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지난밤 대만여행 카페에서 한 분이 급성 장염에 걸렸다는 글을 보았다.
마침 숙소도 가까웠고, 한국에서 챙겨 온 지사제가 떠올라, 아침부터 서둘러 약을 가져다 드렸다.
과거 상하이에 살 때, 나 역시 장염으로 고생한 적이 있다.
그때의 고통을 생각하면, 낯선 곳에서 아픈 일이 얼마나 서러운지 너무 잘 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즐겁게 여행하러 온 곳에서 아프기까지 하면 마음이 더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였을까.
그저 내가 대만에서 매일 행복하듯, 그분도 이곳에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이온음료 한 병과 함께 약을 건넸다.
그분은 고맙다며 건망고 한 팩을 내어주셨다.
보답을 바란 일은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간식을 받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좋은 일을 하면 배로 돌아온다.’
그 말이 오늘은 유난히 실감 났다.
크게 의미 두지 않았던 일이, 누군가의 미소와 감사의 말, 그리고 달콤한 건망고로 돌아왔다.
왠지 오늘 하루는 좋은 날이 될 것 같다.
아침 식사로, 화롄에서 만난 타이베이 친구가 추천해 준 피단죽을 먹기로 했다.
그 친구가 했던 말은 “피단 맛있어요, 꼭 먹어보세요.”였는데,
그 시커먼 피단을 감히 통째로 먹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타협점을 찾았다 — 잘게 다진 피단이 토핑으로 들어간 피단죽.
구글맵에 ‘피단죽’을 검색하니, 숙소 근처에서 딱 한 곳이 나왔다.
소고기죽을 시키며 피단을 조금 추가했다.
작은 그릇으로 주문했는데도 양이 넉넉하고 토핑이 듬뿍 들어 있었다.
호텔방으로 돌아와 따뜻한 피단죽을 한 입 떠먹는 순간—
“오! 맛있어!”
잘게 다져진 피단 덕분인지, 걱정했던 특유의 쿰쿰한 향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냄새도 나지 않고, 맛있기만 했다.
다음에 또 피단을 먹게 된다면, 그땐 좀 더 과감하게 도전해 봐도 괜찮을 것 같다.
든든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잠시 웹툰을 보다 천천히 숙소 밖으로 나왔다.
‘이번엔 어디로 가볼까.’
생각 끝에, 늘 마음 한편에 두고만 있었던 다안삼림공원으로 향했다.
다안삼림공원은 레드라인 지하철을 타면 바로 닿는 공원.
융캉제나 국립대만대학교와도 가까워, 동선 짜기에도 딱 좋다.
공원에 도착하니 수국이 한창이었다.
한국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만난 수국.
온화한 대만의 기후 덕분인지, 한 달 동안 대만 곳곳에서 정말 많은 꽃을 만났다 —
벚꽃, 등나무, 카라, 그리고 오늘의 수국까지.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꽃을 따라 떠나는 대만 여행’도 꽤 매력적인 테마다.
공원에는 다양한 품종의 수국이 피어 있었다.
색도,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
그 풍경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다 채워졌지만, 다안삼림공원은 사실 ‘탐조 명소’로도 유명하다.
연못 근처에는 커다란 하얀 새들이 모여 있었고, 그 모습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나는 붓꽃과 연꽃을 보러 갔다가 커다란 새가 훌쩍 날아오르는 바람에 깜짝 놀라 도망쳐버렸다.
꽃은 좋지만, 새는 여전히 무섭다.
수국을 원 없이 봐서 만족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아저씨가 다가와 “저 언덕에 특별한 나무가 있어요.”라고 하셨다.
처음엔 조금 놀랐지만, 곧 그분이 그저 친절한 현지인이란 걸 알았다.
아저씨의 조언을 따라, 언덕 위로 올라가자 새하얀 꽃이 흐드러진 이팝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정말, 공원 안에 단 하나뿐인 이팝나무였다.
한국에서는 흔한 가로수지만, 대만에서는 보기 드문 나무인가 보다.
그렇게 또 하나의 ‘차이’를 알아간다.
이 날은 요양원 같은 곳에서 단체로 소풍을 나왔는지 많은 어르신들께서 요양보호사들과 함께 공원을 산책하고 계셨다. 공원에서 산책하며 재활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인지, 공원 내에는 핸들 보조대 같은 것들이 곳곳에 비치되어 있었다.
일부 어르신들께서 핸들 보조대를 잡고 천천히 걷고 계신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요양원에 계신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우리 외할머니도 꽃 좋아하고, 산책하는 것도 좋아하시는데-
한국에 가면 할머니를 만나러 가야겠다.
다안삼림공원을 나와 융캉제와 국립대만대학교 사이에서 잠시 갈등했다.
그리고 ‘가보지 않은 곳으로 간다.’라는 기존 계획대로
천천히, 국립대만대학교 쪽으로 발걸음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