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지금을 기록하는 가치
이 글은 읽는 이를 위한 기록이 아니다. 철저히 기록자를 위한 글이지만 궁금하다면 함께 읽어도 되는 일기장이다. 다만 그대도 나와 같이 해보면 좋겠다고 슬며시 권하고 싶다. 지금의 당신에 관해 적어두어라. 언제 또 이런 생각을 하며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지 모르니까. 언제 또 이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며 행복해할지 모르니까. 유일한 지금이 소중히 남겨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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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내려와 일정의 여유가 있는 날이면 전남여고 옆 골목의 '손탁 앤 아이허' 카페에 들른다. 가족들이 잠시 자기 업무를 보러 흩어진 시간, 냉큼 세수를 하고 노트북을 챙겨 카페로 왔다. 키보드 위 손가락을 일사분란히 움직이며 일을 했을 시간에 마감 기한이 없고 미리 기획하지 않은 글을 흘러 내려가는 대로 쓰려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적당한 당으로 머리를 깨워줄 로얄 밀크티도 잊지 않았고!
기록하는 일을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라 하루하루의 감상을 바로 올릴 수 있는 sns를 잘 활용한다. '월별 정산', '반년 정산'등을 기록하며 어떤 일들이 있었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 정리할 때도 몇 장의 사진과 함께 적힌 글은 매우 유용한 참고가 된다. 다만 sns의 특성에 맞춰 짧아진 글의 호흡과 파편화된 기록물들이 못내 아쉽기도 했던터라 호시탐탐 '나에 관한 긴 글'을 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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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은지에 관한 기록.
지금의 생각, 감정, 습관, 관심사 등에 관하여.
5년 후, 10년 후에 읽으면 꽤 유용할 글.
2021년 기준으로 올해 서른이다.
100세 시대라고 불리는 놀라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어서 내가 어렸을 때 보고 느끼던 '서른'의 언니 오빠들과 지금의 스스로에 대한 체감이 몹시 다르다고 느낀다. 여전히 별 거 가진 것 없는 철부지다.
글과 책, 서점 덕후다.
책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 어제도 '사유의 거래에 관하여(장-뤽 낭시)'라는 책을 읽다가 멋진 문장들을 보며 사랑에 빠진 표정으로 감격하는 스스로를 보았다. 시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니 시집은 한 달에 한 권 정도는 챙겨 읽는 편이고 에리히 프롬을 알고 난 이후로는 그만큼 사랑하는 작가는 없다. 소유가 아닌 존재론적 삶, 불타오르되 소멸하지 않는 떨기나무와 같은 생명력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내 삶의 중요한 영감이다.
지금도 좋아하는 서점에 와서 글을 쓰고 있지만 익숙한 동네를 떠나 여행을 다닐 때도 책방들부터 찾아 놓는다. 우연히 혹은 다분히 의도하여 찾아간 서점에 들어서서 공간을 가득 메우는 책냄새 앞에 킁킁대며 제목 산책을 하는 순간, 그러다 뿅 하고 눈이라도 맞는 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인생이라 여긴다.
여행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더 어렸을 땐 "역마살 꼈냐."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시간만 나면 아니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해외여행을 다녔다. 길게 나갈 수 없을 때는 주말에라도 지역의 구석구석을 쏘다녔다. 코로나 19 시국을 지나면서 매년 타던 비행기와는 작별해야 했지만 혼자 혹은 한 둘의 친구와 비교적 한적한 곳을 찾아내 갑자기 떠나는 여행으로 새로운 재미를 얻는 중이다. 느닷없이 수요일에 전철 타고 계곡을 간다던지, 금요일 오후에 일몰 보러 태안 가는 버스를 탄다던지.
여행할 때 차나 버스에서 노래를 듣는 것을 좋아하고 우리끼리 드라이브라면 찬양을 크게 틀어 놓고 화음을 넣는 것을 특히나 좋아한다. 고음불가의 특권이랄까. 여행은 주로 볼 것이 많은 대도시보단 숲과 강, 바다와 노을이 있는 곳을 선호한다. 맛집 위주로 여행 코스를 짜는 편은 아니라 평점을 확인하며 식당을 찾는 친구들을 진심으로 존경해하며 고마워한다.
