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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한 기쁨주의자 May 19. 2021

어느 날 지갑도 없이 속초에 와버렸다

느닷없는 5월의 강원도 속초 여행

나홀로 뚜벅이 속초 여행 1일차


나 지갑 잃어버렸음에 감사하오.

“언니, 엄마, 아빠 나 지갑 잃어버렸는데 요즘 세상엔 다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보이스피싱 오면 무시해. 안녕, 나는 간다!”


여유롭게 집을 나서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 아점을 먹고 버스에 오르려고 지갑을 찾다 10초 만에 지갑을 잃어버렸단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 버스에서 내리기 직전 무언가 툭 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 역시나

내 지갑이었구나.

여행을 다닐 때면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기 때문에 이제 이런 일로는 당황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당황하느라 소중한 하루를 버리지 않는다.

심지어 이번에는 쉬운(?) 난이도의 분실이어서 버스에 올라 가족 카톡방에 혹시 모를 피싱 방지 연락 남기기, 버스 운수회사에 분실물 신고하기, 카드 계좌에 있는 돈 옮기고 정지시키기... 숙련되고 차분한 분실자의 면모를 보이기까지 했다. ‘아, 정말 다행이다. 그래도 교통카드용 체크카드를 하나 들고 있어서 속초 여행을 바로 출발할 수 있었고, 최근 발급받은 운전면허증이 아니라 재발급의 수고를 덜었고, 다른 카드나 보안카드나 법인카드 등도 없어서 골치 아플 일은 없겠네.’

그렇게 5월의 나홀로 속초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elightful Insight를 향하여!


버스에서의 단상

갓 사회초년생을 벗어나 6년 차 직장인이 된 나는 ktx에 맛이 들려 한동안 버스를 멀리했다. 한 달에 한번 집을 내려가는 교통비만 10만 원을 써야 하지만, 가족들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를 사는 셈이니 하나도 아깝지 않다.


몇 년 만에 타본 버스는 ktx보다 좌석이 두배쯤은 여유로웠고 2시간 30분 동안 느긋하게 갈 길을 갔다. 18,900원은 48,900원 보다 느리게 간다. 돈을 적게 냈으니 시간을 더 써야 하는 셈이다. 여행 일정이 빡빡한 사람이라면 좀 더 돈을 쓰는 선택을 했겠지만, 오늘의 나는 돈보단 시간이 많은 사람이다. 더 큰돈을 벌 생각이 없어 여름휴가도 아닌 5월에 꽤 긴 휴가를 보내고 있는 서른 살의 베짱이.


여행의 목적

#기도

기도는 습관을 들이는 것도 참 중요하지만 아주 끈덕지고 몰입도 있게 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보통 그런 기도가 필요할 때 나를 둘러싼 무언가 들로부터 스스로를 잠시 떨어 트려 놓는다. 생명력에 꼭 필요한 시간이니까.

#쉼

누구보다 주 5일제, 일 8시간 노동에 반대하는 사람이지만, 일 벌이기 좋아하는 탓에 사실상 뇌와 손 발이 잘 쉬지 못한다. 그러니 강제 귀양살이를 통해 삶의 균형을 찾는다.

#영감

주로 자연과 사람, 공간과 책에서 영감을 얻는다. 여행은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얻을 수 있다.

#좋아할것을찾아서(서핑)

나이가 들 수록 무언가 뻔해지기 마련이다. 나는 하루하루가 새롭고 재미났으면 좋겠고 그래서 안 해 본 것에 도전하는 걸 좋아한다. 작년 여름 제주도에서 서퍼들을 보고 언젠가 서핑을 꼭 해보겠다 결심했는데, 결전의 날을 치르러 온 것!

#좋아하는것을좋아하려고(서점 투어)

여행지에서 읽는 책만큼 특별한 메시지를 주는 것이 있을까. 속초에 유명한 서점들이 많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한량같이 하루 종일 바다를 바라보며 책만 읽을 수 있겠군.


문우당 서림&동아서점
문우당 서림의 가장 큰 특징. 어딜 봐도 문장이 있다!

속초 여행의 5할을 서점에 쓰기로 한 나에게 문우당 서림의 책 큐레이션과 공간 구성은 생각했던 것 보다 아쉬웠다. 책보단 손에 들린 굿즈나 인상 좋은 직원분들로 문우당을 기억할 것 같다.

1956년에 문을 연 속초 동아서점
동아서점 한 편엔 여행자들이 남겨 놓고 간 글귀들이 있다.

반면, 동아서점의 큐레이션 그리고 책과 어울리는 향기는 꽤 인상적이었다. 공간을 기억하기 위한 좋은 장치들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은 아버지가 하시던 오래된 서점을 아들이 맡게 되며 책을 도매로 받는 것에서 직접 골라 가져오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바닷가에서 주워온 것 같은 조개껍질과 유리 돌들이 곳곳에서 훌륭한 속초 오브제로서의 역할을 한다. (좀 주워서 곧 오픈 할 공간 희희에 두어야겠군 흠흠)

오늘의 구매 목록. 선물할 노트, 지역 사람이 만든 동네 관광지도, 책 2권, 엽서세트

동아서점에서 책을 읽고 고르는데 넉넉히 시간을 탕진하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 펭귄클래식 버전과 문지문학상 후보작을 엮은 작은 단행본(2021년 봄)을 구입했다.


