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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

by 밤비


그런 날이 있다. 몇 번을 묶어도 자꾸만 풀리는 운동화 끈, 작은 움직임에도 쉽게 엉키는 머리카락, 잔뜩 심혈을 기울인 정리가 무색하게 금새 헝클어진 가방 속, 눈물이 흐를 만큼 눈부신 햇살 같은 그런 날.

자주 찾던 까페, 늘 우리가 앉던 자리. 오늘도 어김없이 그 자리에 앉아 어딘가 통화를 하고 있는 너를 보며, 까페 문을 밀고 들어갔다. 따뜻한 까페 안 온기보다 짙고 무거운 커피향이 더 성급하게 마중 나온다. 커다란 유리로 만들어진 까페 문이 무척 무겁다. 힘겹게 온 몸을 기대며 안으로 한 발 더 발걸음을 들였다. 예나 지금이나 같은 무게의 문일 터인데, 오늘 내가 밀어내는 것은 이 문 만은 아닌 듯 하다. 어느새 내 몸을 한 바퀴 돌아 나온 커피향이 이미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바람결에 가볍게 흩어졌다.

너는 고개를 들어 나를 확인하고는 통화 중인 핸드폰을 살짝 흔들어 보인다. 괜찮다는 내 입 모양에 다시 테이블 위 수첩으로 급히 너의 고개가 돌아간다. 스치듯 건네는 짧은 눈 인사. 다정한 듯 다정하지 않은 너. 내가, 사랑하는 너.

긴 시간을 함께였다. 시작을 찾지 못할 정도로 오랜 옛날부터 늘 내 곁에 있던 너였다. 더없이 달콤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따뜻함과 다정함을 끌어모아 생명체를 만든다면, 그건 바로 너 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분명 그랬다.

커피 두 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언제 어느 때나, 그 어떤 테이블에서도 같은 곳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던 우리 둘은 없다. 통화를 끝낸 네가 작은 티스푼으로 커피를 휘저었다. 눈치없이 예쁘게 그려진 하트 모양의 라떼아트가 일그러진다. 커피를 한 모금, 천천히 삼킨 너의 눈동자가 스르르 바깥을 향한다. 너의 까만 눈동자에 가득 담겨 찰랑거리던 나는, 이제 없다. 익숙한 정적이 흐른다.

"우리, 헤어지자."

숨을 내뱉듯 터져나온 익숙한 음성에 입을 다물었다. 어, 내가 한 말이라고, 지금, 이거?

너의 눈이 천천히 나를 향한다. 전혀 놀란 것 같지 않다. 오히려 평범한 인삿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태연하고 담담한 그 표정에 바짝 약이 오른다. 헤어지자, 내가, 이별을 고했다. 곪아버린 상처를 터뜨리는 일이었다. 우리 둘 다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를 상처. 그럼에도 누구 하나 나서서 적극적으로 치료를 하지도, 그렇다고 덮어놓고 무시하지도 않은 채 그저 공기 중에 꺼내어 내버려둔 상처. 곪을 만큼 곪아서 이제 작은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터져 흘러내릴 것만 같은 그런 상처.

언제 어느 때 만날 지, 어디를 갈 지, 무엇을 할 지, 무엇을 먹을 지, 심지어는 만남을 지속할지 말 지까지도. 그 모든 일을 결정하는 사람은 언제나 내가 아니라 너일 것이라는 암묵적 합의가 우리 사이에 있었으므로. 적어도 그 암묵적 룰을 깬 나의 이별 선언에 놀라는 척이라도, 내가 먼저 쏘아올린 이 불덩이를 어찌 받아내야 할 지 몰라 곤란한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 아니구나. 암묵적 합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나의 이별 선언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 결국 최종 결정 권한은 이미 너에게 넘어가 있다.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아무래도 웃음보다 눈물샘이 먼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니까 기다린 것 같잖아, 꼭. 참을성 없고 미숙하고 서투른 쪽은 또 내가 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이 마지막 순간마저도 너는 다 계획한 사람 같다.

너는, 끝까지,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구나.

식어버린 커피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네가 더 시리고 차갑다.

그런 날이 있다. 몇 번을 묶어도 자꾸만 풀리는 운동화 끈, 작은 움직임에도 쉽게 엉키는 머리카락, 잔뜩 심혈을 기울인 정리가 무색하게 금새 헝클어진 가방 속, 눈물이 흐를 만큼 눈부신 햇살 같은 그런 날.

내가 네게 먼저 이별을 꺼내는 날, 너와 내가 영영 헤어지는 그런 날. 내 생에 전혀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런 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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