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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한 기쁨주의자 Mar 09. 2023

경계의 최전선에 서려는 어느 의사의 고백. 연결된 고통

북인터뷰. 연결된 고통, 이기병

 우리는 초연결 시대에 살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면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서로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정말로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 든다. 내가 존재한다고 인지한 모습은 정말 그 존재의 실체일까. 그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닿고 싶은 것에만 닿으려 하는 건 아닐까. ‘연대’라는 말 앞에도 구태여 ‘느슨함’이란 사족을 붙여 서로의 부담감을 낮춘 일이 사실은 모두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대가 조명하지 못하는 고통의 변방, 경계의 최전선에서 오늘도 나와 당신을,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들을 연결하고자 노력하는 의사 이기병 그리고 인류의 한 사람인 그의 이야기가 실존의 서사들을 발견해 내고 재연결하는 키가 되길 기대해 본다.



이기병. 연결된 고통 책 저자.

안녕하세요 기병님 오랜만이에요:) 이제 기병 작가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작가님과 책을 처음 만날 독자들을 위해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현재 한림대 춘천성심병원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고 중환자의학과 감염학을 전공한 내과 전문의입니다. 2017년 대학원에서 3년 정도 인류학을 공부했고 아들 둘을 둔 아빠이자 남편이기도 합니다.


‘연결된 고통’ 책은 어떻게 나오게 된 걸까요?

저는 2011년부터 14년까지 외국인 노동자 전용 의원이라고 하는 무료 병원에서 공중보건 의사로 3년 동안 근무했고 일하는 동안 문화적 충격을 받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래도 꽤 좋은 대학과 병원에서 트레이닝을 받았다고 생각했고 내과 의사로서 필요한 것들도 나름 잘 갖춰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진료의 현장 안으로 들어가니 대학에서 배웠던 현대 의학의 프레임만으로는 들어오지 못하는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가진 환자들을 맞닥뜨리게 되더라고요. 환자들의 고통이 제대로 해석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나다 보니 제가 어떤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계속 갖게 되었어요. 풀리지 않은 숙제처럼 저에게 남아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인류학을 공부하며 재해석하고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의 저와 화해하고 싶다는 마음이었죠. 제가 배운 인류학적 견해와 의사로서의 경험들이 서로 경합하고 협력하면서 해결하지 못했던 고통들에 대해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풀지 못했던 문제들을 조금이나 풀어보는 시도를 한 것이지요.


연결된 고통, 아몬드 출판사

“현대 의학의 그릇에 담기지 않는 고유하고 다양한 몸들의 인류학”라는 부제도 의학과 인류학의 협력 속에 탄생한 이름이군요.

고통의 몸을 명확히 담을 수 있는 단일의 완전한 학문 체계가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래서 이 두 가지를 통해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중인 거죠. 고유하고 다양한 몸들의 서사가 누군가에게 해석되고 말해질 때 고통이 경감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목소리를 잃은 고통이 많아질수록 보이지 않는 고통의 총체가 커지면서 고통이 해결될 가능성은 떨어질 수 있는 것이죠. 사실 3년간 외국인 노동자 전용 의원에서 경험한 모든 고통들이 현대 의학에도 인류학에도 완벽히 포섭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 경계에 서 있으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에 스스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쓰신 기간은 코로나19가 극심했던 때이기도 한데요. 감염 내과 의사에게 지난 3년은 참 숨 돌릴 틈 없는 시간이었을 것 같아요. 원래 계획보다 출판이 오래 걸리신 것으로 아는데(웃음) 책을 쓰는 동안 작가님께 계속 이어진 고통은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고통의 총량에 그 부분까지도 합산해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요.(웃음) 제가 대학원에 다닐 때 ‘과학뒤켠’이라는 과학 매거진에 “길 잃은 내과 의사, 인류학의 길을 찾다.”라는 글을 투고한 적이 있는데요. 그 글을 보고 편집자 세 분 정도께 연락을 받았고 그중 한 분이 지금의 아몬드 출판사 대표님입니다. 책을 두 챕터 정도 써놓은 상황에서 코로나가 터졌고 그 이후로는 글을 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모든 의료진들이 정말 고생한 시기이지만 내과 의사로서, 그중에서도 감염 내과 의사는 정말 많지 않으니까요. 대표님께서 인내로 오래 기다려주셨죠. 게다가 글을 쓰려면 그만큼 또 많이 읽어야 하잖아요. 읽고 쓸 시간을 충분히 내기 어려우니 잠을 쪼개면서 겨우겨우 완성한 책입니다.