여행만 오면 <월든>이 땡기는 이상 징후가 반복되었으나 두꺼운 책을 끈덕지게 읽지 못하는 습관으로 완독을 못했었는데, 과연 이번에는 어떨지.


칠성 조선소
속초 칠성조선소

꽤 최근까지 속초에 직접 배를 만들던 곳. 지금은 전시공간, 칠성 북살롱(책방과 굿즈 판매 공간), 카페 그리고 조선소 다운 바다 뷰를 가진 속초의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속초 칠성북쌀롱 (&그린블리스)
아기자기한 굿즈, 귀여우시고 친절한 사장님이 계신 칠성북살롱

귀여운 것이 가득한 굿즈샵은 못 지나치는 참새이기 때문에 구석구석 구경하다가 사장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된 사실! 내일 가려고 보아 놓은 ‘완벽한 날들’이라는 서점이자 북 스테이 공간이 여기 칠성 조성소 둘째분이시란다. 이쯤 되면 속초에사 칠성 조선소 가족들에게 상 줘야하는 거 아닌가 몰라. 이미 받았으려나?

속초 뷰 맛집 칠성 조선소 카페 2층

커피 한 잔을 시켜 카페 2층으로 올라가니 항구가 잘 보이는 통 유리창 뷰가 펼쳐져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속으로 행복하다를 몇 번이나 외쳤나 모르겠다.  겉으로 말 한 것은 아닐지 걱정될 정도다. 책 한번, 커피 한 모금, 해가 지는 바다를 번갈아 섭취했다. 캬-


속초관광 수산시장
속초관광 수산시장. 각종 전,부침,부꾸미,튀김을 판다.


식도락 여행을 다니진 않는 탓에, 이번에도 맛집을 검색하고 오지 않았다. 하지만 로컬리티에 대한 열망은 있어서 시장이 보이면 무조건 들리는 편이다. 숙소로 돌아 오는 길에 얻어 걸린 속초관광 수산시장엔 대게, 작은 게나 새우튀김, 닭강정이 가득했다. 저녁으로 먹을 부꾸미 몇 개와 ‘속초 전설 식혜’라는 단호박 식혜를 사들고 돌아왔다.


속초에 많은 3가지

고작 속초 1일 차이고 동명동 근방만 다녔지만 유독 눈에 띄는 세 가지가 있어 정리해 보려고 한다. 2일차엔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점집

이 동네는 과장 조금 보태서 한 집 건너 한 집이 점집이다. 동네가 오래되어 공가 딱지가 붙은 곳도 많은데 사이사이 점집도 많다 보니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나서 숙소로 돌아오는 밤 길이 무서웠다. 예로부터 바다의 기운(?)을 모시는 곳이 많아서일까 경주 바다 근처에도 굿당이 많았었는데.

#고양이

속초여행. 칠성조선소 앞 해변가(?)의 길냥이

동네 곳곳에도 식당 앞에도 바닷가에도 고양이들이 정말 많았다. 칠성 북살롱 문 앞에도 고양이가 있길래 사장님께 “이 동네는 왜 이렇게 고양이가 많아요?(행복하게)”라고 물었더니, 아마도 낚시하시는 분들이 물고기를 많이 주다 보니 그런 것 같다고 하셨다. “그래도 얘네는 예의가 있어서 이렇게 가게 안으론 안 들어와요. 아이고 귀여워.”

#장미

집 담벼락이나 길가에 장미가 한가득 피어있었다. 5월이라 장미가 핀 것인지 유독 장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인지. 바다 짠내와 장미향이 뒤 섞인 골목길이다.




여행을 다닐 땐 더욱 기록을 남기려고 한다. 사진이나 짧은 영상들도 좋지만 그날의 생각과 이야기들이 서울에서처럼 바삐 흩어지기보다 곁에 오래 남아주면 좋겠어서. 게다가 밤에 어디를 나 돌아다닌 편도 아니니 숙소에 갇혀서(?) 글도 술술 써진다. 그리고 나의 친애하는 도시 친구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한 국자 정도 담뿍 담는다.


오늘의 일기는 이쯤 해서 마치고 자야겠다. 아무래도 오늘 보단 내일 또 보고 들을 것이 많을 것 같은데, 내일 밤에도 일기를 쓰고 잠들 수 있을까? 내일은 일출 러닝 도전해야지. 모두 속초스러운 밤!


나는 어떤 작가든지 남의 삶에 대해서만 쓰지 말고 소박하고 진솔하게 자신의 삶에 대해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지에서 고향의 친지에게 쓰는 그런 글 말이다. 자신이 진솔한 삶을 살았다면 그 이야기는 제삼자에게 새로운 경험이 된다.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2일차 여행기는(속초 맛집, 할머니 감자탕엔 할머니가 안 계셔요) 다음 글에서


+

오늘 읽은 책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

•악몽수집가

•월든 조금

•동명동으로 어서오소호

•로마서 6~7장

속초여행 칠성조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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