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시원하고 달콤한 아리산 홍차 한잔을 마시며, 펀치후옛거리를 거닐었다.
옛 정취가 물씬 나는 펀치후역은 지금도 사용되는 곳이라고 했다. 과거에는 이곳을 이용해서 아리산의 산림자원을 이동시켰겠지. 벌목과 토목공사로 황금기를 맞이했었을 먼 옛날의 펀치후 풍경을 상상해 보았다. 아낙내들은 이곳에서 벌목꾼 남편에게 도시락을 써서 들려 보내고, 생업을 이어갔겠지. 그러면 남편들은 아리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고, 옮겼을 것이다.
도시락을 먹고 있는 사람들 발 밑에 커다란 백구 한 마리가 엎드려 있었다. 지나가야 하는 길인데, 커다란 개가 무서워서 멈춰서 있으니, 상인 아주머니께서 "저 녀석은 안 물고, 착한 개야. 그냥 지나가도 괜찮아."라고 말씀해 주셨다. 아주머니의 말에 용기를 갖고, 백구 옆을 슬그머니 지나갔다. 백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를 슥-보고는 '예의상' 꼬리 몇 번을 흔들어주었다.
깊은 산속 마을, 펀치후.
옛날에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야생동물도 종종 내려왔다고 한다. 이렇게 큰 개가 동네 여기저기에 있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야생동물에게서 재산과 가족을 보고 하기 위해서였다.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도시에서는 보지 못하는 이색적인 풍경. 벌목꾼 남편과 도시락 파는 아내, 그리고 가족을 지키는 개의 이야기가 낭만적이고, 멋지게 보였지만... 그 속에서 실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판타지도 로맨스도 아닌, 현실이었겠지.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니, 이곳에서 척박하게 살아가는 펀치후 사람들의 삶이 강인한 생명력으로 가득해 보였다.
든든히 배도 채웠겠다.
우리는 다시 아리산공루를 달려 아리산 국가 삼림공원으로 향했다.
본격적으로 아리산 국가 산림공원 입구에 도착하자, 가이드 아저씨는 나에게 통행료(입장권)를 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내가 선택한 이 상품은 아리산 입장권은 불포함이라 나는 아저씨께 따로 300twd를 지불했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가이드 아저씨께서는 우리들에게 아리산을 편하고, 알차게 볼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 주셨다.
1. 관광서비스센터(遊客中心站)에서 셔틀을 탑승해서 沼平站까지 간다.
2. 阿里山閣大飯店을 지나, 본격 아리산 트래킹 시작! 자매호수, 목란공원, 수진궁까지 간다.
3. 삼대목, 향림신목까지 보고 오기
4. 오솔길을 따라 션무기차역(神木火车站)까지 걷는다.
5. 션무기차역에서 아리산 산림열차를 타고 아리산기차역(관광서비스센터 앞)으로 돌아온다.
가이드 아저씨께서 이 코스로 트레킹을 하면 대부분 아리산의 유명한 것은 다 볼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하지만 아저씨께서는 외국인인 내가 혼자 다니는 것이 계속 신경이 쓰이셨나 보다.
"너 혼자 다닐 수 있겠어? 내가 따라갈까?"
아저씨께서는 내가 자신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셨고, 산속은 추운데 패딩을 가져왔는지, 물은 충분히 챙겼는지까지 꼼꼼하게 확인하셨다. 내 나이 36살, 이제 충분히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그래도 이러한 친절과 관심이 좋았다.
"옷도 두꺼운 것 입었고, 물도 충분해요. 문제 생기면 바로 라인 할게요! 걱정 마세요."
계속 걱정하시는 아저씨를 안심시켜 드리고, 홍콩인 모녀와 함께 셔틀버스에 탑승했다.
5분쯤 달려서 도착한 자오핑역沼平站.
이곳에서부터는 본격 트레킹의 시작이다.
