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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May 13. 2024

에세이: 낯선 아이 관찰일기

내 눈을 사로잡은 그 아이



"언니이이이이!"

가늘고 높은 톤의 목소리가 습한 공기를 쨍! 가른다. 커다란 목욕탕 내부, 이 쪽 끝에서 저 쪽 끝까지 단숨에 달려간다. '총총총' 뛰는 모습이라고 설명하기에는 훨씬 더 과격한 몸짓이다. 그래, '우다다다'라는 표현이 더 걸맞겠다. 냉탕으로 다이빙하듯 입수하는 작은 여자아이. 한 세 살은 되었을까. 자그마한 몸집에 비해 옹골찬 몸이 제법 탄탄해 보인다.


남자아이 하나를 키우는 나는 요즘 대중목욕탕에서의 시간이 제법 한가롭다. 아이가 아주 어린 시절에는 (여탕에서) 내가 주로 씻겼으니 지금의 이 한가로움은 그 시기와 대비된 여유이자, 또 한 켠의 외로움이기도 하다. 이 빈 여백은 자연스레 관찰로 이어지고, 그 스포트라이트는 주로 어린아이들 차지다. 오늘은 저 다부진 여자아이가 주인공이다. 


비교적 얕은 냉탕이지만 본인 키로는 영 힘겹다. 난간을 붙잡고 까치발로 통통 뛰며 위태롭게 걷는 게 빤히 보이는데도 표정은 아주 비장하리만치 여유롭다. 물 아래 분주한 발 사정을 전혀 들키지 않는 한 마리 우아한 백조의 기품을 미간으로 그러모았다. 그게 또 나름의 귀여움이라 아이에게 들킬세라, 혼자 고개를 돌려 비식 웃음을 흘렸다. 


엄마의 부름에 두 아이가 스탠드 샤워장으로 집합한다. 엄마, 언니, 그리고 그 아이 순으로 나란히 세 모녀가 섰다. 아이들 각자 군말 없이 자신의 몸을 스스로 헹군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언니는 그렇다 치더라도 저 작은 아이의 완벽한 몸짓은 뭐지, 또 다시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높은 곳에 고정된 샤워기의 물살이 제 키까지 떨어지는 동안 무지막지한 가속도를 받아 가히 폭포수처럼 날카롭다. 그런데도 끄떡없이 자리를 지키고 서서 머리칼과 어깨, 등허리로 물살을 내리쬔다. 겨드랑이며 사타구니, 엉덩이 골까지 꼼꼼히 손으로 비비고 문질러 묵은 것들을 털어낸다. 짧은 머리카락도 잊지 않고 구석구석 헹군다. 몸집만 작을 뿐, 하는 행색은 영락없는 어른이다. 손이 야무지다 못해 맵다. 


긴 여정이 끝났다. 샤워기 물을 끄고, 엄마가 차례로 아이들에게 수건 한 장씩을 건넨다. 수건을 받자마자 머리를 감싸 탁탁 치며 물기를 흡수한다. 꽉 한 번 더 머리카락의 물기를 짜낸 뒤 수건을 털어 넓게 펼치더니 두 팔을 뒤로 돌려 등을 길게 감싼다. 등의 물기가 수건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 사이 빠르게 몸을 닦은 엄마와 언니가 출구로 걸어가자 마음이 급해진 아이는 얼른 수건을 몸의 앞쪽으로 돌린다. 가슴팍에서부터 세로로 늘어진 수건. 등이 훤히 파인 기다란 원피스 완성이다. 수건 아래로 앙증맞은 발만 보인다. (그 정도로 작은 아이다) 출구에 도착한 두 사람은 벌써 문을 열었다. 마음이 급해진 아이가 이번에는 오도도도 짧은 보폭으로 엄마와 언니를 따른다. 


떠나는 아이 뒷모습에 대고 속으로 '안녕, 잘 가' 아쉬운 인사를 건네는데 아이가 우뚝 멈춰 선다. 어, 내가 목소리를 냈던가? 숨을 멈춘다. 아이의 시선 끝에 목욕탕 입구 쪽 켜켜이 쌓여있는 커다란 대야 군대가 있다. 아이가 대뜸 손을 뻗는다. 탁. 비스듬히 쌓여있던 맨 위 대야를 당겨 제대로 정리한다. 엄마와 언니를 쫓는 바쁜 와중에도 1초의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이번에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혼자 너털웃음을 지었다. 진심으로 저 아이의 10년 뒤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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