 주셨다. 아저씨와의 대화 덕분에 한국에 돌아가서 꼭 HSK시험을 봐야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왠지 듣기 점수가 잘 나올 것 같다.
1시간 정도 달렸을까?
아저씨가 여기서 잠깐 쉬고 가자며, 천장지구교와 용은사 앞에서 차를 멈췄다.
홍콩인 모녀는 산책을 하고 싶다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나는 가이드 아저씨의 안내에 따라 도교 사원인 용은사를 구경하기로 했다. 가이드 아저씨께서 도교 사원을 관람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셨다.
사원을 입장할 때도 규칙이 있는데, 보통은 사원을 기준으로 좌측으로 들어가서 우측으로 나와야 한다고 하셨다. 또한 문 양쪽에는 2명의 문신이 지키고 있고, 그 옆으로 두 명씩 총 4명의 사천왕이 있는데 각각 동서남북을 상징한다고.. 뭐 그런 설명을 해주시고, 손을 모으고 신에게 3번 절하는 방법도 알려주셨다.
가이드 아저씨의 친절한 설명 덕분에 무신론자인 나도 도교의 신에게 앞으로 펼쳐질 모든 여행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해 보았다.
충분히 휴식을 취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아리산 공루(公路)를 달리기로 했다.
드디어 말로만 들어보던 아리산 공루를 가다니, 기대감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마무시하게 꼬불꼬불한 길이 미친 듯이 이어졌다. 핸들을 조금만 잘못 틀면 그대로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좁고 가파른 급커브길을 올라가는데, 주변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과 푸르른 하늘 덕분인지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신난다!라는 생각만 들었다.
우리의 차는 점점 더 고산으로 올라가고 해발고도 2000m 이상 올라왔을 때, 도로변에 만개한 벚꽃들이 보였다. 불과 며칠 전에 갔던 칭징농장에서는 벚꽃이 거의 지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아직 연분홍빛의 벚꽃이 피어있었다.
“저게 그 유명한 아리산 차밭들이야.”
가이드 아저씨께서 차창 밖에 있는 차밭들을 가리키며 알려주셨다. 아저씨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사방에 초록빛 차밭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드넓은 차밭을 바라보니, 왜 아리산 고산차가 유명한지 알 것 같았다. 거리 곳곳에 찻잎을 덕고, 찻잎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많이 보였다.
11시가 좀 지나자 슬슬 배가 고파졌다.
"배고프지? 이제 곧 펀치후에 도착할 거야. 거기에 가면 맛집이 있으니까 내가 알려줄게."
펀치후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펀치후 옛 거리 입구에 도착했다. 아저씨는 우리를 펀치후에 내려주며 펀치후 도시락 맛집을 알려주셨다. 아저씨께서는 펀치후 옛 거리에 옛 들어가서 가장 먼저 보이는 세븐 일레븐 옆집이 펀치후 도시락 맛집이라고 하셨다.
다른 관광객들이 몰리기 전에 서둘러 아저씨가 알려주신 도시락 가게로 향했다. 메뉴는 돼지고기, 닭고기, 돼지와 닭고기 두 개 다 들어있는 것. 단 세 가지였다. 나는 돼지고기 도시락으로 주문했다. 음식은 이미 다 세팅이 되어있는지 주문을 하자마자 바로 도시락을 받을 수 있었다.
가게 한편을 장식하고 있는 오래된 사진 속에서 이곳의 역사와 전통을 엿볼 수 있었다.
도시락 내용물은 생각보다 매우 심플했다.
밥과 넓적한 돼지고기, 계란장조림 반쪽, 죽순무침 조금, 진미채(로 추정되는 것)가 있었다. 그리고 국은 셀프로 떠서 마시면 되는데, 국이라기보다는 다시마 우린 물에 가까운 맛이었다.
돼지고기 한 점을 떼어먹어보았다. 맛이 굉장히 진했다. 대만에 도착한 이후, 며칠 동안 계속 밍밍한 맛의 음식들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펀치후 도시락은 간이 세게 느껴졌다. 하지만 밥과 함께 먹으니 적당한 짠맛이 입맛을 돋워주었다. 예전에 아리산에서 벌목을 하던 나무꾼들도 이런 도시락들을 먹었을까? 이 도시락을 먹고 힘내서 힘든 벌목 일을 했겠지? 하고 생각하니, 이 도시락통도 안에 들어있는 음식들도 모두 특별하게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고, 남은 시간까지 펀치 후 옛 거리를 산책하기로 했다.
예전에 여행을 오기 전 여행 가이드책 겉표지가 타이베이 근교 지우펀의 야경 모습이었다. 당시, 책 겉표지를 봤을 때, 지우펀 거리에 매달려 있는 홍등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는데, 펀치 후 옛 거리 역시 거리 곳곳에 홍등이 매달려있고, 좁고 가파른 길 옆으로 작은 노점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이 마치 그 지우펀을 연상하게 했다.
후식으로 간단하게 아리산 홍차를 주문해서 마셨다.
조금 전 아리산 차밭을 지나와서 인지 아리산 홍차 맛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나는 원래 커피를 더 좋아하는 편이고, 홍차는 잘 마시지 않았는데... 대만에 와서 점점 입맛이 변해가고 있다.
여행을 가면, 그곳의 문화, 그곳의 사람들 속으로 녹아들고 싶다.
그곳 사람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 그들의 사고방식, 그들의 문화배경을 모두 알고 싶고, 나 역시 마치 그들의 일부가 된 것처럼 여행하고 싶다. 그런 점에서 내가 커피보다 홍차를 마시며 조금씩 입맛이 변해가는 것은 내가 바라던 여행의 모습이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는 좋은 징조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