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수입 발레복 브랜드 세일이 시작됐단다.
대충 사이즈만 맞춰 장바구니에 모두 담고, '세상에 세 벌을 담았는데 10만 원도 안되네.' 감탄하며, 그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을 막 쓸 수는 없으니 밥을 먹으면서 고민하기로 하고 아이들과 느긋한 저녁식사를 했다. 국을 떠서 입에 넣으면서도 장바구니에 담긴 레오타드 생각뿐이었다, 혹시나 하고 들어가 보니 에라, 품절로 인해 주문 불가란다.
'내가 저녁밥 먹는 동안, 내 레오타드 득템 하신 분!'을 수소문해서 찾아내고 싶을 만큼 아까운 순간이었다.
레오타드는 민망해서 못 입겠다던 내가 틈만 나면 레오타드 쇼핑을 하고 있는데 이건 아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니라 밑 빠진 발레 옷장에 레오타드 붓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랄까.
최근 맥주와 커피를 끊었다, 당분간 출근하지 않으니 화장품이나 외출복을 사지도 않는다. 유일하게 나를 위해 소비하는 돈은 발레 뿐이었다. 발레를 시작한 이후, 월급통장에 입금내역이 없었던 그간, 발레에 얼마나 돈을 들였는지 중간정산을 해보았더니 약 480만 원을 썼다, 휴. 차트로 그린다면 가장 큰 파이는 400만 원이 들어간 발레 학원비 > 발레복 > 장비 순이다. 성인 취미 발레 소비시장을 아는 분이라면 '대체 누더기를 입고 발레 하셨어요?'라는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발레 스튜디오에서 땀을 줄줄 흘리며 입는 천 쪼가리에 불과한 발레복도 '사계'의 구분이 분명히 있다. 수영복 같은 캐미솔 타입이라도 여름에는 레오타드 안쪽 전면에 안감이 있는 것은 수업 두 시간이 고난의 시간이라서 안감이 없는 것이 필요하고 겨울에는 레오타드 위에 상의 워머를 두 겹 정도 입고, 무릎과 발목을 데워주는 워머와 그 위에 긴 기장의 바지 워머도 필요하다. 발가락, 뒤꿈치, 발목 같은 부상당하기 쉬운 곳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부츠를 신고 몸풀기를 하기도 한다. 어디 이 뿐인가. 레오타드를 사면 그에 맞는 스커트와 쇼츠를 사고 날씨가 바뀌면 워머를 사고 그것들을 걸어 놓을 옷걸이를 사고 천 슈즈, 타이츠, 포인트 슈즈와 그 부수적인 용품들이 끝도 없다.
발레를 하지 말 걸 그랬나, 레오타드를 입지 말 걸 그랬나 생각이 들 법도 하다. 하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무 빠져버렸고 이것을 뺀다면 나는 그저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남편의 퇴근만을 기다리는 그저 그런 나였을 테다. 그것보다 더 발전적인 나로 거듭나는 비용치고는 꽤나 합리적인 소비였다고 중간정산을 해본다.
1. "오늘 레오타드 왔으니까 봐주는 거야, 알겠지?"
초코가 묻은 것은 청양고추라도 먹을 기세인 우리 집 딸내미, 줄이자고 약속을 해도 자꾸만 어긴다. 학교에서 학원으로 가는 무더운 여름날의 하굣길에는 아마도 민트 초콜릿 칩 스무디를 참을 수 없었나 보다. 초콜릿 마니아 내 딸내미, 엠앤엠즈까지 먹었단다. 달걀 프라이도 익혀버릴 만큼 달아오른 아스팔트 열기처럼,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참아냈다. "오늘 레오타드 온 날이니까 봐주는 거야, 알겠지?"
잔뜩 혼이 날 거라고 주눅 들어있던 딸이 금세 안도의 활짝 미소를 드러냈다, "레오타드 오는 날은 용서받는 날이네?"
