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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Apr 20. 2018

영화+책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2017’

기억의 윤색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p.162



우리가 믿는 '사실'에는 개개인의 판단과 해석, 때로는 취향까지도 배제될 수 없다. 상황의 너머를 볼 수 있는 시야가 필요하다. 그러나 상황에 연루된 열 명의 개인이 있다면 열명 모두의 입장을 짐작하거나 헤아리려 드는 일만큼 미련한 짓이 또 없다. 그 역시 나의 식견에 따른 판단과 해석일 뿐이지 않나. 내가 믿는 사실이 나의 '각색'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영화에 카피를 더해 보자면, 이를 모른 채 백발의 노인이 된 [토니 웹스터의 자기성찰 대모험] 쯤 되겠다. 아, 이름만 바꾸면 어지간한 영화가 다 그렇던가. 뭐 여튼,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는 이들이 명도 길다더라.

관전 포인트는 기억과 사실의 대비에서 오는 반전보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공감능력을 잃은 소위 '센스 없는' 노인의 일상이다. 다양하기에 혼탁한 세상을 제 입맛대로 정제한 순도 99.8%의 꼰대. 자기 역시 온 세상의 미꾸라지 중 하나인 것을 모른 채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있는 노인에게 도착한 한 통의 편지로 사건이 시작된다. 소설의 구성과 달리 영화는 토니의 기억 속에서 각색된 과거와 그 기억 그대로 노인이 된 현재를 적절하게 버무려 관객의 몰입도를 높인다.


출처/ 네이버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포토

주변 인물들은 그와의 만남에서 하나같이 벽과 대화하는 신비한 경험을 하는데 그 광경을 '목격'하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수 있겠다. 천진난만한 토니둥절과 '말해 뭐하나 알아듣지도 못 할 거' 하는 다정하거나, 황당해하거나, 한심해하는 표정들이 깨알 재미. 하지만 사건과 함께 토니의 일상도 눈여겨 쫓다 보면 백이면 백 스스로의 모습을 적어도 한 번쯤은 만나게 될 것이다.

으레 그렇듯 원작에 비하면 다소 아쉽지만 영화 나름의 맛이 있어 비교하다가 빠져들게 된다. 의식의 흐름에 따른 토니의 세밀한 장광설과, 시간과 기억과 역사에 관한 깊은 사유를 만나고 싶다면 소설도 강력하게 추천한다. 토니 웹스터라는 검은 머리 외국인으로 개명시켜주고 싶은 주변 인물이 있다면 그에게 선물하는 것도 추천하지만, 그가 계몽될 확률과 그렇지 못할 확률은 경험상 49:51이었으니 참고하시길.



우리는 충동적으로 결정한 다음, 그 결정을 정당화할 논거의 하부구조를 세운다. 그런 후,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를 상식이라고 말한다. -p.95


시간이 정착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용해제에 가깝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렇게 믿는다 한들 뭔가가 편리해지지도 않고, 뭔가에 소용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을 순탄하게 살아가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실을 무시해버린다. -p.111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p.165


인성의 깊이와 세월의 흐름은 비례하는 걸까? 소설에선 물론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스토리라고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인생에선 어떨지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우리의 태도와 견해과 바뀌고, 새로운 습성과 기벽이 생기긴 하지만 그건 뭔가 다른 것, 이를테면 장식에 가까운 것이다. 어쩌면 인성이란 다소 시간이 지나서, 즉 이십 대에서 삼십 대 사이에 정점에 이른다는 점만 빼면, 지성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 시기가 지나면 우리는 그때까지 쌓은 소양에 여지없이 고착되고 만다. 우리에겐 우리 자신뿐이다. 그렇다면 그걸 통해 여러 인생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폼 잡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우리의 비극까지도. -p.180


나는 인생의 목적이 흔히 말하듯 인생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님을 얼마의 시간이 걸리건 상관없이 기어코 납득시킨 끝에, 고달파진 우리가 최후의 상실까지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할 때가 가끔 있다. -p.183


내가 아는 체하며 역사는 승자의 거짓말이라고 주장했을 때, 조 헌트 영감이 뭐라고 대답했던가? 그는 '그게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는 것 기억하고 있나?'라고 했다. 우리의 개인적 삶을 대입해야 할 때 그 말을 제대로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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