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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Sep 19. 2018

아노말리사 -Anomalisa, 2015

에로스의 귀환을 꿈꾸며

에로스는 사라지지 않는 운동에너지로 나와 당신 사이에서, 나와 삶 사이에서 부유한다. 에로스가 포르노와 다른 점은 새로운 대상이 아닌 새로운 시선이라는 데 있다. 에로스의 주체는 나 자신이다. 나에게서 출발하는 새로운 시선은 다음을 또 다음을 기약한다. 그러나 포르노는 오늘 소비되고 가능성으로 대변되는 내일의 얼굴을 잃는다. 영화 ‘아노말리사’는 타자와 동일자, 여기에서 발생하는 에로스와 포르노를 얼굴과 목소리로 은유한다.


마이클 스톤은 성공한 자기 계발서 저자로, 프레골리 증후군(한 사람이 다른 여러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자신을 박해한다고 믿는 정신증의 일종. 그가 묵는 호텔 이름도 프레골리)을 앓고 있는 중년 남성이다. 강연을 하기 위해 오래전 헤어진 연인이 사는 도시에 방문한 마이클은 그녀를 만나게 되지만, 그녀는 다른 이들처럼 똑같은 얼굴과 목소리로 그의 앞에 앉아 있다. 그는 그녀에게 하룻밤을 보내자고 제안한다(중의적으로). 권태에 빠진 그는 도시도 그녀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다. 그들은 과거에 박제되어 언제든지 소환해 소비할 수 있는 포르노로 존재한다. 그의 주위는 모두 영화의 장치인 ‘프레골리 증후군=동일자’로 점철되어 있다. 결국 그녀에게 거절을 당하고 의기소침한 채 호텔로 돌아온 마이클은 샤워 도중 ‘다른’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는 유레카를 외치듯 “누군가 있어!”라고 소리치며 목소리의 주인인 ‘타자’를 찾아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리고 그의 말마따나 ‘기적의 목소리’를 가진 리사를 만난다.


영화 '아노말리사'

[아노말리사] ‘아노말리(변칙, 이례)’ 마이클이 만난 새로운 여인 ‘리사 이름을 더한 말로, 사랑시작부터 종말까지를 변주한다. 마이클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변칙적으로 존재하는 상대에게 빠져드는 ‘사랑의 모멘트 변칙적인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권태의 모멘트 모두 ‘변칙에서 출발한다는 오래된 이야기를 건네며, 권태의 주체는 닫힌 시선을 가진 ‘ 자신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영화 말미에 모두 같은 얼굴을  이웃들과 달리 그대로의 얼굴로 그와 마주   노래하는 마스터베이션 인형은, 타자의 에로스를 말소하는 권태의 귀착이 나르시시즘. , 마이클 자신에게 있음 보여준다. 그에게 타자와의 관계는 상호작용이 아니라 자기위로에 그칠 뿐이다.


영화 초반, 건너편 건물에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있는 남자를 호텔 창밖으로 바라보는 마이클의 관음적인 시선은, 동일자만 존재하는 그의 증후군과 결부되어 포르노적 삶에 대한 질문을 개시한다. 포르노는 성적인 요소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전시에서 관음으로 이어지며 누군가에게는 쾌감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편을 선사하는 SNS 역시 포르노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조회 수를 올리겠다는 일념으로 엄마를 중계하는 초등학생이 뉴스에 오른다. 자신의 사생활까지 전시하며 대중의 관음에 응답하는 이 꼬마의 이야기가 그저 가정의 문제나 남의 이야기로만 할 치부할 일일지 모르겠다. 아이에게는 분별력을 기대할 수 없다 치더라도, 어른이라 일컬어지는 우리는 그 아이의 무분별한 포르노적 사고에서 얼마나 멀리, 또 얼마나 가까이에 있을까.


콘텐츠는 더 이상 기업의 전유물이 아닌 시대가 도래했다. 기술이 확장시킨 기회 시장으로 말미암아 마치 랜덤처럼 보이는 개개인의 성공은 분별력이 없는 주체에게 포르노적 콘텐츠를 양산하도록 부채질한다. 이에 따라 대두되는 ‘표현의 자유’는 속박의 주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질주하며 책임보다는 방종을 지원 사격한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것일까. 저항은 차라리 삭제된 것처럼 도 보인다. 반성과 성찰이 결여된 자유는 과녁을 잃고 대중의 활을 흔들며 방황하는 화살로 시대의 DNA를 쌓아 올린다.


