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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한 기쁨주의자 Jul 25. 2021

영감 찾아 얼렁뚱땅 양평 여행

직장인의 2박 3일 여름방학, 서울 근교 계곡 여행

‘이번 여름 방학은 어떻게 보낼까?’

회사에선 여름방학을 주지 않길래 알아서 여름방학 주간을 시행하기로 했다. 자고로 학생에겐 방학이 필요한데, 모든 인간은 평생 이것저것 배우는 존재로 살아가야 하니 알아서라도 쉬는 수밖에.


결심은 했고, 나의 신실한 여행 메이트 희수에게 연락 했다. “자, 여름이다. 떠나자!”

우리는 최대한 사람들이 많이 없을만한 곳으로 여행지를 고르자 했고 태백부터 시작해 영월까지 다양한 후보가 나왔다. 결국 이미 다 차버린 예약이며 비용이며 뜻밖에 ‘성수기’를 확인한 후에야 ‘이 여행이 얼렁뚱땅 산으로 가겠구나.’ 직감했다.

“일단 우리 집에서 시작해서 가까운 곳으로 가보자!”


#1일차

프엥구인과 함께하는 아무튼 당연한 네네치킨

천호역 접선 후 정말 우리 집으로 왔다. 혼자서는 절-대 시킬 일 없는, 치킨 한 마리를 주문했다. ‘아무튼 당연하죠 네네치킨~’ 경쾌한 멘트 후엔 여름날의 피곤이 만들어냈을 퉁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시간이 넘어서야 배달된 치킨을 맨발로 뛰쳐나가 맞이했다. 치킨 앞에 드림웍스의 20th가 이리도 경건할 일인가. 우리가 본 영화는 <펭귄>. 베네딕트 컴버베치의 ‘프엥귀인-‘ 발음은 왜 이리 또 멋있는지. 완벽한 여행의 첫날이었다.


#2일차

우리의 쏘카 모닝이와 베스트 드라이버 희수

동창이 밝았고 노고지리까진 아니더라도 천호동 참새쯤은 우지지는 아침이었다. 희수에게 깨지 않고 잘 잤는지 물었다. (나는 요즘 자다 말고 더워서 자주 깬다.) 우리는 지난밤 나란히 누워 오늘의 안전한 여행을 위해 전략을 짰기 때문에 능수능란하게 일정을 시작했다. 가자 우리의 쏘카로!


남양주 레미솔트 베이커리카페 / 매일 까진 아니더라도 어쩌다 브런치를 먹는 인생은 꽤 괜찮다고 생각한다.
남양주 레미솔트 베이커리 카페

"특별할 건 하나 없지만 매일 숲길을 걷는 인생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파주 출판단지, 안그라픽스 건물 주차장 외벽에 붙어 있는 문구이다.(2018년.)


오늘로 가져온다면 이렇게 써보고 싶다. 매일까진 아니더라도 가끔 브런치를 먹는 인생도 꽤 괜찮은 것 같다고. 브런치를 먹을 시간, 능력껏 일해 번 돈, 마음의 여유 그리고 함께 브런치를 먹는 시간을 내줄 소중한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소중한 희수 그리로 여유
남양주 여행, 브런치 카페

우리는 잠봉뵈르 플레터 하나와 딸기 타르트 케이크,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으로 모닝 카페인 수혈을 했다. 그리곤 우리 여행의 전통답게 아침 묵상(Q.T) 시간을 가졌다. 플레터의 두께는 적당했고, 딸기 타르트에 있는 크림은 "미친 거 아냐!"라는 과격한 감탄사를 불러일으킬 만큼 맛있었고, 밖으로 보이는 아침의 남한강은 더할 나위 없었다.


남양주 한강 뮤지엄 / 영감의 발굴

"한줄평: 전시로는 10,000원이 아까울 만큼 별 것 없지만, 음료가 포함된 가격이니 갈만해요!"


우리가 보고 갔던 이 한 줄 보다 남양주 한강 뮤지엄을 잘 설명하는 말은 없는 것 같다. 뮤지엄이라고 하기엔 어색한 매표소를 지나 문을 열면 더 엉성하게 자리한 공간이 나온다. 더 이상의 말은 작가님들께 실례가 될 수 있으니 생략하기로.

더이상 억지로 의미를 찾아 헤매지 않고 음료와 함께 테이블에 앉았다. 희수는 요조의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이란 책을 나는 컨셉진 81호, <당신의 삶엔 영감이 있나요?>를 비상식량처럼 꺼냈고 한 시간 반 정도 각자의 텍스트를 읽어 갔다.


나는 원래 어딜 가든 흔적을 많이 남기는 류의 사람이라 책에도 서슴지 않고 펜질을 해댄다. 오늘도 어김없이 노란 펜 하나를 긋다가

'아!'

책 아랫부분에 내 손으로 찍어 놓은 회사 도장을 발견했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어차피 거의 저만 보는 책이니 원래도 너그러운 아량으로 한번 더 봐주세요.’ 이러니 내가 팀에서 서가 담당을 내려놓지 못한다.