아리산 산림공원의 트레킹 코스는 걱정했던 것만큼 힘들지 않았다.
여행객들이 걷기 좋게 나무데크가 잘 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힘든 것도 무도 잊을 수 있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숲 속을 걸어요~산새들이 속삭이는 길"('숲 속을 걸어요'중에서)
예전부터 산을 오를 때면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는 했는데, 아리산 산길을 걸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짧고 간결한 노랫말과 쾌활한 리듬이 괜스레 나를 더 들뜨게 만들어주었다.
예전에 대만 여행 가이드책에서 보았던 자매호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여동생 호수는 생각보다 작은 규모였지만, 언니 호수는 탁 트인 곳에 아름답게 펼쳐져있었다. 여행객들이 삼삼오오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모습이 정다워 보였다. 나도 쭈뼛쭈뼛 다가가서 사진 한 장을 부탁드렸다.
"사진 좀 찍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당연하죠! 이쪽에서 찍어야 잘 나와요."
대만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친절하다. 무엇 하나를 요청하면 너 나 할 것 없이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는 모습에 여행 내내 감동을 받았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고작 내 사진 한 장을 찍는데 중년의 대만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세명이나 붙었다. 그중 가장 대장으로 보이는 아저씨 한분(커다란 전문가용 카메라를 가지고 계셨다.)께서 아주 능숙한 솜씨로 내 핸드폰 카메라 설정을 조정하시더니, 멋지게 사진 한 장을 찍어주셨다. 하지만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는지, 나를 데리고 다른 쪽으로 데리고 가셔서 다시 또 한 장을 찍어주셨다.
"아, 조금 역광이 있네요. 아쉬워요."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인생으로 치면 그저 한순간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이름 모를 외국인에게 이렇게 까지 친절해질 수 있을까? 나는 그동안 어땠을까? 나도 누군가에게 이토록 기억에 남을 만큼 친절을 베푼 적이 있는가. 그들은 보며 잠시 나 자신을 반성해 보았다. 앞으로 나도 사람들에게 친절해질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해야겠다.
아리산을 둘러보다 보니 참 재미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여동생이 있으면, 언니가 있고, 형제가 있으면 자매가 있었다.
이름 하나를 짓는대도 대칭의 미학이 보이는 듯해서, 남몰래 속으로 키득거렸다.
이름 하나에도 그들만의 센스가 엿보였다.
산속 날씨는 변덕스럽다고 해서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예상외로 날씨가 참 좋았다.
혹시라도 추울까 봐 도톰한 후드 티셔츠를 입고 갔는데, 종종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지 않았다면 더워서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바람에 커다란 나무들이 흔들리며 신비로운 소리를 냈다.
한 길로 쭉 뻗어있는 나무데크길을 걸어갔다.
어릴 적에 '피톤치드'라는 단어를 잘 못 외워서, '치톤피드'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문뜩 그 옛 기억이 떠올랐다. 산속의 맑은 공기를 폐 속 가득 담아보았다. 서늘하지만 기분 좋은 이 공기 속에 왠지 피톤치드가 가득 포함되어 있을 것 같았다. 괜히 건강이 좋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절대 '피톤치드'와 '치톤피드'를 헷갈리지 않을 것 같다.
한 길로 쭉 뻗은 나무데크를 걸으며, 다른 사람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었다. 그중 일부는 계속 반복해서 만나게 되었다. 몇 번이나 얼굴을 마주하게 되서일까? 눈이 마주칠 때마다 서로 살짝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내적 친밀감이라는 게 이런 데서 오는 게 아닐까 싶다.
내 앞을 걸어가는 여행객들을 따라, 나도 열심히 걸었다. 그리고 넓게 펼쳐진 공간에 도착했다.
아리산에서 정말 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인 목련원이었다.
