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인사발령, 명절 보너스, 1년 사업 계획 수립, 홍보, 사업 수행, 성과급, 세금 환급, 근속 수당, 하반기 인사발령, 여름휴가, 명절 보너스, 홍보, 사업 마무리, 성과 평가, 연말정산
이걸 거치면 회사의 사계절이 지난다. 보람된 건들이 더 있을 텐데 늘어놓고 보니 나는 역시 회사에 다니는 이유가 급여 때문인 가보다. 물리적인 이해관계, 오래 근무할 수 있었던 비결은 역시나 월급.
추석이 지나고 늦가을에 접어들면 발레 학원에서는 내년 상반기에 있을 콩쿠르 준비가 시작된다. 작품 선정, 의상, 콩쿠르 멤버 구성으로 연습에 돌입한다. 주위에서 이런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올해 초, 스위스 로잔 콩쿠르에서 우리나라 참가자가 'Lilac Fairy'로 등장한 이후 취미 발레계를 연보라색으로 뒤흔들었던 라일락 요정이 여전히 내년에도 인기일 것 같다.
이때쯤 준비하는 건 콩쿠르 말고도 하나 더 있다.
회사에서 후배들이 며칠 동안이나 물도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입에 단내가 나도록 단백질만 먹으며 몸을 만들길래 대체 무슨 이유인지 물었었다. 아침에 본관 건물에 들어서면 닭가슴살 냄새가 진동했었다. 얼굴에 기름한 방울 없이 말할 때마다 주름이 생기는 모양새가 안쓰럽기까지 했었는데 바디 프로필을 찍어야 해서라고 했다. 바디 프로필은 여전히 유행인가 보다, 선배 후배 할 것 없이 바프를 찍은 사람들은 다들 배를 까고 찍은 사진을 SNS 프로필에 걸어두었다.
발레에도 발레 프로필 사진이 있다, 보통 발레에 입문한 지 몇 년을 기념해서 찍는데 여름이나 겨울 방학을 이용해 많이 준비한다. 이 분야에 유명한 발레를 전공한 사진작가님들이 있다. 발레 프로필은 일반 사진작가와의 촬영을 대게 추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동작을 바르게 잡는지, 발끝이 살아 있는지, 시선의 위치와 몸 방향, 그리고 무엇보다 풀업이 되었는지를 눈으로만 봐도 알 수 있고 그 찰나를 사진에 담아야 하는데 웨딩, 가족사진, 증명사진, 일반 프로필 사진작가님들과의 촬영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나도 더 나이가 들기 전에, 턱 밑에 주름을 감출 수 있을 때, 몸에 처지는 살보다 근육이 조금 더 남아있을 때, 동작을 잘 해낼 수 있을 때 발레 프로필을 찍고 싶었다. 구체적인 일정을 잡지는 않았지만 1년 내 촬영으로 대략 계획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발레 수업에서 매 순간 기본 동작에 충실하는 것, 새로 배운 동작은 나머지 공부와 독학으로 반드시 몸에 익히는 것, 내게 가장 부족한 상복근, 하복근, 중둔근 훈련은 기본으로 하고 다음 것들을 시작했다.
- 발레 수업이 있는 날에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대신 계단 오르기를 필수로 한다. 고관절과 대퇴이두근 통증으로 발레 수업을 주 7회에서 주 4회로 줄였다, 사실 이 때문에 집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나 스트레칭이 제한적이었다. 수업이 있는 날 20층 계단 오르기, 이 과정에서 햄스트링을 늘려주었다.
- 내 몸과 실력 수준에서 표현 가능한 포즈들을 사진첩에 모아둔다. 레퍼런스로 활용할 포즈를 모으는 것인데, 발레 숍 모델들의 포즈를 자세히 보면 '아, 이렇게 해야 중심이 잡히겠구나.', '아, 선생님이 등근육을 잡으라던 말씀이 이거구나.' 눈에 들어온다. 모델컷을 보고 따라 했을 때 내가 하면 뱃살이 접히는 동작이면 과감히 빼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다시 한번 느끼는 만유의 진리가 있다. 패션의 완성뿐 아니라 발레의 완성도 사실 얼굴이다. 발레 숍 사진 컷에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는 발레복 코디와 색깔의 조합이다. 집에 있는 발레복이 많지는 않아도 발레 프로필을 찍기 위해 고가의 레오타드를 사고 싶지는 않아서, 코디에 도움을 받는 용도로 자료 수집한다.