보기보다 여유로운 때를 살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살아?", "너 진짜 부지런하다."는 말을 상습적으로 듣는 사람이지만 정작 본인은 내 삶이 정말 여유로운 때에 있다고 생각한다. 고등학생 때는 공부에 허덕이며 보냈고, 대학생 때는 공부하고 공동체 사역하고 봉사 활동하는 시간 외에 남는 시간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제대로 놀고 쉬었던 기억이 손에 꼽을 정도인 것을 보면 일주일에 몇 번씩이나 온전히 쉬고 놀고 있는 지금은 은퇴 후 인생의 황혼기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러니 "너 바쁜데 나 만날 시간 있어?"라는 오해는 말아줬으면 한다. 나는 시간을 아주 잘 관리하는 사람이니까 좋아하는 사람들 만나 웃고 떠드는 것을 분명한 우선순위로 삼기 때문이다. 그저 서로에게 먼저 용기 낸 사람들을 만나느라 다이어리가 미리 채워져 있을 뿐.
시간 사용의 원리(*원래 강령처럼 적어놓고 사는 게 아니라 지금 정리한 것이다.)
1. 나의 존재의 본질에 관한 '중요한 일'은 되도록 매일, 꾸준히 한다.
2. 삶을 정돈하는 '사소하되 급한 일', 가령 음식물 쓰레기를 비우거나 빨래를 돌리고 개는 일, 식물에 물을 주는 일 등은 미루지 않고 바로 한다.
3. 내 영혼과 몸과 마음이 쉴 시간은 스스로의 약속으로 정해 미리 빼놓고 지킨다.
4.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못할 만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쁘게 하는 무언가가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는다면 과감히 놓아주자.
5. 내가 조금 더 부지런해서 우리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일이라면 괜히 게으름 피우지 않고 시작하되, 아무리 나에게 도움이 되더라도 지금은 무리라고 판단하면 단호하게 거절한다. 욕심내지 않아도 할 일 은 언젠가 하게 되어 있다.
지금의 MBTI는 ENFJ
맹신자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어떤 성향인지를 알고 있는 것이 스스로를 격려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정의로운 사회운동가'라고 불리는 엔프제는 일단 시작하면 마무리가 확실해야 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사람을 좋아한다. 인류의 평화를 추구하며 사람들에게 마음을 잘 연다. 추진력이 강하고 기록하는 것을 좋아한다. 칭찬에 신난 고래가 되어 더 열심히 하고 비판에는 꽤나 취약하다.(할 맛? 흥? 이 떨어진다고나 할까.)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하는 약간의 강박이 있다. 힘들어도 티 내지 않고 스스로 감정을 잘 추스르는 편이다. 다른 이들의 문제 해결에 열심을 내며 다른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기뻐한다. 화가 나도 되도록 참는 편이고 그 당시에는 바로 표현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대립과 갈등 상황에 매우 스트레스를 받는다. 정이 많아서 정 때문에 일이 꼬일 때가 있다. 거절을 잘 못해서 맺고 끊는 것이 애매한 상황이나 관계들이 있다. 특히 먼저 친근하게 다가오는 사람을 내치지 못한다. 마음과 행동이 다를 때 표정관리를 못한다.
지기, 희피리, 한나, 은지...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좋아하는 것이 많으니 잔재주도 많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가치는 꼭 현재로 살아내야 한다 생각하고 실행력이 좋아서 뭐든 하고 있다.
청년들이 함께 모여 본인들의 창조성을 발견하고 발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획했던 창신동의 '기쁨곡간'의 곡간지기, 나와 우리가 기쁜 오늘을 만들자며 직장인 세명이 모여 퇴근 후 일을 벌이는 '공간희희'와 '희희'의 희피리, 인터뷰 글과 시 그리고 가끔 이런 에세이를 적는 글 쓰는 한나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 공간과 커뮤니티 기획자, 마케터, 시인, 인터뷰어, 디자이너... 뭐 하나 마스터하는 성향은 못 되지만, 뭐라도 엮어낼 줄 아는 재주는 좋은 듯하다. 아, 피리를 불어 사람을 모이게 하는 일에 가장 자신 있다.
나의 생각을 단단히 하는 것 보다 세심히 듣는 귀를 갖고 싶다.
공간을 하며 많은 사람들을 새롭게 만나다보니 다채로운 삶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나의 색이 분명한 것이 강점이 될 수 있지만 그보다 멋진 것은 관용이고 온유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투자'에 관심이 생겼다.
관심이 없는 영역은 10번 들어도 모를 만큼 마음을 두지 않는다. 그중 가장 관심이 없는 부분이 경제적인 면이었는데 얼마 전 만기가 되어 나온 적금 이자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물가 상승률을 생각하면 땅에 묻어 둔 돈이 마이너스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예전부터 '공부하고 해 봐야지'하며 미뤄두던 주식에 드디어 관심이 가는 순간이었다. 카카오M에서 만든 '개미는 뚠뚠' 프로그램을 모든 시즌을 몰아보며 느낀 것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 사회/경제 구조를 고려했을 때, 지금과 같은 저금리 시대에 '투자'는 불가피하다.