출.경향신문. 이기병의 신간 '연결된 고통'

책을 읽으며 제가 몰랐던 ‘의사로서의 이기병’의 삶의 배경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매일 피곤한 표정이셨는지…(웃음) 책의 머리말에서도 “내게 오는 환자들의 질환에는 단지 진단명 하나로 압축되지 않는 서사가 있다.”,“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라고 적어주셨었는데요. 책에 담긴 서사를 조금 더 들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의사로서 진료를 할 때는 어떤 프레임이 있습니다. 증상으로부터 진찰을 거쳐 문제가 생긴 국소장기나 부위로 좁혀 들어가 효과적으로 진단과 치료를 할 수 있게 만들어진 시스템이기 때문에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죠. 예를 들어 너무 바쁜 시간대에 찾아오는 어떤 환자들이 진료의 정해진 프레임 안에 들어오지 않고 엉뚱한 얘기를 한다고 생각이 되거나 환자가 말하는 내용이 상식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면 시간에 쫓겨 조금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책에 언급했듯 그런 환자들을 만났을 때 단순히 우리가 정해 둔 프레임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상적인’환자와 ‘비정상적인’환자라고 나누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파서 온 환자인데요. 의료인류학자 아서클라인만은 “정상은 당위와 존재 사이를 압축한다."라는 표현을 했어요.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과 그냥 그대로 있어도 되는 것 사이에 간극을 압축하는 일종의 폭력성이 정상 개념 안에 잠재해 있다는 것이죠. 제가 외국인 노동자 전용 의원에서 3년 동안 만났던 분들은 그렇게 기존의 프레임으로 재단되지 않는 분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처음엔 이렇게 압축되어 들어오지 않는 이야기들이 이해가 되지 않고 고통스러웠어요. 하지만 제가 계속 화만 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환자들이 왜 그러는지 그가 살아온 역사 문화적 배경 속에서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이게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극심했던 코로나 시기가 지나고 조금 더 세계가 활발한 교류를 하고 다문화시대를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시점에서 진료실로 들어오는 외국인 노동자분들의 서사만이 아니라 보다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접할 기회가 많아질 테니까요. 사람이 함께 사는 세상에선 이렇게 부딪히고 아파하는 고통의 문제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자기가 배운 세계관과 학문 체계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들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우리의 고통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지우 시인은 ‘겨울산’이라는 시에서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 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라고 했는데요. 이 세상을 사는 누구나 (최소한 조금씩은) 아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제 책에서 나온 몸들의 서사를 우리가 새롭게 알아가는 일이 자신의 세계를 넘어서 보고 다양한 서사에 대한 이해를 진작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보고 있습니다.


고통을 해결하고 해석하기 위해서 우리가 넓혀야 할 프레임, 넘어서야 할 자기만의 세계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단일한 진단명일 수도 있고 어떤 효율과 구조의 문제일 수도 있고 일평생 당연하게 여겨온 상식의 문제일 수도 있고요. 작가님께서 스스로의 프레임을 넓히며 다양한 서사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작업들이 작가님의 삶의 서사엔 어떤 변화를 줬는지 궁금합니다.

한 번 병원에 오면 8곳, 9곳이 아프다고 하는 환자들을 만나며 그들이 가진 서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의사로서 제가 가진 한계였어요. 제가 느끼기에 의학은 다른 학문적 지평에 있는 것들을 의학적인 지평 안에서 소화할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오히려 대화가 더 쉽지 않은 지점이 생기죠. 해결되지 않는 고통의 문제들을 겪고 나서 ‘아, 이것은 내가 무지해서 생긴 일이구나.’라고 깨닫고 제가 배운 의학의 프레임에 모든 몸들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부가 필요하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인류학을 공부하게 된 것이고요.


