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얼굴이 동안이어서가 아니라, 엄마에게 물려받은 꿀피부가 빛이 나서가 아니라, 나를 오래 보아왔던 직장 선배들은 '네가 벌써?'라고 내 나이를 묻고는 흠칫한다. 이어서 아이들의 학년을 말하면 조금 전 놀랐던 것의 몇 배를 부풀리기도 한다.
학교에서 바로 학원으로, 저녁은 학원 근처에서 해결하고 밤 중에 하교하니 아이들이 커가면서 사색에 잠길 시간이 많아졌다. 1분에 한 번씩 엄마를 불러대던 아이들이 집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나의 24시간은 20대나 지금이나 같은데, 지금은 마치 신께서 5시간쯤을 더 할애한 것 같다. 자연스레 발레 클래스를 더 늘렸고, 요리를 더 많이 했다. 그리고, 다시 도서관을 다니게 되었다.
겨우겨우 석사 졸업을 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 예술, 인문학, 철학, 법학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고 도서 검색 분야를 확장했다. 과거의 나는 발레를 배우니까 인체해부학을 읽거나, 부족한 처세술을 책으로 채워야 한다고 도덕경을 읽는 식이었는데 지금은 내가 존경을 표하게 된 학문의 한 인물을 파고 싶다는 지경에 이르렀다.
헤르만 헤세, 시인으로 알려졌지만 음악을 사랑한 예술가.
이제 알기 시작한 인물이지만 현재 내가 알아낸 그는 오선지 위의 음표를 글로 풀어나간 번역가였다.
"음이 공중으로 달아나고 폭풍 같던 세상이 먼 곳으로 사라진다
지나온 시간들이 날카롭게 불타오르며 되살아나는
소중하지만 일찍이 사라져 버린 것들을 다시 손에 쥐고 싶은 마음"
비록 이 시는 쇼팽의 녹턴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해석은 독자의 마음이니.
나는 일렉트리시티 한 장면을 떠올렸다.
너에게 춤이 뭐냐고 물었을 때 뭔가가 타오르는 느낌이 몸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온다던 빌리
나에게 발레가 없었다면 수많은 OTT서비스와 동영상 플랫폼의 한가운데서 허우적대고 있었을 텐데, (누군가 이 말을 들으면 내 발레 실력에 대해 오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뚝딱거리는 몸을 용케도 이끌고 스튜디오에 나가 선율에 내 몸을 맡긴다. 그곳에 도착하면 내가 어떤 바보 같은 몸짓으로 발레 동작을 해내도 손으로 잡아주고 몸으로 일으켜주는 발레리나들이 있다. 이 나이에 이런 안식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었을까.
아침부터 짜증을 쏟아내는 나를 똑 닮은 딸내미, 회사, 사람들의 무례함, 무관용,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일, 이런 것들이 훑고 지나간 내 하루는 검게 타버린 숯 한 덩어리 같을 때가 있다. 햇살이 밝았는지, 바람이 신선했는지, 아니면 잠잠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시간만 흐르는 통에 그냥 부서져 없어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지만 다시 나를 기다리는 집안일에 나를 던진다.
다시 무언가에 열정을 쏟을 수 있을까, 다시 누군가에게 불타오르는 사람일 수 있을까, 다시 나는 나답게 빛날 수 있을까. 헤세가 말한, 소중하지만 일찍이 사라져 버린 것들을 다시 손에 쥐고 싶은 마음이 누구보다 간절하다.
이제 발레와 함께 한 지 세 번째 사계를 맞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발레를 너무나도 못 한다. 탄광촌 열한 살 빌리처럼 몸이 가볍지도, 재능이 있지도, 나이가 어리지도 않다. 그렇지만 발레를 하면 뭔가가 타오르는 느낌이 몸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온다.
아주 간단한 아다지오 순서를 틀려서 한 바탕 웃고는, '뭐 어때요 즐거우면 그만이죠.'라고 둘러대는 나를 보고 선생님은 맞장구를 치고 공감해 준다. 발레단에 속해 있는 내 선생님이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평생 발레만 했는데 아직도 안 되는 동작이 있고 자신보다 훨씬 잘하는 사람을 보면 괜히 작아진다고.
나는 발레를 잘할 리가 없다, 나의 발레는 나아지겠지만 아예 발레를 모르는 사람들이 봤을 때 '봐줄 만한' 발레에 이르기는 힘들다. 나와 발레가 맺은 협정, '뭐 어때, 즐거우면 그만이지.'가 그 합의점이다. 그 안에서 나는 열정을 찾았고 그거면 된 거다. 그 불씨가 꺼지지 않을 만큼만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다시 열정으로, Electric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