- 초기 자본이나 지식이 비교적 많이 필요한 부동산 투자나 경매는 2030 세대가 진입하기 쉽지 않다.
- 우리는 언제나 일할 곳(직장)과 살 곳(집)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무엇을 대비해야 하는지 살필 수밖에 없다.
- 필연적으로 투자에 몰려들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주식이나 펀드 투자 등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 없다. 어떤 태도와 가치관을 지녀야 하고,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고 운용해야 하는지 모른 채 파란 그래프 빨간 그래프의 부채질에 휘말리는 개미가 되었다.
- 아무것도 모르고 유행처럼 쫓아가기에는 정신적, 경제적 타격감이 클 수 있다. 건강한 접근 법을 배우고 시작해야 한다.
연락과 만남의 성실에 관하여.
뭐 하고 있는지, 밥은 먹었는지, 오늘은 어땠는지, 주말엔 뭐하는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이 정말로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이 맺은 관계(일이든 사람이든)에서 성실을 지키는 것만큼 대단한 능력이 있을까? 오래도록 함께할 존재라면 가장 보통의 때를 함께 보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런 사람을 좋아할 수 밖에!
사람들을 챙기는 나에게 너는 괜찮냐, 요즘 어떻냐 물어주는 사람 앞에선 별 수 없이 눈물이 난다. 내가 좋아하는 아주 작은 것들을 생각나서 챙겼다며 내미는 사람이겐 오래도록 고마움을 느낀다. 내가 감탄한 글 혹은 나의 글을 좋아해 주는 사람은 뭘 해도 일단 용서가 된다. 먼저 별일 없이도 연락하거나 만나자고 하는 심지어 찾아와 주는 사람들은 나도 그 사람에게 더 성실해야지, 용기를 내야지, 되도록 더 오래 봐야지 결심한다. 자주 대화하고 자주 볼 수록 좋아하는, 좋은 사람이 된다. 아주 당연히.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선
자주 생각하지는 않는다. 철이 없으니까! 하지만 경계하는 것들은 있다. 내가 경험한 것이 더 많으니 내 생각이 더 옳다고 여기는 것, 순수하고 맹목적인 열정을 잃는 것,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 보다 겪을 갈등이나 상처를 두려워 하는 것, 희망과 긍정보다 관조와 포기가 빨라지는 것, 사랑에 자존심을 세우는 것.
집 짓고 밥 짓고 노을을 보며 살아야지.
풀 내음을 맡을 때, 높고 푸른 하늘을 볼 때, 강과 바다를 볼 때마다 밀려드는 생각이다. 서울 한복판이지만 뭔가 허름해 보이는 곳, 혹은 서울 외곽에 버려진(?) 집을 고쳐 살고 싶다. 한편엔 내가 살고 한편엔 책방이나 카페와 같은 공간을 두어 사람들을 마나는 것이다. 여럿이 함께 살아도 좋고 따로 살되 지는 해를 마주하고 저녁을 먹다 헤어지는 아지트여도 좋다.
3~5년 안엔 삶의 양태를 바꾸고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 5일, 출퇴근 시간 포함해 하루의 10시간 이상을 ‘회사’라는 단 한 곳의 일터에 쓰는 것이 나에겐 합당하지 않다. 노동의 대가로 얻는 것이 내가 잃는 것들보다 훨씬 작기 때문에 삶의 재 조율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다. 완전한 프리랜서로 살면 오히려 일을 더 많이 할 것 같으니 주 3일 정도는 고정으로 어딘가에 출근하고 하루 1-2일은 내 공간에서 프로젝트를 하고 2일은 뒤도 안 돌아보고 놀고 쉬는 것이다. 물론, 하루에 일하는 시간도 5-6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다.
지금도 마음대로 휴가를 쓰거나 정시 퇴근하는 모습 그리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하는 날 보면서 “너 직장인 맞아? 왜 이렇게 자유로워?”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의미 있고 재미난 일을 하며 멋진 사람들과 팀을 이뤄 회사를 다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더욱 나를 나답게 하는 기쁨의 삶에 시간을 내어줄 필요성을 느낀다.
세상은 여전히 넓으니 부지런히 돌아다니자.
올해 초 운전면허를 땄고 발이 더 자유로워졌다! 파도 주의보를 물리치며 도전한 서핑은 그야말로 신 세계였다. 10월엔 높은 가을 속에서 패러글라이딩에 도오전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