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여행 5일 차.
오늘은 드디어 타이중을 떠나 타이난으로 가는 날이다.
어제 오랫동안 차를 타서인지 온몸이 찌뿌둥했다. 느지막이 일어나 숙소 밖으로 나섰다.
11시 체크아웃 시간까지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굳이 바쁘게 다니지 말고, 그냥 숙소 근처를 한가로이 산책하고 아침 겸 점심으로 맛있는 거를 먹기로 했다.
이제야 조금 타이중에 익숙해졌는데 다시 떠나야 한다니 아쉬웠다. 구글맵을 켜서 대충 살펴본 후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도로가 옆으로 흐르는 작은 하천이 마치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을 떠올리게 했다. 익숙한 풍경들 속으로 마조묘처럼 정말 낯선 풍경들이 속속 보였다. 가까운 듯 하지만 낯선 도시. 타이중은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전날밤에 미리 찾아놨던 브런치 가게에 도착해서, 오랜만에(?) 고급스러운 아침식사를 했다. 가게 전체에 깔려있는 고소한 커피 향기가 식욕을 자극했다. 카운터에서 음식을 주문하려고 하니, 사장님으로 보이는 여성분이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이 식당은 큐알코드를 이용해서 음식 주문해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심각한 기계치인 나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방법이라 결국 사장님께 도와달라고 했다.
사장님의 도움을 받아, 매콤한 흑후추와 달콤한 매실 소스가 들어간 불고기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수 있었다. 그동안 대만에 와서 며칠 동안 아침은 과일이나 편의점 간편식으로 때웠는데 뭔가 제대로 된 밥을 먹으니까 기분이 좋았다.
포만감을 느끼며 숙소에 돌아왔다. 공용공간에서 그동안 찍었던 타이중 사진들을 정리하고, 좀 더 휴식을 취한 후 바로 코앞에 있는 타이중역으로 이동했다.
내가 탑승한 기차는 한국의 KTX와 무궁화호 사이쯤 되는 '푸요마'였는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깨끗하고 아늑했다.(나는 과거 중국에서 잉쭤(硬座)를 7시간 타고 너무 힘들었던 적이 있다.)
캐리어를 끌고 자리에 앉자, 옆자리에 앉아계시던 할머니께서
"그 캐리어는 옆에 빈자리에 높고, 편하게 앉으렴."이라고 말을 하셨다.
나는 할머니의 말씀에 따라 캐리어를 반대쪽 빈좌석 쪽에 밀어놓았다.
"만약에 사람이 오면 그때 치워주면 되지."
"네, 할머니."
그것이 나와 푸요마 할머니의 첫 만남이었다.
할머니께서는 내 어눌한 중국어 실력이 이상하게 들리셨는지 가장 먼저 "어느 나라 사람이니?"라고 물어보셨다. 한국인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중국어를 어디에서 배웠는지, 혼자 왔는지, 대만에 친구나 가족이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등 많은 것을 물어보셨고, 할머니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할머니께서는 큰 아들 내외에 살고 있는 타이베이에서 작은 아들이 살고 있는 핑둥으로 가고 계신다고 하셨다. 이미 70세를 훌쩍 넘은 연세셨지만, 아주 정정하셨고 나를 위해 타이완어(국어)가 아닌 푸통화(보통화)로 말씀해 주셨다.
할머니께서 여자인 내가 혼자, 그것도 36세인 내가 회사까지 퇴사하고 여행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놀라워하셨다.
"아! 그렇지, 너 이런 거 먹니?"
할머니는 가방 속에서 주섬주섬 무엇인가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셨다.
꼼꼼하게 비닐에 몇 번이나 포장한 것은 쫄깃한 깨빵이 들어있었다.
"우와! 감사합니다."
할머니께서 주신 깨빵은 아주 고소했다. 와구와구 먹고 있는데, 그 모습이 좋으셨는지, "더 먹으렴"이라며 깨빵을 세 개나 더 나눠주셨다.
"아유, 충분해요! 충분해요!"
나는 양손을 저으며 배부르다고 열심히 표현했지만, 할머니의 요술 가방에서는 간식거리가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이 구아바도 먹어보렴. 이런 아삭한 식감이라 맛있단다."
"계란도 하나 먹으렴."
"떡도 내가 직접 만든 건데 한번 먹어보렴."
할머니께서 계속 먹을 것을 나눠주셨다. 대만 할머니나 한국 할머니나 정이 많으신 것은 만국 공통인 것 같다.
문뜩 우리 할머니가 생각났다. 어린 시절에 할머니께서 사과 반 토막을 숟가락으로 긁어서 내 입에 넣어주셨는데, 어린 마음에 나는 그게 참 싫었다. 할머니의 주름 많은 손가락으로 쭉쭉-찢어주는 김치도 싫었고, 할머니 몸에서 나는 특유의 약냄새도 싫었다. 부모님은 주말마다 시골집에 가서 할머니를 찾아뵀는데, 친구들은 놀이동산이나 백화점을 가서 놀 때 나는 시골집에 가야 하는 게 정말 싫었다.
부모님께서는 그런 나에게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라고 하셨는데, 그때는 그 말씀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공부를 핑계로 시골집을 찾아가지 않았고, 타지로 대학을 가면서 방문 횟수는 더욱 줄어들었다. 엄마의 입을 통해 간혹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크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마도 할머니께서는 언제나 나와 함께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늘 함께하기 때문에 그 소중함에 대해, 나는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함께하는 것일수록 더욱 소중한 법인데...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대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 어느 날. 국제전화로 오빠에게 연락이 왔다.
"놀라지 말고 들어.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 그런데 지금 바로 한국 오기 힘드니까, 그냥 그곳에서 공부 열심히 하고, 일단 알고만 있어."
비상계단에서 오빠의 전화를 받고 털썩 주저앉았던 것이 지금도 기억난다.
비상계단에서 나던 먼지 냄새, 차가운 공기, 오빠의 울먹이던 목소리.
결국 나는 그렇게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대학원 과정을 모두 마치고 한국에 귀국했을 때는 이미 할머니는 납골당에 모셔진 후였고, 할머니의 49제까지 모두 끝난 상황이었다.
나는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할머니께서 손수 갈아주시던 사과, 손가락으로 찢어주시던 김치 조각을 한 번이라도 더 먹을 것을. 할머니께서 자신의 무릎을 툭툭 치며, 이리 와서 앉아보라서 하셨을 때 한번 더 가서 할머니 품에 안겨볼걸.
타이중에서 타이난으로 가는 기차 속, 다정한 대만 할머니의 미소와 그녀가 건네준 간식 속에서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와 같은 정을 느껴보았다.
대만 할머니께서는 내가 물이 아닌 주스를 마시는 것을 보시더니, 마지막으로 커다란 생수병까지 한병 꺼내 나에게 건네주셨다.
"주스는 몸에 안 좋단다. 물을 마시렴."
우리 할머니께서 살아계셨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기차에서 내리기 직전 나는 대만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아드렸다.
"할머니 감사합니다. 할머니 덕분에 대만이 더욱 좋아졌어요."
"여행 잘하렴. 한국에 돌아가는 날까지 건강하고."
"네! 할머니도 건강하세요."
내리는 순간까지 할머니는 나를 친손녀 대하듯 몇 번이고 손등을 토닥여주셨다. 우리 할머니처럼 다정했던 대만 할머니. 할머니 덕분에 대만이 더욱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