영화 '아노말리사'


너를 알고 싶어 지는 이유는, 너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 명제가 사라져 가는 와중에 TMI(Too Much Information), ‘모를 권리’로도 대치되는 이 약어의 대두가 반가운 이유는 이것이 나에게는 탈 포르노적 움직임의 하나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달리 말해 ‘에로스로의 회귀’를 위한 외침이다. 당신을 알 수 없다는 전제는 당신의 변칙적 얼굴을 즉자 존재에서 대자 존재로 회복시킨다. 다름은 단정이 아닌 질문으로 이어진다. 당신과 나는 왜 이렇게 다른가. 어제 내가 내린 선택과 오늘 내가 내린 선택은 무엇이 다른가. 변해가는 존재인 우리에게 질문은 삶의 동력, 즉 에로스를 지속시킨다.


마이클은 그의 고객 관리 저서를 바탕으로 한 강연에서 ‘맥락을 가진 개인’으로 고객을 이해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강연의 내용은 그의 권태적 삶과 정확히 대극점에 있다. 책을 집필할 당시에는 마이클 자신에게도 그 이야기가 ‘아노말리’였을 것이다.


새로웠던 텍스트가 반복되며 무의미한 텍스트로 변해가는 일은 자주 벌어진다. 얼마 동안은 새로운 관점이었다가 이내 고루해지는 아포리즘 이라든가, 새로운 누군가에게 호기심 어린 질문을 던지다 얼마지 않아 나의 분류에 끼워 넣고 단정하는 시선들. 삶의 권태와 존재의 권태 속에서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뉴니스가 아니라 나에게서 비롯되는 아노말리의 '발견'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이 살아온 삶의 맥락 속으로 기꺼이 건너가고자 하는 ‘실천’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 '아노말리사'


리사는 돌아오지 않은 마이클을 뒤로 하고 친구 에밀리와 함께 자신의 삶이 있는 도시로 향한다. 눈썰미가 있는 관객이라면, 리사와 종종 한 프레임에 있던 에밀리의 얼굴이 바뀌어 있는 것을 알아채게 된다(난 두 번째 볼 때도 몰랐다…). 마이클의 시점을 쫓을 수밖에 없었던 관객은 마지막이 되어서야 그녀의 진짜 얼굴을 처음 만나며 ‘마이클과 같은 시선’과 ‘벗어난 시선’을 모두 체험한다. 짧게 지나가는 에밀리의 얼굴은, ‘관객 자신의 시선’을 회복시키며 친구를 쫓아 강남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 듯한 공허의 잔상을 남긴다.


스톱모션 기법으로 3 동안 제작된 아노말리사는, '인형'이라는 매개를 스토리 내부까지 끌어들여 '의도적으로 만든 얼굴'로서의 자화상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마법을 선사한다. 마법이라는  탓에 반짝이는 페리테일 같지만 어른들을 위한  잔혹 현실 동화쯤 되겠다. 행동이나 몸의 묘사가 굉장히 섬세해서 묘한 거부감마저 들기도.(특히 마이클의 벗은 …) 섬세한 모션과는 다르게 얼굴의 이음새는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데, 마이클이 거울을 보며 자기 얼굴의 이음새를 발견하는 장면이나 꿈속에서 떨어져 나간 얼굴을 매만지는 장면에서는 언뜻 호러물인가 싶은 공포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때문에 ‘얼굴에서 출발하는 여러 사유들을 이리저리 곱씹어   있다.

영화는 따뜻한가 싶지만 차갑고 차가운가 싶지만 따뜻하다. 당신이 계속 봐주면 나도  반짝일 거라는 어느 가수의 말이 떠오른다. 엔딩 크레디트 직전, 햇살과 함께 흐르는 리사의 미소와 내레이션이 영화를 보는 누군가에게도 낯선 시선을 깨우는 기분 좋은 바람이 되기를. 어디에도 없는  같은 ‘천국의 여신 당신의 낯설고 생경한 에로스적 시선에서만 태어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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