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도피#73.대만 환도여행의 마지막 밤을 바라보며

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by 나나


공관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타이베이 101로 향했다.

동선은 어딘가 엉성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지하철 안에서 미리 타이베이 101 전망대 입장권을 구매했다.

오후 5시 입장으로 예매했는데, 다행히 오래 기다리지 않고 바로 89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output_1051500962.jpg?type=w966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
IMG_4767.JPG?type=w966 전망대에서 마주한 타이베이의 전경


이번 여행은 샹산에서 타이베이 101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마무리 또한 이곳에서 하고 싶었다.

이런 걸 수미상관이라고 부르는 걸까?


IMG_4773.JPG?type=w966 샹산의 모습


오후 5시가 넘었지만 해는 아직 지지 않고 있었다.

나는 해 질 녘까지 머물기로 하고, 천천히 전망대를 돌며 타이베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전망대에는 다양한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사진을 찍는 소소한 즐거움도 있었다.

특히 유리 바닥 위에서의 순간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우연히 만난 한 홍콩 여행객이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어주었고, 덕분에 마음에 드는 장면들은 많이 남길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전망대 티켓에는 카페 할인 쿠폰이 포함되어 있었다.

잠시 쉬어갈 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IMG_4786.JPG?type=w966 너무 예쁜 케이크


레몬 바질 케이크와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그 단순한 조합이, 지금 이 순간의 행복함을 가득 채워주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창가로 모이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 름에 섞여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대만 환도 여행의 마지막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IMG_4789.JPG?type=w466
IMG_4797.JPG?type=w466
환도여행의 마지막 밤을 마주하며...




지난 한 달의 시간들이,

한 장면씩 조용히 떠올랐다.


우왕좌왕하던 타이중에서의 첫날.

아리산 숲 속에서 느꼈던 깊은 고요와 경외심.

타이난에서 마주했던 역사와 시간의 결.

가오슝에서 만난 따뜻한 사람들.

컨딩의 바람을 가르며 달리던 자전거와 롱판공원으로 향하던 길 위에서 마주한 광활한 풍경.

타이동과 화롄에서의 친구들

타이베이에서 사귄 소중한 인연들까지...


모든 순간들이,

이상할 만큼 또렷하게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여행을 하기 전,

내 마음은 오래도록 흐린 날씨 같았다.

상황을 바꿔보려 애썼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점점 지쳐갔다.

사람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었고,

그 부정적인 감정은 결국 나 자신을 향했다.


하지만,

여행을 하며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그제야 세상이

조금은 더 밝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 여행을 무사히 마친 나 자신이 문득 대견하게 느껴졌다.


나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미워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그 '미움'을 놓아도 될 것 같았다.


누군가는 이 간을 '현실도피'라고 말했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지쳐 있었고,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며,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났다.


그래서, 분명 '도피'였다.


하지만 나는 그 단어 앞에 하나의 말을 더 붙이고 싶다.

이 도피가 끝났을 때, 마음속의 잿빛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른 빛이 채워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의 도피는 '찬란한 도피'였다.



앞으로도 나는 지치고 흔들리는 순간마다

이 시간을 떠올리며 다시 나아갈 것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행복>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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