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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월

by 밤비


순식간에 한 달이 다 가버렸다.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도망치듯 떠나왔거늘, 내일이면 이곳에서 나는 다시 또 떠나야 한다.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는 말에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냥 김하진 존재 자체가 잠시간 잊힐 수 있는 공간, 살아있는 생명 그 무엇과도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았다. 그 때 바로 여기를 떠올렸다. 역시 악마는 악마인가, 불가능은 없었다. 내 나이 스물여덟, 목숨 1년쯤이야 기꺼이 바칠 수 있을 정도다.



장장 5년이었다. 당연히 다음은 결혼일 줄 알았다. 머지않아 우리의 신혼집이 될 공간에서 다른 사람의 흔적을 마주했을 때 피가 한순간에 식어버리는 것 같기도, 단숨에 타버릴 것 같기도 했다. 아직 일상 주름도 채 잡히지 않은 새하얀 시트 위에서 너는 그 사람과 몇 번을 뒹굴었던 걸까. 차라리 엄청나게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거나, 모르는 사이 최음제를 섭취했다거나, 욕정에 눈이 멀었다거나 그마저도 아니면 상대를 여럿 바꿔가며 난잡하게 놀았다거나 ... 어떤 이유에서건 하룻밤 불장난 같은 일회성 섹스였더라면 충격이 덜 했을까.



예식장, 드레스 업체, 스튜디오, 여행사 ... 차례차례 돌아가며 전화를 돌렸다. 물러야 할 돈과 받아야 할 돈을 정리하는 건 오히려 쉬웠다. 여기저기 흩뿌린 청첩장을 회수해야 했고, 결혼식이 취소되었음을 알리는 동시에 동정과 연민 혹은 호기심의 눈초리를 견뎌야 했다. SNS를 통해 어디까지 퍼져있을지 모를 내 결혼식 사진들은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어 아예 계정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 모든 과정이 지옥 같았으므로 어디로든 사라지고 싶은 심정은 정말이지 딱,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한없이 평온하다. 대체로 어둠이 지배하는 공간. 보글거리는 물방울 소리를 배경 삼아 쉴 수 있는 좁고 말캉한 주머니. 영영 떠나기 싫다. 이곳에 계속해서 머물고 싶다. 여긴 어차피 내 거잖아. 원래 내가 있던 태초의 공간으로 왔을 뿐이잖아. 아니지, 다음 달이랬던가. 여기도 비워줘야 할 때가 다 됐으니 피차일반인가. 더러운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하는 걸까, 이대로?




악마는 입맛을 다셨다. 인간이 택하는 기상천외한 장소들을 보기는 했지만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 것은 하진이 처음이었다. 하진이 태아를 택한 건 신의 한 수일까 아니면 신의 실수일까. 하진은 지난 한 달 엄마의 자궁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무료하다면 무료하고,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시간이 순리처럼 흘렀다. 다시 새로운 곳으로의 한 달을 제안할 때인가 고민하던 그때였다. 악마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하진, 그러니까 하진이 되기 전 태아는 제 손으로 탯줄을 목에 감고 있었다. 단단하고 견고한 밧줄처럼 탯줄은 점차 하진의 목을 옥죄어갔다. 누구보다 평온한 태아의 표정을, 악마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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