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쇼핑 심리학 에세이 (5)
"오빤 여자를 잘 모르는 거 같아"
아주 오래전 누군가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난 아마도 눈만 꿈뻑였던 것 같다. 집에 여자라고는 어머니가 전부고, 사촌들도 대부분 남자여서 그렇다는 식의 변명은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동안 여자들하고 어울릴 기회가 별로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도 찌질하게 느껴졌다.
약간 억울한 마음은 있었지만, 아니라고 부인할 수가 없었기에 결국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그 상황에서 그럴싸한 답변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여자를 잘 모른다는 소리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씁쓸한 것은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는 점이다. 이런저런 여자들을 만나면서 나는 여자라는 존재를 파악하는데 소질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내게 블랙홀 바깥쪽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내려고 하는 시도와도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여자를 잘 모른다고 질책을 받던 그 남자가 고객의 80%가 여성인 홈쇼핑 업계에 몸을 담게 되었으니, 세상일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처음부터 순탄하게 일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신입으로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내가 쓴 자막을 훑어보던 한 여자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홈쇼핑 방송에 노출되는 거의 모든 자막은 PD가 직접 쓴다. 홈쇼핑 PD는 카피라이터의 역할도 해야 한다)
"표현이 좀 딱딱한데. 조금만 더 여성스럽고 부드럽게 다듬어봐."
그 말을 듣고 매우 난감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여성 고객을 겨냥해서 최대한 부드럽게 쓴 자막들이었기 때문이다.
당황한 나는 다른 여자 PD들이 쓴 자막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쓴 것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여성 특유의 섬세한 카피들이 곳곳에 쓰여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 부드러운 카피들을 써보려 했지만 결국 어떻게 해도 '여성스러운 카피를 흉내 낸 카피'라는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나는 결국 남녀 간의 태생적인 차이 때문이라는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한계를 인정하고 말았다.
그 당시 나의 좌절은 안타까운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사실 이것은 진화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진화심리학에서 남성은 사냥꾼, 여성은 채집자로 대변된다.
남자는 동물을 사냥해야 했기 때문에 정확한 정보와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그러다 보니 논리적, 진취적, 공격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반면 여자는 채집이라는 공동작업을 위해 관계가 중요했고, 관계 유지를 위해 감성적인 측면과 함께 언어적인 능력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상대의 감정을 재빨리 알아채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그저 하나의 학설일 뿐, 여성과 남성의 근본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둔한 내가 상사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 못 채고 있을 때, 동료 여직원들은 이미 눈치를 채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다만 하나 생기는 궁금증은 사냥꾼이 채집자의 삶을 이해하거나 채집자가 사냥꾼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지의 여부이다. 대화를 통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다 쳐도 진정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심리학 용어 중에 '쿨리지 효과'라는 것이 있다. 성관계를 맺는 파트너를 바꾸었을 때 수컷의 성적 욕망이 증가하는 현상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심리적 현상을 통해 남성의 바람기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게 여성으로부터 용인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평생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신뢰할 수 있는 남자를 찾는 것 또한 여성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능의 차이를 감안해보면 남녀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한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은 단지 상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난다면 자연스럽게 다름을 인정하게 되지 않을까.
홈쇼핑 PD를 하면서 깨닫게 된 요령이 하나 있다.
철저하게 여성이 타깃인 상품을 팔아야 할 때는 남자인 내가 직접 고객을 이해하려 하지 말고, 주변인에게 묻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어머니에게도 물어보고, 동료 여자 PD들에게도 물어보고, 여성고객들이 응답한 설문조사 같은 DATA에게도 묻는다.
그러면 적어도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자를 반드시 잘 알아야 잘 팔 수 있다는 것이 실은 큰 착각이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필요할 때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들도 필요하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가장 쉽고 명확한 길이었던 것 같다. 상대를 극복하는 것보다 상대와 협력해서 성과를 내는 쪽을 택하는 것이 삶의 지혜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여자를 잘 모르는 것 같아'라는 얘기를 듣게 되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오빠는 여자를 잘 알지 못하지만, 여자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잘 안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