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설
하 그놈의 사과. 빌어먹을 사과. 쓸데없이 빨간 윤기가 철철 흘러넘치던 탐스러운 사과. 사과 때문이다. 아니지, 공복 때문인가. 어차피 이렇게 죽을 거였으면 좀 더 마음대로 살아볼 걸 그랬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더니 딱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차피 오래 못 살고 이렇게 죽을 거면 그 때 사냥꾼 손에 죽는 편이 훨씬 더 낫지 않았을까.
[백설, 성 너머 숲 속에서 시신으로 발견. 사과 먹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 그녀 곁에는 한 입 베어 문 사과가 굴러다녀.]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이런 소문들이 널리널리 이웃 나라까지 삽시간에 퍼지겠지. 이보다 쪽팔리는 일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젠장.
근데 잠깐만. 나 안 죽었나? 왜 자꾸 떠들 수 있지? 그냥 기절한 건가? 유체이탈? 난쟁이들은 언제 돌아오지? 빨리 와 봐요, 나 아직 안 죽은 것 같아. 도와줘요!
# 왕자
대부분은 살인이 마지막 코스라던데, 나는 좀 다르다. 살인이 곧 시작이다. 꺼져가는 생명을 에피타이저 삼아 실컷 누리다보면 입 안 가득 군침이 싹 돈다. 제대로 취할 준비가 된다. 더없이 무기력한 몸, 여전히 말랑한 피부, 적당하게 남아있는 온기, 초점이 사라져버린 눈 ... 그 중 최고는 제멋대로 움찔거리는 근육의 수축 운동이다. 죽음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듯이 내 몸을 잔뜩 조여 오는 질. 젖어드는 아래. 너도 좋은 거야, 그렇지?
오늘은 운이 좋다. 누군지 몰라도 복 받을 거다. 손 안 대고 코 풀기가 따로 없다. 부러 나를 위해 식사를 차려둔 것만 같다. 새하얗게 질린 것만 같은 투명한 피부만으로 이미 몸이 딱딱해지는 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입술부터 차근차근 시작해 볼까나.
어린 시절, 한번 쯤 읽어봤을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말이에요.
“이웃 나라 왕자님의 입술이 백설공주의 입술에 닿는 순간, 공주는 눈을 번쩍 떴어요.”
그 내막에 뭐가 숨어있을 지, 아무도 모를 일이지요.
잔혹동화 버전으로 각색한 백설이야기 한 컷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