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전도사 vs 발레 마피아
오름차순으로 정렬, 낮은 가격부터 차례로 훑다가 어느 정도 내가 정한 기준의 상한 금액이 다다르면 쇼핑을 멈췄다. 나를 알고 지낸 20년 동안 남편이 나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가 '오름차순 정렬 쇼핑'이다.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건드린다나 뭐라나. 그래도 이렇게 쇼핑하는 버릇은 내가 로또 1등에 당첨돼도 고쳐지지는 않을 것 같다.
취미 발레에는 우리만의 세계가 있다. 실력과 장비로 구분되는 리그 오브 네이션.
세 번을 접으면 손바닥만 해지는 레오타드 한 벌의 가격을 말하면 발레를 모르는 사람들은 입이 떡 벌어질 거다, 35만 원을 훌쩍 넘는 것도 있으니. 나는 숫자 여섯 자리의 발레 장비를 구입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스커트는 중고로 득템 하기도 하고 국내 합리적인 가격의 브랜드를 주로 이용하거나 대박세일 기간에 주로 결제한다, 물론 이 때도 오름차순으로 정렬을 잊지 않는다.
발레 장비에 오름차순을 잊지 않는 것은 우리 학원 분위기 영향도 있다. 학원마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 학원으로만 보면 실력과 장비 보유는 정비례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시선을 사로잡는 디자인이나 고가의 장비들을 내가 감히 착장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암묵적 규칙이 있다고 믿었다. '예쁘게 차려입으시려거든 실력을 먼저 쌓으시지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무도 나에게 그렇게 말한 적 없지만 눈칫밥만 40년 먹은 나는 그냥 마음의 소리에 복종하게 된 것이다.
빨간색 레오타드에 크림색 스커트를 두르건, 빨간색으로 깔맞춤 하건, 녹색으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건 아무도 관여하지 않지만, 발레 클래스에 들어가면 오로지 나만 보이는 거울 앞에서 매우 중요한 안건이다. 녹색에도 포레스트, 트리, 다크 포레스트, 제이드, 올리브, 틸 등등 바레이션이 너무도 다양한 것은 나도 스커트를 커스텀해서 입기 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하여튼 취미 발레계에서는 발레복 코디가 무지하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환율이 오르기 전에 살색 레오타드에 빨간 립스틱 자국이 사정없이 찍혀있는 고가의 레오타드를 먼저 사는 것도 남는 장사란다, 돈을 쓰는데 남는 장사라니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지만 우리만의 세계에서는 그렇다고 해 두자.
필라테스 복장으로 1년 반 정도 수업을 듣고 나서 자연스레 '몸이 더 잘 보이는 복장'에 대한 갈급이 있었다, 한 달에 레오타드 4개를 구입하면서부터 발레 장비병이 시작되었다. 스커트와 워머도 하나씩 추가하고 천 슈즈임에도 발에 레오타드를 입은 것처럼 찰떡이라는 슈즈도 추가하고 운동량을 높일 심산으로 땀복도 추가하는 식이었다. 장비 보유량만큼 실력이 올라갔는지는, 선생님이 '정말 많이 늘었어요.'라고 우쭈쭈 해주신 몇 번의 말씀을 증거로 삼아 그렇게 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여기서 스튜디오에 한 걸음을 내딛는 회원의 복장을 보면 그녀의 레벨이 대략 나온다. 웜업 부츠,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땀복, 목도리, 상의 워머, 말끔하게 묶어 그물망에 넣은 머리, 커다란 배낭을 어깨에 메고 들어오는 분은 적어도 5-6년 이상쯤 된 취미 발레 경력자로 추측할 수 있다. 매트 운동, 바 워크가 끝나면 그녀가 몸을 데우느라 입은 겉 껍데기들은 모두 한 겹씩 벗겨져 배낭으로 들어가고 아름다운 레오타드, 타이츠, 스커트가 짠 하고 나온다.
실력과 장비 보유가 정비례하다 보면 다음 따라오는 것이 개인 레슨 수강과 콩쿠르이다. 이 영역에 진입한다는 것은 온 천하에 '나는 발레에 진심입니다.'를 공표하는 것과 같다. 아직 나는 이 세계에는 발을 들이지 못했다, 사실 너무도 들어가고 싶은 세계이지만 시간과 경제적인 이유로 미루고 있다. 하필이면 이번 학기에 수강한 과목 두 개가 다섯 과목 분량만큼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발레 수업 시수를 줄이기까지 했으니, 그리고 외벌이인 남편에게 더 부담을 주기 싫어서이기도 하다. 복직하고 나서 내 명의의 월급이 찍히는 날 그동안 공부하면서 적자 낸 것들을 채워 넣고서 고민해보려고 한다, 그때 내가 너무 늙어있지 않아야 할 텐데.