"거대한 강이 흐르고, 산이 있고, 어디에나 시간이 쌓여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고 보면 어디에든 영감 덩어리들을 다 쌓여 있는 것 같아요."
이번 호에 실린 유병욱 CD(creative director)의 말이다. 좋은 문장은 언제나 필연적인 영감을 주는 법. 영감에 대한 짤막한 글이 금세 써졌다. 그의 말에 대한 답가랄까.

어떤 순간에나 영감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어떤 영감을 채굴할 줄 아는 이가 어디에나 있는 것은 아니다.
묻혀 있는 영감을 발견할 줄 아는 안목, 기꺼이 뽑아낼 용기, 산재한 영감을 가지런히 정리할 줄 아는 끈기 그리고 지극히 사적인 영감일지라도 '우리'를 위해 발휘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저희처럼 메세지를 만드는 사람들은 더 예민하게 자기를 정돈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안테나가 오염되어 있으면 안 좋은 생각이 더 많이 퍼질 테니까요."
메세지를 전하는 존재, Messenger로 살아가는 것이 사명인 나에게 오늘 같은 날은 여기저기 잔 때가 묻은 안테나를 바람 쐬러 와주는 시간이다.

이렇게 영감을 수집하다 떠오른 것들은 영감 보따리에 하나씩 넣어 둔다.

- 6년 차 직장인, 7번의 이직을 한 현업자로서 취업이나 이직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자소서 첨삭&면접&회사생활 멘토링 one day meet을 해보자! (희수랑 대화하다 보니 내가 이미 그런 일을 많이 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 고민이 많은 시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단 마음이 불쑥!)
- 어르신들, 외국인-이주 청소년, 청소년 쉼터... 이런 곳에 무더위 지원을 하면 좋겠다.
-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 오이뮤의 향을 사보자. 향에 대한 편견을 버려보자고.
- 어느 날 문득 민화를 배우러 가자.
- 그날 내가 느끼고 싶은 기분에 따라 향분낭을 달고 다녀보면 어떨까?
- 취향과 목적에 따른 방 꾸미기, 본격적 내 방 인테리어를 시작한다.
- 내일부터 할 북클럽 '자급, 자족, 자주', 첫 번째 책 <월든>의 미션을 '내가 오두막에 들어간다면?'으로 해서 게임 퀘스트처럼 진행해 보면 어떨까?
남양주 한강 뮤지엄


 양평 중미산 자연 휴양림 / 중미산 계곡엔 아직 도롱뇽이 산다.

나는 요즘 계곡에 꽂혀 있다. 여름에 태어난 아이라 여름날엔 날마다 들뜬상태로 지내는 것 같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산으로 들로, 저수지며 댐이며 냇가며 가리지 않고 물가를 찾아다닌 덕에(-는 사실 아빠의 낚시 취향 때문이지만) 여름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하면 "계곡에 가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번 주 수요일엔 양주 송추계곡을, 오늘은 중미산 휴양림 속에 있는 계곡을 찾아왔다. 들어는 봤으려나 계곡 디깅이라고.

양평 중미산 자연 휴양림(서울 근교 계곡) 그리고 좌, 도롱뇽!!!

산 넘고 물 건너 한 자리 잡아 앉았는데 발 옆에 손바닥 길이 만한 무언가가 있었다.

"설마.. 도롱뇽?"

세상에나, 1 급수에만 산다는 그 도롱뇽을 서울에서 고작 1시간 떨어진 곳에서 만나다니. 옛날엔 도롱뇽이 알을 붙여 낳으면 장마가 온다고 믿었다는데, 2021년의 나는 도롱뇽을 보고 생각했다. ‘아 이 물이야 말로 누울 자리구나’

한참 발을 동동거리며 물 멍을 때리다 문득, 눈앞에 있는 애기 고사리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희수야 너는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장면 중에 어떤 것이 가장 아름답니?"
"음.. 다 멋진데. 지금 물에서 반짝이는 빛이요!"


세상에는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보이는 것들이 있고 그런 관찰은 습관이 되어야 비로소 빛을 발한다.

나는 고사리를 좋아한다!!!!!
산책길에 만난 산수국. 나비가 내려 앉은 것 같다.


양평 중미산 막국수에 핀 메밀꽃

휴양림이 문을 닫는 시간에 맞춰 나와 아까 오는 길에 보아 둔 막국수 집에 가기로 했다. 중미산 막국수. 보통 그 지명이 붙은 음식점은 지역을 대표할 만큼 맛있거나 혹은 아무런 특색이 없어 동네 이름을 붙였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많다. 일단, 입구에 귀여운 고양이가 누워있었으니 이곳은 합격이다.(결국 귀여운 게 다야!)

중미산 막국수, 경기도 맛집 선정이 된 곳의 단정한 상차림.

