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엇 뮤지컬 국내 초연 때 빌리 역으로 무대에 섰던 1대 빌리. 그는 동아 무용 콩쿠르, YAGP, 프리드 로잔 등 국내외 무용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주목을 받으며 성장기를 보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유명한 발레스쿨에서 수학할 수 있었음에도 그 기회를 내려놓고 그는 선화예중, 고를 거쳐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했다. 발레리노의 수명은 짧고 무대의 기회는 적으므로 발레단 입단을 선택한 걸로 보인다. 그러던 빌리는 작년 큰 부상으로 아주 긴 시간을 재활에 보냈다.
세월도 부상도 무심하다, 발레 무용수들에겐.
'어차피 썩어 문드러질 몸, 원 없이 발레 할래'가 나의 최신 모토인데, 그랑 줴떼나 점프를 할 때 선생님이 종종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와 심각하게 속삭인다.
'이러다 무릎 나가요, 플리에 깊게'
어쩔 때에는 나를 진정시키려고 '진짜 큰일 나요, 플리에를 깊이 넣어야 높이 뛸 수 있고 착지할 때도 플리에를 꼭 해야 다치지 않아요.'라고 진심을 담아 얘기한다. 인풋이 들어오면 그대로 아웃풋이 되는 시기가 있다, 이 말은 즉 나는 이 시기를 한참 지났으므로 알아는 들었을지 몰라도 실천에 옮기기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말이다. 어차피 죽으면 없어질 몸, 발레 할 때 원 없이 해보자고 마음먹으니 점프 후 착지할 때 플리에를 안 해도 '아이코, 또 플리에 놓쳤네. 뭐 어때.' 이 생각이 먼저 든다, 어리석게도.
건강하게 백발노인이 되어서도 발레를 하겠다는 다짐을 지키려면, 아무래도 선생님 말을 듣는 편이 나을 텐데. 고집쟁이 40대 회원은 알아들었다고 고개를 끄덕여도 실천은 하지 못한다. 아마도 시선, 순서, 발동작에 정신이 팔려 멀티플레이를 못 한 듯하다. 선생님은 그랬다, 다 못 챙길 바에는 하나라도 잡고 가자고. 그래서 나는 플리에를 놓쳤다, 가장 중요한 그것. 분명히 하자면 나는 알아들었고 선생님의 지도대로 하고자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변명을 하고 싶다. 20대 젊은 발레리나도 내 나이가 되면 나를 이해해 주겠지.
사실, 작년에 햄스트링을 다쳤었다. 스트레칭이 잘 되는가 싶어 다리를 뻗은 채 배꼽을 바닥에 닿게 하려다 근육에서 퍽 소리가 났다. 정형외과 의사는 '운동도 원래는 심하게 하면 안 되지만, 운동을 안 하시더라도 나이가..큭큭큭'이라고 뒷 말을 흐렸다. 운동과 별개로 원래 아플 나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배우신 분이 꼭 말을 그따위로 했어야 했느냐고 속으로 울화통이 터졌지만 이내 삭혔다. 틀린 것 하나 없는 의사의 말에 혼자 화가 나서, '그래. 내가 이제 너 안 보려고 안 다친다. 내가 다치나 봐라.'라고 마음먹었다. 다친 지 1년 3개월이 지났지만 다친 부위 주변 근육 운동을 열심히 한 탓에 더 이상의 부상은 없었다. 더욱이 스트레칭은 생애 최대의 각도를 갱신하고 있고, 다치지 않으며 발레하고 있다, 그 의사를 다시는 안 만나려고.
1년에 한 번 '월드 발레 데이'라는 것이 있다, 정해진 날짜는 없는 것으로 알지만 대게 10월이다. 각국의 발레단에서는 리허설 실황, 실제 클래스 영상을 실시간으로 공개한다. 영국 로열발레단 연습 실황 중 백발 단발의 어깨가 굽은 발레리나, 올가 이브레이노프 수업을 봤다. 딸, 아들, 손주 뻘 되는 유능한 발레리나, 발레리노들을 차분히 지도하는 모습에 스스로 숙연해졌다.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느린 속도로 걸으면서도 발목 턴아웃, 어깨 내리기 같은 발레리나의 습관이 몸에 베여있었다.