발레에서 만난 지인들을 발레 메이트라고 한다, 줄여서 발메. (예전 회사에서는 한국 사람들끼리, 같은 국적 사람들끼리 모여 다니는 걸 '마피아'라고 불렀는데. 발레는 호칭조차 예쁘다. 발레 마피아가 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발메의 구성도 실력과 장비를 기준으로 모인다고 할 수 있다. 실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발레 장비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수업 후 커피를 마시고 공연을 관람하고 공구를 하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서로를 아름답게 섬긴다. 원치 않는 사람의 접근은 부담스럽지만, 사실 실력과 장비 취향으로 서로를 알아본 사람들끼리 부담스러울 관계는 거의 없다. 비슷한 실력과 취향으로 모인 사람들은 그들만의 소그룹을 따로 만들어 레슨을 받기도 한다, 직접 경험은 없지만 아마도 회원들로부터 받는 텃새나 기타 성향의 차이로 미간에 주름이 지는 일은 없다고 한다.
한인교회에 출석하던 시절, 친하게 지내던 한 목사님이 염려 섞인 말씀을 하셨었다. 나는 그 말씀을 직장 생활, 육아, 아이들 친구 모임, 사회생활을 할 때마다 곱씹는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만 관계를 넓히지 밖에서는 전혀 그렇게 못해. 오히려 더 좁은 인간관계를 하고 있어. 그게 그리스도인이 갈 방향은 아니거든. '
다시 언급하자면 외국에서 회사를 다닐 때, 같은 국적끼리 몰려다니는 직원들을 '마피아'라고 불렀다. 코리안 마피아, 아시안 마피아. 다른 국적 직원들과 유연하게 섞이기를 바라는 마음에 마피아라는 아주 센 집합 명사로 우리를 세게 때렸었다, 그러지 말라고.
발레를 한다고 하면 무시당하거나 놀림감이 될까 봐 '요가 다녀요.'라고 둘러대고, 발레 학원 안에서는 눈에 하트를 장착하고는 발메들과 발레를 나누고 기억하고 실천하고 미래를 계획한다. 취미 발레 인구가 많아져야 내 발레 생활이, 내 발메의 발레 생활이, 미래 발메의 발레 생활이 질적으로 높아질 텐데 지금 나와 같은 행동이 그것을 늦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발레 전도사 vs 발레 마피아
취미 발레계 안에서도 이렇게 구분되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고, 그 울타리 밖으로 나오면 더 확연히 구분되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 발레로의 진입장벽, 발레의 경계를 낮춰야 대중화가 될 텐데 구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우리끼리만의 세계는 우리를 더 좁은 관계로 편협함으로 빠지게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우리들만의 세계가 넓어진다면 그것이 우리의 바운더리를 넘어 확장에 기여하는 날이 오겠지.
1차 세계대전 이후 설립된 국제기구인 리그 오브 네이션은 미국의 불참으로 결국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지금 UN의 전신인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과연 발레에서는 누구의 참여와 노력이 결정지을까. 취미 발레인들의 그들만의 세계는 미래 발레 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 건지 궁금하다, 또 그 영향이 작지만은 않을 것 같아 기대된다. 발레로의 진입장벽, 발레의 경계를 낮춰야 대중화가 될 텐데 이건 누구의 몫일까. 지금 느즈막에 시작한 우리가 발레를 함에 있어 부족한 것들, 필요한 것들, 개선해야 할 것들, 또는 취미 발레인들의 몫이 어디엔가 기록되어 좋은 밑거름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는데.
명언이 또 한 번 떠오른다, 자꾸만 복기하게 되는 이 명언을 게시했던 취미 발레 선배님과 같이 수업 한번 듣고 싶네. '사회에서 다들 한 자리씩 하고 있는 멀쩡한 사람들이 모여, 너무나도 발레를 못하고 있다.'
맞는 말이지만 우리는 정말 심각한걸, we are deadly serio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