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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한 기쁨주의자 May 20. 2021

속초 맛집, 할머니 감자탕엔 할머니가 안 계셔요

느닷없는 5월의 강원도 속초여행

나홀로 뚜벅이 속초 여행 2일차


습관성 두려움

나이가 들 수록 겁이 많아진다. 겁이 많으면서 혼자 여행은 어찌 다니냐 싶겠지만,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체득해버린 두려움도 있는 법이다.


지난 밤잠을 설친 이유는 5시 이후의 카페인과 악몽 때문인데, 잠들기 전부터 약간의 긴장감이 있었다. 어딜 가면 언제부턴가 화장실, 샤워실, 숙소 방에 몰래카메라 같은 것이 없는지 신경이 쓰인다. 문고리가 시원찮은 느낌에 누군가 침입하는 듯한 꿈에 시달렸다. 스위스 루체른의 어느 벤치에서 하룻밤 노숙도 하던 25살의 배짱은 30살의 김은지에겐 안타깝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속초에 왔어도 뛸 건 뛰어야지
속초 바다 일출 명소 영금정

언젠가부터 여행의 필수 코스처럼 러닝을 하게 되었다. 동해 바다에 온 만큼 이번 러닝은 일출런으로 정했고, 1km를 뛰어 영금정 도착했다. 구름 낀 바다는 붉은 해를 쉬이 내어주지 않았지만 숨겨지지 않는 빛은 수평선 끝을 곱게 물들이고 있었다.

영금정 뒤 선착장

방향을 돌려 내려다본 선착장은 새벽부터 북적였다. 누군가는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이지만 누군가는 옷을 갖춰 입고 나와 그물을 정비해 한참 배를 돌리고 있을 때라는 것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바다 앞에, 자연과 분투하며 생존하는 생 앞에, 나는 얼마나 작은가.


하루 종일 책만 보고 앉아있네
속초 북스테이, 책방, 카페 ‘완벽한 날들’

어제 못 간 ‘완벽한 날들’ 서점에 들렀다. 작은 규모에 아기자기한 책들이 놓여 있었다. 서점 이름이 참 좋다 싶었는데 ‘메리 올리버’라는 작가의 책 제목이었다. 내가 완벽한 책방 주인이 되어 책 제목으로 간판을 세운다면 무엇이라고 정하려나. 지금으로선 ‘모모’라고 짓고 ‘아무튼 모모에게 가보게’라는 문구를 책방 여기저기 붙여 놓을 것 같다.

속초 여행 게스트하우스. 소호 259 호스텔

짧은 서점 마실을 마치고, 숙소 1층 카페로 돌아와 밀크티 한 잔을 시켰다. 해먹에 앉아 로마서와 월든을 읽었다. 멀리 속초까지 와서 오전 내내 책만 읽은 내게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이런 말을 미리 남겨 놓았다.

제대로 독서하는 행위, 즉 가치 있는 책을 읽고 그 참뜻을 파악하는 행위는 고결한 수련이며 현시대가 찬미하는 어떤 수련 과정보다도 철저하게 독자를 단련시킨다. 독서를 제대로 하려면 운동선수처럼 평생 지속적으로 훈련을 받아야 한다.
<월든, 독서 중에서>


영랑호 산책길
속초 영랑호 호수 공원

점심엔 영랑호 둘레를 산책했다. 좋은 길을 걷는 것은 묘한 힘이 있는데, 생각을 위해 시작한 첫 발이 산책의 끝엔 걷는 것 자체의 목적으로 바뀌어 있다. 둘러싼 풍광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히 벅찬 순간들이다. 눈 앞의 작은 풀 가지들과 호수 그리고 저 멀리 웅장한 산의 원근감이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있나요
속초 카페 힘커피
속초 맛집 힘커피
속초 카페 힘커피(영랑동 카페)
속초 로스터리카페 힘커피

내가 속초에 간다고 하니 한 친구가 “힘커피에 꼭 가봐!”라고 했다. 카페에 도착해 카카오라떼 한 잔을 시키며 사장님께 수줍게 이야기했다.

“저 00이가 여기 꼭 가보라고 해서 왔어요...”

! 혹시 예전에 저희 교회 오셨던,  공간하시고 젠가도 파시는  아니세요?” 어쩜, 기억력도 좋으셔라.


1년 전 이사 시기에 그저 바다가 좋아 속초에 왔다는 부부. 커피 로스팅에 진심인 그와 굿즈 제작과 판매에 진심은 그녀는 그렇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있었다. 산 넘고 물 건너 바다까지 와서.

이틀간 느낀 속초에 대해, 그녀의 번뜩이는 사럽 아이디어에 대해, 원래 알던 사이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향이 좋은 카라멜크림이 들어간 라떼 한 잔과 커피 드립백 세트를 선물로 받아 들고 힘커피를 나왔다. 문 앞까지 배웅해 주시는 다정한 속초 커플 덕분에 힘을 얻어 다시 걸었다.


청년 없는 청년몰, 할머니 없는 할머니감자탕
속초 아바이마을 앞 갯배
속초 청년몰 갯배St

아바이마을 갯배 선착장 근처에 있는 ‘갯배 st’ 청년몰. 외관부터 뭔가 느낌이 싸했다. 운영 되고 있는 것이 맞을까? 잘 찾아온걸까?

