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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도피 20, 가오슝 도착!

36세,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by 나나

드디어 도착한 가오슝.

인파에 휩싸여 힘겹게 기차에서 내리자 가장 먼저 시끄러운 소음들이 내 귀를 따갑게 만들었다. 정신줄을 잘 잡고 있지 않으면 길을 잃거나, 짐을 도둑맞을 수 있겠다는 긴장감이 엄습했다. 목근육이 딱딱하게 경직되는 듯했다.


사람들이 가는 방향을 따라 걸었다.

마치 파도에 휩싸이듯, 인파에 휩싸여 자연스럽게 가오슝역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와..."

밖으로 나온 가오슝은 그야말로 신천지 같았다.

그동안 만나왔던 타이중과 타이난도 꽤 큰 도시지만 그래도 아기자기한 지방 소도시의 분위기가 강했다면,

이곳은 도착하자마자 '대도시'의 느낌이 강했다.



드드드드드듣-

콴과과과광!!


어디를 가나 공사하는 소리, 오토바이 달리는 소리, 자동차 경적소리로 시끌시끌했다.

고막을 때리는 듯한 공사장 소음에 정신이 아찔했다. 동시에 그동안 잘 느끼지 못했던 매캐한 먼지 냄새에 비염이 재발한 듯 콧속이 따가웠다.


“아, 매연...”

대만에 와서 가장 놀란 것 중의 하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마도 코로나19 이후, 마스크를 쓰는 문화가 정착화된 것 같은데, 건강에 대한 염려와 오토바이 등으로 인한 매연 문제가 단단히 한몫을 한 것 같다.


횡단보도 앞에서 기차에서부터 안면을 텄던 할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할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외국인인 것 같은데, 혼자 여행 왔니?"라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셨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가오슝은 공기가 안 좋은데, 너 마스크 없니? 내가 하나 줄까?"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이곳은 공사도 많이 하고 있고, 공장도 많은 지역이라 공기가 안 좋다고 꼭 마스크를 써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나는 할아버지를 더 걱정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서, "저도 마스크 있어요. 쓸게요."라며 짐 가방에서 마스크를 하나 꺼내서 썼다. 그제야 할아버지는 안심하신 듯, "즐거운 여행 되렴."이라는 말씀과 함께 본인의 갈 길을 가셨다.



공기가 안 좋다는 것을 자각하자 콧물이 미친 듯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물처럼 콧물이 줄줄 흘러서, 몇 발작 채 걸음을 옮기지도 못하고, 휴지로 연신 코를 풀어야 했다.

앞으로의 여행을 위해서는 무조건 비강 세척을 해야겠다. 콧속에 있는 먼지와 세균을 없애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숙소고 뭐고, 일단은 약국부터 찾아갔다. 눈앞에 제법 큰 대형 약국이 보여 후다닥 약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내 코를 구해줄 비강세척용 멸균식염수를 구입했다.


IMG_0004.JPG?type=w773 내 코의 구원자!

내가 살다 살다 대만에서 멸균식염수를 다 사본다.

멸균식염수를 무슨 보물단지라도 되듯 소중히 안고, 호텔로 향했다. 지긋지긋한 콧물에서 벗어날 길이 머지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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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로 향하는 길. 앞선 두 개의 도시와는 꽤나 다른 풍경이었다.

내가 예약한 파인트리로열호텔에 도착하자, 3시 입실이니 짐을 놓고 3시까지 놀다 오라며 친절하게 가오슝 관광지도를 건네주었다.

내일 가오슝에서 예약한 놓은 이벤트가 하나 있어서 그것을 제외하고는 가오슝에서는 딱히 큰 계획이 없었던 터라 일단 호텔 로비 소파에 앉아 직원이 준 관광지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뭘 할까?”


일단 금강산도 식후경.

숙소 바로 앞에 단단 버거가 있어서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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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 버거는 가오슝을 대표하는 패스트푸드 체인이다. 실제로 타이베이나 타이중, 타이난에서는 단단 버거를 볼 수 없다. 오직 가오슝에서만 볼 수 있는 곳인데, 재미있는 것은 패스트푸드지만 굉장히 대만스타일이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패스트푸드라고 하면 햄버거와 감자튀김, 콜라가 기본 조합인데 반해, 여기는 햄버거와 대만식 죽, 음료가 기본 세트메뉴였다.

햄버거와 죽이라니? 약간 조합이 이상할 것 같아서 나는 햄버거와 조각 치킨을 시켰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햄버거와 죽을 함께 먹고 있었다.


배도 채우고 이 근방의 지리를 익힐 겸 숙소 근처에 있는 곳부터 돌기로 했다.

숙소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어, 아이허에 도착할 수 있었다.


IMG_0016.JPG?type=w773 '역전'만큼 어색한 '아이허강'

아이허에 왔는데 저 한국어 번역이 참 거슬렸다.

이런 게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인데, 중한번역을 볼 때마다 문법 오류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게 내 직업병 중 하나이다.

중국어로 ‘河(허)’가 ‘강’이라는 뜻이니까 '아이허 강爱河강'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굳이 따지면 '사랑의 강강'이 되는 셈이다. 이런 것을 볼 때마다 좀 더 제대로, 신중하게 번역을 해줬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아무튼, 아이허에 왔지만 날씨가 영 심상치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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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쏟아질 듯 하늘이 금세 어둑어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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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둘러 조형물 앞에서 사진을 한 장 찍고, 체크인 시간까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숙소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놓고, 음료가 나올 때까지 대만 스타벅스의 MD들을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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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스타벅스는 MD에 꽤 진심인 것 같다.

봄이라고 핑크핑크한 텀블러부터 선물용으로 나온 틴케이스에 든 쿠키들까지… 다 예뻤다.

핑크빛이 머그잔을 계속 만지작 거리다가 앞으로의 여행이 보름이상 남았다는 것을 상기한 후, 다시 컵을 내려놓았다. 미련이 뚝뚝 떨어졌지만, 컵을 가지고 다니다가 분명 깰 것 같아서 포기했다.


내가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귀여운 MD들을 뒤로하고 창가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랜만에 마시는 아메리카노였다. 회사를 다닐 때는 하루 3~4잔씩 커피를 마셨는데,저 지금은 커피 대신 밀크티를 마시고, 다양한 대만의 음료를 마셔서 그렇게 커피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내 몸을 구성하는 70%의 수분 중 약 60%는 카페인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고는 했는데, 이제는 커피가 낯설게 느껴진다. 아, 이런 사소한 변화마저도 기분 좋게 느껴진다. 내가 점점 더 회사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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