자리를 잡고 앉아 비빔 막국수, 물 막국수를 하나 시켰다. 테이블에 놓인 겨자 소스와 식초를 휘리릭- 뿌렸는데 무언가 범상치 않았다. 겨자는 마늘이 곱게 갈려 들어가 있었고 식초는 자색을 띄었다.
"후루룩-"

"와.. 이거 뭐야?"
첫 젓가락질에 외친 말이다. 화장실에 다녀오며 이미 스캔을 끝낸 똑똑이 희수는 우리가 먹고 있는 면이 이곳에서 직접 뽑아낸 메밀면이라고 말해주었다. 물막국수는 동치미+육수로 만든 국물이 끝내주게 ‘절묘한 조합’이었고, 비빔 막국수는 적당히 고소한 들기름? 참기름? 이 감싸 안은 '가장 맛있는' 비빔 막국수였다. 설명이 틀림없이 맞았구나!

양평 막국수에 관한 순도 100%의 진실.

메밀향이 입안 가득한 식사를 마치고는 식당 사장님께서 정성 들여 가꿔 놓으신 야생화 정원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먹은 막국수 장의 비법은 이곳에서 알맞게 익어가고 있었겠지.
여름 빛을 담은 도라지꽃

그리곤 바로 옆의  '중미산 제빵소'에 들러 오늘의 세 번째 짠-을 했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여름날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때가 오고 있었다. 하늘이 발갛게 쑥스러움을 타는 시간, 하얗고 파랗고 붉은 여름의 노을 그리고 여행이 끝나가는 순간.

여름 노을은 노을 중에서도 진짜 맛집이다.


오늘도 아름다워할 것.

듣는 귀가 좋은 친구에게 가끔 플레이리스트를 받는다. 오늘도 드라이브할 때 들으라며 친구가 보내준 리스트로 돌아오는 길을 채웠다. 들려지는 것과 보이는 모든 것이 조화로운 이 순간을 '아름답다'말고 어떤 적절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희수야 나는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더 많이, 자주 느끼며 살았으면 좋겠어. 오늘 우리처럼."


#3일차

여행을 마무리하는 아침 날, 밥 한 끼는 내 손으로 해 먹여 보내야겠단 생각에 냉장고를 털어 제육볶음과 쪽파 샐러드를 만들었다.

“아, 2박 3일 덕분에 잘~ 놀았다. 여행은 어땠어?”

“여유롭게 너무 잘 놀고 쉰 거 같아요.”


내심 더 구구절절한 여행 후기를 기대했던 내게 희수는 쿨내 나는 한 마디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가 떠난 자리엔 이런 것들이 남아있었다.

희수의 편지 /

[“나는 나의 남은 인생을 내 주변에 멋진 사람들을 흉내 내면서 살고 싶다.” _요조

이 문장을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언니였어요. 오래도록 서로에게 닮고 싶은 사람이 되아줄 수 있길!]


그래서 이 여름방학 글의 마무리는 나의 친애하는 여행메이트 희수에게 닮고 싶은 점을 정리하며 끝내야겠다. 아주 많지만, 여행 중 느꼈던 몇 가지로.


1. 놀라운 관찰력과 다정함을 가진 사람

희수는 나와 10년 정도를 보아온 사이다. 내가 밥 먹을 때 김칫국물 잘 흘리는 것도 알고 무엇을 좋아하는 줄도 잘 안다. 상대방을 세심히 관찰하고 기억해 두었다가 이렇게 슥- 내밀곤 한다. 화장실엔 전부터 갖고 싶었던 치약짜개(*플라스틱 뚜껑을 녹여 만든 것)를 두고 갔고, 선물이라며 내민 책 속엔 내가 노래를 부르던 영화 <루카> 책갈피도 끼어져 있었다. 정말 소름 돕게 섬세한 친구.

2. 무엇에 꼼꼼해야 하는 줄 아는 사람

계곡에서 신나게 물장구를 치고 있는데 갑자기 희수가 벌떡! 일어나더니 비탈진 곳으로 향해갔다.

“아니 왜 이런 깊은 산에도 쓰레기가..”

요즘 희수를 만날 때마다 보게 되는 모습이다. 강에서도 산에서도 희수는 쓰레기를 꼭 줍는다. 희수가 머물다간 자리엔 담배꽁초 하나 남지 않는달까. 오늘 아침에도 나의 분리수거를 매의 눈으로 훑더니 “언니 이건 종이로 같이 버리면 안되요!” 그리곤 야무지게 팩을 잘라 말려버린다. 나도 그녀를 본 받아 알맹상점에 가져갈 것들을 모으기 시작해야겠다.


3. 예쁘게 웃을 줄 아는 사람

이번에 희수와 정말 많은 대화를 하며 희수의 표정이 무언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원래도 경청을 참 잘하는 친구였는데, 이제는 아주 은은하고 아름다운 미소까지 띠고 눈을 맞추어준다. 아니 혹시 이런 것도 멘토링에서 알려주는 거니?!!!


/


굿바이- 여름방학

나의 남은 인생은 이렇게 멋진 사람들 곁에서 함께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야지. 문득 돌아봤을 때 어느새 입꼬리고 올라가는 추억들을 차곡히 쌓아 두어야지.

이상, 빛나는 영감이 가득했던 얼렁뚱땅 여름방학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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