예전에 중국에서 공부할 때, 마음이 복잡하고 힘들 때는 늘 대학교 주변에 있는 '백화공원'을 찾고는 했다. '백화공원'은 이름 그대로 항상 사시사철 꽃이 가득 피어있는 곳이었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봄에 공원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 커다란 목련나무들이 가로수를 이루어 심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얗고 보드라운 꽃잎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지금 내 마음속에 가득한 화, 근심, 우울함이 모두 씻기는 듯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향긋한 목련꽃 향기가 항상 긴장되어 있던 내 몸을 느슨하게 이완시켜 주는 것도 좋았다. 그래서 목련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 중 하나이다.
아리산에 목련원이 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목련원에 와보고 싶었다.
비록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커다란 목련 나무는 없었지만, 구름과 똑같은 색으로 피어있는 목련들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목련원을 지나, 중간 휴게 지점인 수전궁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수전궁은 공사 중이었다.
근처에 간식거리를 파는 가게들이 많아서 그곳에서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다시 이동했다.
수전궁을 지나 삼대목으로 향하는 길.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담비가 있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나도 위험할 수 있고, 담비에게도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어서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 한참 동안 담비를 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정말 보고 싶었던 삼대목을 보게 되었다.
수십, 수백 년에 걸쳐 이러한 나무의 형상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
이런 걸 보면 자연의 강인한 생명력에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향림신목까지 왔다.
신목은 한국에 오기 전부터 늘 궁금했던 나무였다. 대체 어떤 나무길래 '신神'자가 붙은 것일까? 했는데, 정말 어마어마하게 컸다. 신목 앞에 서니 웅장함과 거대함에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사진을 찍으려고 해도 한 프레임 안에 다 담기지 않는 크기였다.
아, 정말 아름답다.
이 아름답고 위대한 나무에게 기도해 본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아리산의 터줏대감으로 자리해 줘. 먼 훗날,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또 찾아올게.
시간을 확인해 보니, 가이드 아저씨가 말씀해 주신 아리산 관광열차의 막차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슬슬 션무기차역으로 가야 하는데 길을 잃어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주변에 다른 여행객들도 많이 있었는데,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이다 보니, 순식간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내 앞에 아리산의 이곳저곳을 청소하시는 청소부 할아버지 한분이 보였다. 그분을 놓칠세라 후다닥 달려가 길을 여쭤보았다.
할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작은 오솔길을 알려주셨다.
할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길을 걸었다. 그런데 나 외에는 그 누구도 이 오솔길을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문뜩 혹시 내가 속은 건가. 내가 할아버지의 말씀을 잘못 들었나.. 하고 의심을 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갈까? 하고도 생각하지만, 일단 할아버지의 말씀을 끝까지 믿고 계속 길을 걷기로 했다.
가이드 아저씨께서 문제가 생기면 바로 라인하라고 했으니까, 조난당하면 라인으로 연락하면 되겠지. 추우면 나뭇잎을 덮고 있으면 되고, 배고픈 것은 비상용으로 챙겨 온 초콜릿을 먹으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뭐라고 할아버지께서 나를 속이셨겠어. 그리고 할아버지는 이곳이 직장인데, 설마 나보다는 아리산에 대해 더 전문가 시겠지. 사람들을 믿는다는 것. 내가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가이드 아저씨가 나를 도와줄 거라는 믿음. 청소부 할아버지께서 나에게 지름길을 알려주셨을 거라는 믿음이 있으니까, 낯선 길이 두렵지 않았다.
저 멀리 아름다운 산들이 병풍처럼 놓인 경치가 보였다.
한적한 오솔길.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향긋한 소나무 냄새, 저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까지
지금 이 순간이 참으로 소중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계속 걷다 보니 드디어 션무기차역에 도착했다!
대만이라는 나라에 처음 관심을 가졌을 때부터 늘 보고 싶었던 그 아름다운 기차역.
푸른 하늘과 짙은 녹음이 매력적인 울창한 산림. 그리고 그 안에 놓여있는 작은 철길까지, 내가 책으로 읽고, 머릿속으로 상상해 왔던 그 이상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기차는 30분 간격으로 오는데 다음기차까지 약 10분 정도가 남은 상황이었다. 도착 시간까지 완벽했다.
