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일에 집중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취하는 행동들이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있다. 내게 있어 그 행동을 하나 꼽으라면 머리를 갑자기 좌우로 빠르게 두세 번 흔드는 일이다. 그 행동의 의미는, '언니! 정신 차려, 정신줄 놓으면 끝이야.'이다.
발레홀에서는 남을 쳐다볼 시간적 체력적 여유가 없고, 남들도 마찬가지로 나에게 관심을 쏟을 수 없다. 선생님의 지도대로 잘 해내는지 전신거울로 나를 살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 지켜야 할 것들이 발레에는 너무 많다. 골반 펴고, 배꼽 끌어올리고, 복근 짧게, 꼬리뼈 내리고, 둔근 딱딱하게, 허벅지 턴아웃, 갈비뼈 닫고, 어깨 펴고, 등근육 내리고, 팔꿈치 유연하게, 손에 힘 빼고, 발 아치 세우고, 열 발가락에 힘 균등하게 등등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발레 시간에서도 내 머릿속에 잡생각이 들어앉았다. 한 손은 바를 잡고 파세업을 할 때에도 그것들이 내 머릿속에 안착해 있길래 머리를 흔들었다. 이 일을 시작으로 정신줄을 놓는 빈도가 잦아지자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 발레와 멀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고.
정신줄을 다잡는 계기.
모든 일에는 '계기'라는 것이 찾아온다. 나의 발레에도 이런 위기가 왔을 때 다시 열정을 쏟을 수 있는 계기가 최근 있었다. 필라테스를 오래 했다는 신규 회원이 발레에 입문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발레리나처럼 마르거나 길게 뻗지는 않았어도 다부진 근육이 잘 자리 잡은 몸. 나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바디쉐입.
언제나처럼 정해진 수업시간이 지난 지는 이미 오래였고, 한 시간 반을 훌쩍 넘어 끝난 수업 후 그 회원은 나를 가리키며 자신의 '로망'이라고 했다. 그랑줴떼를 뛰는데 스텝이 꼬여 평소보다 쁠리에를 깊이 넣지 못했고 따라서 높은 점프를 할 수 없었는데도 나처럼 일자로 점프를 뛰는 모습이 로망이라고 했다. 선생님과 그 회원 간의 대화였지만, 그 옆에 있던 나에게는 너무도 잘 들렸지만, 쑥스러워서 못 들은 척 하자 선생님이 나에게 그 '로망'이라는 단어를 되풀이하며 재확인시켜주셨다.
오 마이갓!
처음 발레를 경험하신 분이 볼 때는 내가 발레를 잘하는 것처럼 볼 가능성도 있긴 하다, 30초짜리 바 순서도 헤매던 입문 당시의 나도 그랬으니까.
발레는 다른 활동에 비해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 경험이 쌓여 약간의 여유가 생긴다면 같은 공간에 있는 다른 회원들에게 배우는 것이 상당하다. 다른 회원의 실수는 오답노트이며, 다른 회원의 수준 높은 몸짓은 참고서이고, 누군가 선생님께 질문을 한다면 그건 바로 족집게 강의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깨달음에 이른다.
이 '로망' 에피소드 이후로 나는 머리를 세게 흔들지 않아도 정신줄을 다잡을 수 있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로망이라는데 정신줄을 놓고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이렇게 나는 발레를 매일 출 핑계를 하나 더 얻었다. 내가 누군가의 오답노트, 참고서, 족집게 강의, 배움의 기회가 될 수 있는 곳에서, 나는 누군가의 로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