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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Apr 22. 2018

송 투 송-Song to Song, 2017

삶이 허무를 알아채지 못하도록

출처- 영화 'Song to Song'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꿈도, 사랑도, 그곳에서 오는 희망조차도 만질 수 없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향해 손을 뻗는지도 모른다. 무엇이 실재이고 허구인지 구분할 수 없는 이곳에 꿈과 사랑과 희망으로 은유된 당신이, 내가, 만질 수 있는 실체로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어리석고 어쩔 수 없는 몸짓.


꿈과 사랑과 현실의 내러티브로 마음을 흔들던 라라랜드와는 결이 다르다. 이들의 무대는 꿈이 아니다. 지난한 인생의 복판에서 무엇인가 '붙잡고 만질 것'이 필요한 우리 모두를 닮아있다. 물 속인지 물 밖인지 구분할 수 없는 시선과 샹들리에에 걸려 빛나는 샌들, 연인의 허리춤에 다리를 엮은 채 거꾸로 매달려 바라보는 세상은 뒤집어져 있는 것일까 바로 있는 것일까.


영화는 허무를 견디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삶을, 차라리 생존에 가까운 단편들을 나열한다. 그렇기에 조금은 날 것 같고, 상당히 두서가 없으며, 몹시 이해되기에 진부하다. 나이가 지긋한 이들은 소모되는 감정과 섹스를 비난하며 젊은이들에게 지고한 사랑을 전하고, 젊은이들은 살기 위해 사랑과 섹스를 이용한다. 어느 누구를 비난할 수 있나. 사랑도 살아가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데.


Tristan und Isolde- Rogelio de Egusquiza

이언 매큐언은 넛셸에서 ‘죽음은 삶의 모든 것과 대립한다.’고 말한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트리스탄과 이졸데도 삶이 던지는 의미와 무의미의 기로에서 삶에 온통 사랑을 부여해 죽음으로 이를 증명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렇게 우리를 흔드는 모든 것들은 얼굴에 부딪쳐 오는 삶의 부조리를 견디느냐 견딜 수 없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사랑에서 파생되는 모든 행위가 그렇다. 사랑이 삶의 문젯거리가 되지 않은 적이 있던가. '송 투 송' 역시 오직 사랑이 가진 가치가 아닌 [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사랑]에 대해 노래한다.


손이 지나가는 길에 매 시선이 클로즈업된다. 이 순간 이곳에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하는 누군가에게 그 무엇인가에게 오감을 활짝 연다. 노래에서 다음 노래로, 사랑에서 다음 사랑으로, 하나가 되고 싶은 열망과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절망. 그 지루한 반복 안에서 삶이 허무를 알아채지 못하도록 다음 은유에서 또 다음의 은유로. 스스로의 인생을 들여다본 듯한 사람이 나뿐이었을까. 영화관을 나서던 밤, 누구든 그 무엇이든 만지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오늘은 모두가 눈을 감고 손을 뻗어 누군가를 어루만지는 밤이길 바래본다. 머리칼을 경계로 내려온 이마의 굴곡과 보송한 눈썹, 시선을 숨긴 눈꺼풀, 불거진 코의 시작과 뾰족하거나 둥근 끝, 인중과 만나는 윗입술에 숨은 크고 작은 갈매기와 형언할 수 없는 혀의 감촉, 아랫입술의 존재감, 까끌하거나 매끄러운 아래턱을 거슬러올라 곱게 말린 귓바퀴, 툭 하고 떨어지는 목덜미의 계곡과 쇄골로 이어지는 능선, 그 아래 곳곳에 자리한 높고 낮은 언덕들까지. 당신과 그가 어떤 [의미로], [존재]로,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확인받을 수 있게.


출처- 영화 'Song to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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