2. "레오타드 왔어?"
아들이 집에 돌아왔다. 도보 3분 거리에 있는 학교에서 오는 길이 얼마나 더웠는지 얼굴이 반을 쪼갠 수박의 핵 빛깔이다. 너무 귀여워서, 우리 아들 왔느냐며 안아줬더니 아들은 대뜸 한 마디 한다. "엄마,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레오타드 왔어?" 요즘 내가 웃는 날이 많은 것은 레오타드를 담은 택배 상자만은 아닌데, 아들내미의 시선에서 나는 레오타드 광이었나보다. 그래, 오늘 레오타드가 오긴 왔었지.
요요에 푹 빠진 아들이 에펠탑 기술을 익히느라 요요 줄이 삭아서 끊어졌다. 요요 줄을 구매하며 파란 야광빛이 나는 요요 하나를 같이 주문했더니 도착한 그 택배 상자를 풀며 까꿍 놀이하는 신생아처럼 좋아했다. "엄마, 정말 고마워. 난 또 레오타드인 줄 알았는데, 엄마 너무 좋아."
'엄마 레오타드도 곧 도착할 거야.'
3. "차라리 발레를 가."
일주일에 발레 클래스 7번을 듣다가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그래서 횟수를 줄이니 삶의 낙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고관절이 아파서 홈트를 할 수도 없는 상황에 신경질이 났다. 화장실 바닥에 물 뿌리는 아들, 여기저기 자신의 발자취를 소지품으로 표시하는 딸, 땀 묻은 옷을 세탁실에 내놓지 않는 남편, 여기저기 놓여있는 물이 반쯤 담긴 물컵들, 모두가 눈에 거슬린다. 나는 그것들을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해댔다. 발레를 못해서 심술이 난 것이다. 이럴 거면 차라리 발레를 가, 백 퍼센트를 못 하더라도 양해를 구하고 반만 해도 되잖아, 집에서 짜증 내지 말고. 이렇게 말하는 가족은 없지만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차라리 발레를 가."
그래, 차라리 발레를 가자. 잔소리와 짜증으로 아까운 내 시간을 축낼 바에는 발레 스튜디오에서 땀을 내는 것으로 내 시간을 채워보자.
요 몇 달 사이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대화와 풍경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나는 침대나 소파에 늘어져 있었을 텐데 대신 자세가 곧아졌고 얼굴 표정이 밝아졌다. 운동으로 활기찬 엄마와 아내의 모습이다. 물론 지출이 있다, 그렇다고 다른 취미나 운동에 비해 많이 드는 비용은 절대 아니다.
운동으로 흘린 땀에는 내 안의 더러운 에너지와 신경질이 담겨있다. 이것들이 빠져나간, 홀가분하고 반듯한 마인드로 무장하고 나면 내 주변의 신경을 돋우는 것들이 작은 점처럼 보인다. 이 모든 것의 화룡점정, 기승전결은 레오타드. 레오타드와 스커트 30벌을 걸 수 있는 옷걸이가 다 찬 걸 보니 이제 멈출 때가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발레 말고는 외출할 일이 없는 나는 수업이 없는 날에 특히 더 신경이 곤두선다. 그 짜증을 다 받아주고 있는 딸, 아들, 남편에 감사하며 스커트가 예뻐서, 기분이 안 좋아서, 여름이 지나가서, 가을이 와서,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온갖 핑계와 변명으로 장바구니에 발레복을 담는다. 이것이 도착할 때 즈음이면 나는 또 평온을 찾는다. 아마도 이건 발레가 허락한 고해성사일까.
먹지 않기로 한 초콜릿을 몇 배로 먹은 딸
체중관리 중인 아들의 줄지 않는 식성
내가 요리를 맛있게 해서 야식을 끊을 수가 없다는 남편
레오타드를 사기 위한 나의 온갖 변명과 핑계
레오타드가 네 죄를 사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