서둘러서 기차표를 사고 기념사진도 몇 장 찍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내 사진도 몇 장 찍었는데, 광둥어를 사용하시는 아저씨께서 정말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어주셨다.
아저씨 덕분에 멋진 인증사진을 여러 장 남길 수 있었다.
"충분해요! 아저씨, 충분해요!"
"아니, 한 장 더! 이쪽에서 이렇게 걸어와보세요. 자연스럽게!!"
뒤에서 중국인 할머니들께서 "아유, 예쁘네!", "한국인이야?" 등을 이야기하고 계셔서 조금 부끄러웠지만, 아저씨께서 찍어주신다니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한껏 모델 포즈를 잔뜩 해보았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하겠는가?!
아저씨께서 찍어주신 멋진 사진들을 하나하나 넘겨보며 오늘의 아리산 투어를 되짚어보는 동안, 저 멀리서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장난감 기차같이 예쁜 빨간 기차가 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리는 자유석이라 사람들을 따라 서둘러 자리에 착석했다. 사람들이 모두 타자. 천천히 기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아리산관광서비스센터에서 션무기차역까지 2시간 넘게 걸었는데, 기차를 타고 내려오니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짙은 녹색의 산속을 달리는 빨간색의 기차라니, 정말 그림책 속에서나 볼 법한 예쁜 조합이었다.(참고로 타이핑산에 있는 산림기차는 노란색이다. 그것도 참 예쁠 것 같다.)
순식간에 아리산역에 도착한 산림열차.
수첩을 미처 준비해오지 못한 나는 아쉬운 대로 기차표에 아리산역 기념스탬프를 찍었다.
(대만 여행 필수품 : 작은 수첩. 관광지마다 귀여운 스탬프가 많아서 찍고 다니면, 멋진 기념품이 된다.)
그리고는 가이드 아저씨와 만나기로 했던 관광서비스센터 입구에서 기념품들을 구경했다.
사고 싶은 기념품들이 정말 많았지만, 꾹 참고 '아리산의 봄'을 테마로 한 그림엽서 한 장을 구입했다.
아름다운 아리산.
완벽한 햇빛, 완벽한 바람!
모두 안녕!!
주차장에서 쉬고 있는 개들을 보며 놀고 있으니, 곧 가이드 아저씨와 홍콩인 모녀가 나타났다.
"구경은 잘했어?"
"네, 덕분에요!"
다시 차에 타고 타이중으로 돌아갈 시간.
조금 자고 일어나니, 저 멀리서 석양이 지고 있었다.
나에게 기쁨과 행복,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을 안겨준 아름다운 아리산 안녕.
생각보다 길이 막혀서 예상보다 늦게 타이중으로 돌아왔다.
가이드 아저씨께서는 배고프겠다며,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셨다. 정해놓은 식당이 있다면 그 앞에서 내려주겠다며. 하지만 너무 배고파서 대충 편의점 빵으로 때우고 숙소에서 쉬고 싶다고 하니, 가이드 아저씨께서 편의점 음식은 몸에 해로우니, 제대로 된 밥을 먹으라며 나를 타로코 몰 앞에 내려주셨다.
여기라면 아직 문 연 식당이 있다면서, 몇 번이나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야지 끝까지 힘내서 여행을 할 수 있다고 신신당부하셨다.
하지만 식당을 고를 힘도 남지 않아서 그냥 바로 눈앞에 보이는 맥도널드로 향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너무 맛있었다.
내일이면 드디어 타이중을 떠나 타이난으로 향한다.
나에게 첫 대만이었던 타이중.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웠는데,
친절한 타이중 사람들 덕분에 조금씩 타이중과 대만에 적응할 수 있었다.
타이난에서도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지.
나의 찬란한 도피는 앞으로도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