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
검은 파도가 작은 아이를 삼킨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재빠르고 확실한 움직임이었다. 성난 파도가 물러간 자리, 바다는 새하얗게 부서지는 포말로 고요한 작별 인사를 남겼다. 스스로 완성한 모래성을 뿌듯하게 바라보던 그 반짝이는 두 눈망울이 기억나지 않는다.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도, 오금이 채 펴지지 않아 어정쩡하게 접혀 있던 다리도, 모래알이 가득 박힌 작은 발바닥도 모두 사라졌다. 물방울 소리도, 비명도 없이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고요한 바다만이 눈 앞에 가득하다. 정미는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렸다.
아니야, 아니야 ...
검은 파도는 조용히 정미의 무릎과 발등을 핥았다. 얼음장같은 한기에 소스라치게 놀란 정미의 등에 툭, 작고 둥그스름한 무릎이 하나 닿는다. "엄마" 아이가 주저앉은 정미를 내려다본다. 윤슬처럼 반짝이는 눈망울. 온 세계가 환히 빛난다. 조금도 젖지 않은 아이의 몸을 어루만지는 사이 정미의 눈가가 젖어든다. "엄마?" 아이의 목소리가 한 번 더 귓가에 울린다. 입을 열어보지만 밖으로 흘러나오는 소리는 없다. 정미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아이를 품에 당겨 안았다. 품에 들어온 아이가 일순간 바스라지듯 흩어지는 걸 느끼며 정미는 다시 흐느낀다. 두 손 가득 고운 모래알이 까슬거리며 흘러내린다. 별빛같은 아이가 무너져 내린다.
아아, 안 돼 ...
"엄마, 아파." 저도 모르게 손을 잔뜩 말아쥐었다. 쥔 손을 버티지 못하고 아이가 꿈틀거며 말을 건다.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미안. 얼른 힘을 푼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길, 거친 파도 소리가 다시 귓가를 적신다. 더 이상 아이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디에도 아이는 보이지 않고 모래사장 위로 선명하게 찍힌 작은 발자국 몇 개만이 환영처럼 남아있다. 고요한 파도가 다가온다. 크고 작은 보폭을 성실히 반복하며 육지와 바다를 오간다. 여남은 발자국마저 시나브로 옅어진다.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미는 이제 자신의 존재마저 의심스럽다.
제발 그만.
젖은 얼굴로 눈을 뜬다. 짙은 어둠 속에서 명암을 찾아내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이윽고 익숙한 격자 무늬 천정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서야 정미는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깨닫는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눈물길이 제법 넓고 길다. 정미는 오래토록 참았던 숨을 가쁘게 몰아내쉬며 흥건해진 베갯잎을 단숨에 구겼다. 손바닥에 닿는 낯선 촉감으로 불쾌한 감각을 지우려는 듯 지극히 간절한 움직임이었다.
온 몸이 젖어든다. 이 물결의 시작이 눈물인지, 땀인지 ... 아니면 바다인지 알 길이 없다. 결국 달라질 것 하나 없는 무수한 결말들이 두 팔 벌려 정미를 환대한다. 눈을 감는다. 다시 열릴 지옥의 문을 찾는다. 넘실대는 바다가 다가온다. 천정에도, 벽에도, 이불 위에도 물비늘이 퍼진다. 제 몸을 집어삼키는 검은 파도의 눈을 마주하며 정미는 다시 천천히 눈을 감는다. 고요한 심연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