아울러 저는 의학 교육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어요. 후배 의사들이나 의료진, 의료 사회에 보다 다양한 종류의 콘텐츠가 있으면 좋겠다는 고민이 들어 진학한 것이죠. 직간접적으로 교육에 참여함으로써 후배 의사들과 의료진들에게 프레임 밖 혹은 경계의 이야기들을 더 나누고 싶습니다. 이런 부분이 저한테 있는 변화 중에 하나겠죠.


개인적으로는 옴에 걸린 센터 환자분들 얘기가 기억에 남아요. 코로나19가 생각나는 부분도 있었고요. 전염성을 지닌 질병은 인류의 역사상 계속 있어왔고 앞으로도 어떤 형태로든 발생할 수 있을 텐데요. 물리적 격리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운 질병에 있어서 인류는 서로에게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요? 환대란 걸 할 수 있을까요?

질병이 달라지더라도 환대의 정신이 변하진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대로 인류 역사상 전염성이 있는 질병은 지속되어 왔지만 질병의 원인이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나 전염력이 가능한 지점이란 것에 대해 아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도 굉장히 오래 걸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질병을 대할 때 전염성을 가진 원인균을 감별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그 질병이 생긴 환자를 보게 되는 겁니다. 옴이 아니라, 옴에 걸린 환자라는 은유가 달라붙습니다. 그 병이 생길 만한 환경에 대한 상상력, 그러니까 질병 이상의 것들로 전염성을 표현한다고 생각해요. 그 지점에서 환대가 힘들어지는 것이죠. 사람은 그 자체로 환대받을 수 있는 것인데, 병이나 전염성 자체만 지나치게 강조되는 맥락이 먼저 와닿게 된다고 생각해요. 질병과 전염력 그리고 환자를 따로 떼어 생각하기엔 어렵겠지만 환대라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어떤 병을 갖고 있던 어떤 감염력을 갖췄던 기본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적절한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먼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에서 ‘병원의 암묵적인 3분 컷 룰’을 언급해 주셨는데요.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설명하기엔 빠듯한 시간이죠. 병원이 좀 더 따뜻한 환대의 장소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 보다가 어쩌면 의사들에게도 빠르게 돌아가는 진료시간이 고통의 연속들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환자뿐만 아니라 의사에게도 병원이 따듯한 환대의 공간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환대받지 않은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환대하긴 어려우니까요.

정확하게 짚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환자도 그렇지만 3분 진료하는 의사는 행복할 수 없어요. 결국 3분 진료 시스템은 의사도 환자도 원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 재조명되어야 하죠. 의료를 시스템과 거버넌스의 문제에서 다시 톺아 볼 필요가 선명해지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예를 들어 의학에는 ‘근거 기반 의학(Evidence based medicine)’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말 그대로 근거에 기반해 의학적 실천의 정당성과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입니다. 미국식 의료에서는 이를 최고의 치료 방식을 결정하는 경합의 방법론으로 이해합니다. 다만 치료에 소요되는 비용이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한계 등이 ‘치료 성적 향상의 중요성’만큼 깊게 논의되지 않아요. 반면 영국 같은 사회주의적 의료를 표방하는 나라에서는 근거 기반 의학이 제시하는 내용을 공중 보건 시스템 안에서 자원을 어디에 우선 배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연결 짓습니다. 의료를 선택하는 폭을 넓히는 것, 치료 성적이 향상되는 것은 의료 자원이 고루 분배되는 것 다음의 문제가 됩니다. 우리나라는 이 둘 사이에서 이도 저도 아닌 형태로 걸쳐 있습니다. 의료 재화를 ‘공공’의 영역으로 보고 소비에 있어 (의료보험 등으로) 사회주의적 의료 제도를 표방하지만, 막상 의료 공급자들은 의료 시장에서 경쟁을 통과해야 합니다. 3분 진료는 값싼 의료를 제공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의료의 기획이, 시장 논리에 의해 경쟁해야 살아남는 의료의 공급과 맞물려 벌어진 현상입니다. 한마디로 제도는 사회주의적인데 현장은 자본주의적이라는 의미인데, 둘의 장점을 취하면 좋겠지만 그러기보다는 단점이 가시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의사 개인, 소비자(환자)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거버넌스 차원에서 고민을 성숙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책에서 얘기했듯 ‘돌봄 의료’라는 차원과 깊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질병이 복수 형태로 존재할 때 생기는 문제 중 실질적인 것은 한 사람의 확률을 총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관점 돌봄의 부재다.”라고 얘기를 하셨었는데요, 저도 최근에 치매인 할머니를 돌보는 지인과 함께 돌봄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게 됐어요. 현재를 살아가는 40대의 이 기병으로서 고민하게 되는 돌봄의 문제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돌봄은 모든 인간에 근원적인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돌봄으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누군가를 돌보거나 혹은 돌봄 받지 않아도 되는 존재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죠. 또 대등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을 상정할 때 거기에 돌봄 개념이 빠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민주 서구 사회의 가장 큰 평등과 자유에 대한 기초를 놓았던 이론 중에 존 롤스의 정의론이 있습니다. ‘Egalitarian Liberalism’, 평등주의 우호적 자유주의라고 해요. 서구 사회나 일반적인 시민사회가 롤스의 의견 위에서 건설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향력이 엄청난 사람인데요. 롤스는 시민사회에 기초를 놓는 가장 기본적인 한 사람의 자리를 대등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으로 상정합니다. 여기서부터 오류가 생겨요. 돌봐지는 자와 돌보는 자는 사실 대등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거죠.


