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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Apr 20. 2018

바람 바람 바람, 2017

어쨌거나 바람은 계속된다


갑자기 우리 봉수가 너~무 잘해
모~든 방면에서



기만은 자존의 열등을 메울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일차원적인 임시방편이다. 남을 속이든 나를 속이든 기만은 순식간에 결핍을 처리한다. 자존의 마스터베이션이랄까. 때문에 속아줄 ‘대상’이 있어야만 완성되는 바람은, 들키는 순간 나르시시즘의 한복판에 싱크홀 경보를 울리며 자기보존을 위한 몸부림을 시작한다. 바람이 단순한 흥미 내지는 일탈이라는 얄팍한 논리의 포장은 몸부림만큼 부실할 밖에. 부서진 자존의 조각은 일탈 잼 논리의 포장을 찢고 나와 언제나 또 언제나 가련한 모양새를 들켜버리고 만다.


결코 채울 수 없는 공동은 모양새만 다를 뿐 너에게도 나에게도 있다. 바람바람바람은 이 어쩌지도 못할 외로움의 천국에서 암묵적으로 이해하기로 합의된 기저의 불안과 비겁으로 점철된 합리화를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는다. 이유로든 결과로든 결핍의 땅에 흩어져있는 빈약한 자존의 초상을 들이밀지 않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편하고 충분히 뻔하지 않은 영화다. 좀 뻔뻔하긴 해도.



너...엄마 얼굴 기억해....?



누군가는 이 뻔뻔함이 불쾌할 수도 있다. 기만하는 행위만 바라본다면 그렇게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 모두가 자존의 조각난 파편들을 그러모아 이어 붙이고 다시 부서지는 것을 반복하는 가련한 존재들 아니었나. 인류애에 포함된 삽질 연대의 미덕을 발휘할 타이밍이다. 게다가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는, 어차피 뻔하고 어차피 찐득할 반성찰 서사시는 홍상수가 다 해 먹고 있다. 나로서는 그쪽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엔 좀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 뻔하고 찐득한 것들은 지겨울 만큼 널려있다.



영화에서 외도는 자를 수 없는 시간의 단편을 들여다보기 위한 장치로 작동한다. 각 인물들에게 불어온 사건으로서의 바람과 바람의 특성처럼 지나가버리고 마는 찰나를 포착해 비극적이지만 유쾌하게, 또 비교적 담담하게 풀어낸다. 바람이 불었고 바람을 겪고 바람은 지나간다. 각각의 바람은 카이로스적 시간으로 환원되어 각자에게 틀림없이 무언가를 남긴다. 그리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삶은 계속된다. 무엇이 나에게서 지나가고 무엇이 나에게 남았다는 것. 튀어 오르는 순간 자체로 설명되는 인간에게 딛고 오를 단단한 땅이 생긴다는 것. 이것이 온 생에 걸쳐 존재하는 바람의 역학이 아닐까.

모든 바람이 먼로의 치마를 날린 바람처럼 시기적절하진 않을 것이다. 모든 바람이 납득할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닐 것이다. 바람은 나에게 불어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절대 이해되지 않을 찰나들이 모여 끝끝내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살아있는 한 바람은 계속된다. 죽음이 생의 귀결이 아니듯 생의 이유는 그저 살아감에 있지 않나.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한 세계는 이해하고 싶기 때문에 살아갈 만하다. 그렇다면 이런저런 바람에 좀 덤덤해져도 되지 않을까 싶다. 살아낼 용기의 외피가 꼭 맹수의 모양새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알거나, 모르거나, 똑 닮은 쌉쌀한 무표정으로 바람을 맞으며 롤러코스터를 타던 두 남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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