이브레이노프 나이까지 발레를 하려면, 선생님 말을 듣고 몸으로 아웃풋을 실천해야 한다. 플리에는 더 깊게, 그만큼 높이 뛰어오르고, 턴아웃으로 착지해서도 깊게 플리에. 그리고, 의사 말을 들어야 한다.
아침 발레 수업이 있는 날이다. 일찍 일어나 아이들 아침식사로 채소를 듬뿍 넣은 김밥을 말아주고, 나는 꼬투리 네 개를 먹었다. 바버샵에서 한 머리가 마음에 든 초등학생 아들은 아침부터 거울을 보고 드라이를 했다. 포마드를 두 손가락에 살짝 찍어 머리에 바르며 자신의 외모에 감탄하는 모습까지 완벽한 아빠 아들이다. 딸내미를 차에 태워 학교로 데려다주고 오니 아들내미가 현관에서 나왔다. 오랜만에 아들내미 손을 잡고 학교에 같이 걸어갔다. 아들은 정이 많다. 내가 손을 잡자고 내밀면 자신의 손가락을 모두 펼쳐 깍짓손을 잡는다. 더운 여름 아침에도 아들의 살과 맞닿은 습기가 기분이 좋다.
텅 빈 집으로 돌아와 아침잠을 잔 뒤 수업시간에 맞춰 일어나 준비했다. 내 수준에는 조금 높은 레벨 수업이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높은 레벨은 웜업이 짧아서 다치지 않도록 더 조심해야 한다. 10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몸을 풀고 바 워크가 시작되었다. 바 워크 순서가 길고 턴이 있어서 중심을 못 잡는 나에게는 그저 몸이 달아올라 땀이 분수처럼 쏟아지는 시간이다. 센터 워크에서는 스텝이 긴 왈츠와 아다지오, 쉐네 네 번에 파드샤로 마무리. 이렇게 허우적거리다 보면 어느새 등줄기에 땀이 뚝뚝 떨어지고 이미 정해진 수업시간은 지난 지 오래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출입문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연습하고 가세요.'라며 회원들의 귀갓길을 막는다.
'선생님, 배가 고파서요. 다음에 더 연습할게요.'하고 탈출에 성공했다.
어차피 썩어 문드러질 몸이라서 원 없이 발레 한다며, 일차원적인 배고픔에 몸을 사렸다.
평온한 아침, 잠이 덜 깬 눈으로 김밥을 먹는 아이들,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며 자신의 외모에 감탄하는 아들, 교복에 향수를 뿌리는 딸, 아이들의 학교를 함께한 등굣길, 달콤한 아침잠, 등줄기에 흐르는 땀, 허기진 배, 출입문을 막아서서 연습하고 가라는 선생님의 잔소리.
이 모든 것을 내 몸에 기억하고 싶다.
이브레이노프 나이까지 발레 하는 내 몸에 차곡차곡 쌓고 싶은 오늘 아침에 일어난, 내 발레 일상.
취미 발레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동작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큰 부상을 당할 리도 없다. 더욱이 나는 아무리 연습해도 발레리나가 될 수 없다. 1대 빌리처럼 어느 발레단에 속한 직업 무용수도 아니다. 만약 어디 한 곳이 고장 난다면 학원을 쉬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어차피 썩어 문드러질 몸, 원 없이 발레 할래.'는 내 머리 어느 부분에서 나온 비장함일까.
다치면 이 좋은 발레를 쉬어야 하니까, 그래.
그저 오늘 이 아침의 발레 일상을 기억하자.
오늘이 좋았다면 오늘 같은 내일을 하루 더 만들자.
백발의 할머니 나이에 이를 때까지 그 하루를 계속 만들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