- 체중관리. 마른 편이긴 하지만 이것도 근육의 문제인데 에어브러시로 팔뚝, 허벅지, 몸통 양 옆을 다듬으면 라인이 잘 나올 것 같다. 그래서 발레 프로필을 결심하고는 하루 5km 걷기를 실천하려고 한다. 공원을 빙빙 도는 것이 아니라면 도심에서 횡단보도 신호를 통과하며 5km를 걷기란 한 시간 이상이 훌쩍 소요된다. 무릎이 안 좋아서 달리기를 못하니 이것 또한 제한적인 체중관리 방법이다.
- 뱃살 공격. 최근 커피와 맥주를 모두 끊으면서 그나마 하던 군것질을 하지 않고 원래 먹는 양이 많지 않기 때문에 탄수화물까지 줄이면 연명하기 힘들 것 같아서 식이요법으로 잡곡을 시작했다. 흰 쌀을 줄이고 현미, 퀴노아, 차조를 섞으니 하루에 우리 가족 모두가 먹는 흰 쌀은 한 컵 반이 전부이고 이걸 네 명이 나눠 먹는 셈이었다. 뱃살이 줄었는지는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웠는데 발메들과 수업 후에 간간히 찍는 사진에서 몸통 라인이 조금 가다듬어진 것이 보였다.
- 튜토리얼 영상으로 동작 연습. 유튜브가 없었다면 수업시간에 휘리릭 알려주시는 난생처음 보는 무용을 어떻게 습득할 수 있었을까. 특히 느리게 재생 기능으로 턴 할 때 각 신체부위의 쓰임을 볼 때 크게 도움이 된다. 발레의 폴드 브라는 알라스콩에서 다른 동작으로 이어질 때 알롱제를 거쳐서 간다든지, 브라바에서 앙아방을 거쳐서 간다든지 하는 기본 흐름이 있는데 이것을 건너뛰면 살풀이 내지는 풍선인형이다. 이것도 튜토리얼 영상으로 캐치해서 연습한다.
회사는 월급이라는 한 달에 한번 보상이라도 있었는데, 발레는 보상이라고는 없고 좌절과 넘어짐 뿐이고 선생님의 애정 어린 잔소리는 여전히 같은 구간을 반복하고 있다. 나는 왜 이렇게 힘든 걸 계속하고 있을까.
이제 발레와 함께 한 사계절을 세 번째로 곧 맞는다. 나는 얼마나 성장했을까. 데벨로뻬 각도는 얼마나 상승했는가. 폴드 브라는 개업 환영식에 서 있는 풍선인형을 벗어났는가. 한 다리로 업해서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발레리나의 넘겨보는 시선은 얼마나 자연스러워졌나. 눈이 코에 달려야 하는데 아직 눈에 붙어 있나. (참, 새로 만난 선생님은 눈을 턱에 붙이라고 하셨다. 끊임없이 진화하는 발레리나의 눈 위치를 과연 내가 해낼 수 있나.)
발레 프로필로 중간 정산을 서둘러해 봐야겠다, 내가 얼마나 나아졌는지.
* 발레를 주제로 한 커뮤니티나 SNS를 보면 얼굴이 찌푸려지면서도 공감하는 글들이 있다. 취미 발레인들의 콩쿠르 영상에 '저렇게 못해도 콩쿠르에 나가는 거야? 상도 받았네.' 뭐, 이런 류의 글이다. 언뜻 보면 그렇다, 에스메랄다 영상을 예로 들면 한 발을 업 한 상태에서 다른 한 발을 정수리까지 차야하는데 늦은 나이에 시작한 취미 발레인이 그 지점까지 다다르기는 힘들다. 발레리나의 반, 또는 3분의 2 지점까지만 도달했다가 내려오는 다리를 보고, 허우적거리는 폴드 브라를 보고, 짧고 뭉툭한 몸을 보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공감한다. 감안해서 봐달라, 이해해달라는 읍소는 아니다. 업 서있는 다리를 턴 아웃한 상태에서 풀업을 지키며 그 지점까지 다리를 올린다는 것은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 수많은 땀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섣불리 '판단'은 안 했으면 좋겠다.
실력이 모자라 엄두도 내지 못하지만, 내년 콩쿠르 준비에 들어간 분들의 건승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