청년몰 갯배st 2층

청년몰은 1층의 식당과 공방, 2층의 카페와 라운지, 테라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인적 취향의 문제일 수 있지만, 어딘가 컨셉이 모호한 인테리어와 용도가 불분명한 공간 집기들, 심지어 어떤 의자는 앉으면 무릎이 테이블 사이로 끼이는 대참사까지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직원 외에 청년들은 많지 않았고, 아이들과 함께 온 부모들과 맥주캔을 든 아저씨 몇 분이 있었다. 넓은 공간은 속초 시민들에게 좋은 유휴지가 돼주는 것 같았으나 적어도 속초 청년들이 모이게 하는 목적이나 외지의 관광객들이 일부러 찾아오기엔 조금 아쉬웠다. 아뿔싸, 오지랖이다 오지랖!

그래도 설악대교가 보이는 테라스와 알록달록 해먹 의자는 지친 뚜벅이 여행자에게 좋은 낮잠터가 되어 주었다.

일기예보에 맞게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고, 어제 동아서점에서 산 그림 지도에 적힌 ‘할머니감자탕’집을 찾아 가보기로 했다. 오후 4시 반, 밥때가 아니어서 한가했던 식당에 두 다리 쭉 뻗고 앉아 뚝배기 한 그릇을 기다렸다.

속초 맛집 할머니 감자탕

멍하니 식당 내부를 둘러보다 깨닫게 된 사실은 이곳 어디에도 할머니가 없다는 것! 물론 할머니 뼈해장국도 원할머니 보쌈도 이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지만, 안에서 요리를 하시는 분은 인도나 파키스탄 쪽 분, 서빙해 주시는 분은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청년 같았다.(지극히 개인적인 추측이다.) 전수를 잘 받으신 것인지 본래 요리 솜씨가 좋으신지 감자탕 뚝배기 맛은 훌륭해 허겁지겁 먹었다.


어제 수산시장 골목 가판대에 있던 분들도 외국인 분들이 많았는데, 밥을 먹고 길을 나서는 중에도 계속 외국인 청년들을 마주치니 새삼 우리나라 지방 노동 인구 구성의 현실을 깨닫게 된다. 현실만큼 우리의 관심과 제도가 따라오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지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아량 있는 로컬리티를 위하여!

오늘의 마지막 일과도 역시 서점이었다. 동아서점으로 향하는 길, 문우당 서림 바깥에 적힌 Keyword, “Yes! we live Local”

“한 지역의 지리적인 성향을 떠나서 그곳의 사람들이 개척하고 만들어 온 문화를 기반으로 생성된 공간의 표식은 거창한 영광 또는 명칭이라 느껴지기보다 자연스러운 흐름의 결과라는 인식을 보여줍니다.”


관광, 공간, 브랜드에서 ‘로컬리티 밀어 온지도 시간이  흘렀다. ‘로컬리티 어떻게 정의되어야 할까.  지역의 특색이 묻어나는 ? 외지인이 아닌 토박이들이 만들어내는 ? 여행자들을 많이 끌어 모아 지역을 느끼게 하는 ? 그래서 지갑을 여는 ?... ‘로컬리티알려진 핫한 곳들 중에는 그곳에 새로 정착한 외지인이 만든 곳이거나 대자본을 투여해 브랜딩 컨설팅을 받은 곳들도 많다.


나는 작은 도시와 동네가 우리 곁에 오래도록 남기 위해 그럴듯한 로컬리티의 정의로 누군가 배척되지는 않았으면 한다.  현실적이고 열린 맥락에서 현재의 구성원을 살피고 서로의 강점을 발견하면 어떨까. ‘진짜’는 결국 빛나기 마련이다.


명랑한 어린이로 살기
<어린이라는 세계> 사계절 출판사

지인 몇몇에게 추천받은 ‘어린이라는 세계책을 드디어 읽었다. 어렵지 않은 내용과 군더더기 없는 문체였고, 제목 그대로 어린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느껴보기충분했다.


어린이에서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지는 경제인구가 되기까지 20년이  걸리지 않는다. 어른의 정의가 무엇인지, 그래서 나는 좋은 어른이  것인지 대답하기 어렵지만  어린이와 같이 명랑하고 싶다고는 생각한다.(물론 어린이들도 상황과 성향에 따라 마냥 해맑진 않다.)


사람들이 좋아해주는 나의 명랑도 5할은 후천적 노력에 의해서라고   있다.  웃는 얼굴과 희망을 보려는 시선을 가지려고 오늘도 명랑을 연습한다.


명랑하기는 성격만으로 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명랑하기는 윤리이기도 할 것이다. 늘 희망을 가지려고 애쓰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만 명랑할 수 있지 않을까.
<습관의 말들> 중에서

오늘의 채집물들을 배부르게 바라보며 일기를 마무리한다. 내일은 드디어 서핑 가는 날!


그나저나 오늘 열심히 걸은 보람 있이 숙면해야 하는데.


속초 여행기 3일차는 다음 글에서

•속초에 서핑하러 왔다가 쓰레기 주워 갑니다.


오늘 읽은 책

•고사리가방 / 김성라

•습관의 말들 (유유 출판사)

•어린이라는 세계 / 김소영

•로마서 8~9장

•월든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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