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영은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았다. 기필코 오늘이어야만 했다.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마지막 기회였다. 운동화 끈을 조여매고 일어나 교복 치마를 탁탁 털어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불어넣는 기합이었다. 내달리듯 집을 나섰다. 오늘따라 유난히 바람은 시리고, 햇살은 따가웠다.
교실 문을 열자, 교탁에서 무리지어 떠드는 아이들 사이로 지원의 얼굴이 소영을 가장 먼저 맞이했다. 말간 얼굴. 소영을 따라 도로록 구르는 그 눈동자를 무시했다. 소영은 일부러 모른척 자리에 가 앉았다. 소영의 몸짓에 지원은 다시 아이들 틈새로 숨어들었다. 소영의 가방에는 밤새 길게 쓴 편지가 있었다.
이별 편지였다.
오늘따라 지원과 단 둘이 시간을 보낼 틈이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자꾸만 귓바퀴에 머물다 쏟아져내렸다.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의 흐름까지 하나하나 다 보일 정도로 더디게 흐르는 시간이었다. 소영의 온 신경은 오직 편지에 가 있었다. 지원에게 적당한 타이밍에 이 편지를 전해야 했다. 적당한 순간에, 적당히, 이별을 해야만 하는데. 적당한 이별이라니. 소영은 이별을 준비하는 여자애 치고 퍽 평온해 보였다. 아니, 초조했으면 초조했지, 조금도 슬프거나 애달픈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소영이 이렇게까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구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내일은 대현 중학교 졸업식이었다. 소영은 중학교 졸업 선물로 이별을 고하는 여자 친구가 되기 싫었다. 졸업식에 헤어지나, 그 전 날 헤어지나. 하루 차이로 이별하면서 그게 뭐가 다를까 싶지만, 그래도 예쁜 꽃다발 들고 찍는 그 졸업 사진에 소영은 지원과 연인 사이로 사진을 남기기 싫었다. 이별 편지에 마음 상한 지원이 아예 소영과 사진을 찍고 싶지 않아 하면 더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꽤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이별이었다. 시한부 연애. 처음부터 소영은 지원과 끝이 정해진 것처럼 연애를 했다. 그걸 몰랐을 지원이 아니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상관 없었다. 그저 소영이 좋았다. 곁에 있을 수 있으면, 가까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무엇이든 좋았다. 웃을 때 가늘게 늘어지는 눈꼬리, 시원하게 터지는 웃음 소리, 필기하는 가느다란 손가락의 움직임, 무언가에 집중할 때면 가늘어지는 입술 ... 지원은 소영의 사소한 모든 것들을 좋아했다. 길을 걸을 때 쉽사리 소영의 손을 잡고 걷지 못 해도, 다른 스킨쉽이나 키스를 허락해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어차피 그런 것 때문에 소영을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오늘 헤어지는 거지?"
소영이 오늘 지원에게 이별을 고할 거라는 것 쯤은, 예상한 바였다. 그렇다면 지원이 먼저 해야 했다. 종례를 앞둔 시간, 왁자지껄 부산스러운 아이들 사이, 홀로 책상에 엎드려 있는 소영에게 지원이 먼저 다가가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소영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지원이 어느새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소영과 지원, 둘이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에 관심을 갖는 아이들은 딱히 없었다. 소영은 지원의 질문을 이제야 이해한 사람처럼 어버버, 고개를 끄덕였다.
"음, 대신 소원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
"소원?"
뚝딱거리던 소영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미간을 좁히며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원은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마지막이잖아." 그 한마디에 소영은 다시 기가 죽었다. 어제 밤 늦게까지 쓴 편지를 굳이 전해주지 않아도 되고, 어떻게 이별의 물꼬를 터야 하나 고민하는 수고는 덜었는데 소원이라니 덜컥 부담이 몰려왔다. 사귀는 내내 자신에게 무엇 하나 요구하지 않던 지원이었다. 그런 지원이 이별의 순간에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요구한 소원이니 머릿속이 복잡할 만도 했다.
"한 번만 안아보자."
"뭐?"
소영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안그래도 큰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동그래졌다. 그 다음은 더 가관이었다. 소영이 손 쓸 새도 없이 지원의 품에 폭, 쓰러지듯 안겼다. 영락없이 어미새 품에 안긴 아기새였다. 달큰한 꽃 향이 풍겼다. 소영의 어깨를 감싼 지원의 손 끝이 조금, 떨렸다.
"자, 반장. 종례하자, 종례! 거기! 아이고오~~~ 저 기집애 둘은 떨어지고!"
담임 선생님의 등장과 함께 지원이 소영에게서 스르륵, 썰물처럼 흩어지듯 빠져나갔다. 소영의 짝이 자리에 와 앉은 뒤에도 한동안 소영은 기울어진 몸을 바르게 돌리기 힘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몸도, 머리도 제대로 인지하기 힘들었다. 달큰한 꽃 향기만 빙빙 맴돌았다. 어지러웠다.
소영의 비밀스러운 첫 연애가 끝나고, 첫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