내가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엄마라면 그 돌봄으로 인해 돌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과 평등하고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이런 사람들에 관한 관점을 시민사회의 제일 기본 개념에 들어가지 않게 상정했다면 당연히 그 사회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복지사회라는 말은 그렇게 문제가 생긴 대등하고 자유롭지 못한 이들에게 대등하고 자유로운 이들이 뭔가 줘야 된다는 것, 수혜자와 시혜자가 존재해요. 그렇게 해서는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에 반대되는 개념이 돌봄 국가예요. 돌봄 국가는 돌보고 돌봐주는 게 너무 당연한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초가 달라져요. 누구나 돌봄을 받아야 되고 돌보는 사람에게 필요한 자원을 공급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 안엔 이 부분에 대한 오해가 있고 돌봄 자체가 평가 절하되어 있어요. 돌봄 노동은 굉장히 저임금화되어 있어서 아무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앞서 말한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를 이루는 데 제일 중요한 노동인데 사회가 돌보는 사람들의 입장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당해야 할 부작용이 상당히 크다고 느낍니다.


저출생이라는 맥락은 결국 돌봄과 교육이라고 하는 테마에 엄청난 돈과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인데 그것이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인 것이기도 한 것이죠. 이런 것들이 다 총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말 그대로 연결된 고통들이죠. 그러니 돌봄을 해결하기 위해선 인식의 변화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돌봄이 우리에게 필수적이고 원초적인 것이라고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주어진 것으로요. 80세까지 살게 된다면 20세까지는 경제적 자립을 못했을 가능성이 높으니 자유롭고 평등하지 않았는데 또 60이 넘으면 몸의 노화나 고통으로 인해 자유롭고 평등하지 않은 거예요. 인간은 결국 평생 돌봐지거나 돌봐야 되는 겁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사는 게 더 문제인 거죠.


다음 책을 몸에 드러난 돌봄에 대한 내용들로 쓰셔도 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작가님이 생각하시기에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돌봄의 영역들이 있나요?

이 나라가 복지 국가를 지향할 수는 있어도 돌봄 국가를 지향하기엔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들어요. 국가적 시스템 혹은 사회가 해야 하는 돌봄의 영역이 가장 부재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과 가족 내로만 떠밀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돌봄을 어떻게 재분배하는가, 돌봄의 다각적 면모를 볼 수 있는가를 돌봄의 사회적 논의라고 부르고 싶은데요. 돌봄을 한 개인과 가족의 문제에서 전체 사회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논의의 장이 더 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공론장에는 고통받는 피돌봄자와 돌보는 자가 모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말했듯 가장 문제는 내가 돌봐주는 것과 돌보는 것 사이에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내가 돌보고 있는 누군가가 당장에 없거나, 나를 돌보는 누군가가 지금 없기 때문에 돌봄이 나에게 필요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조금 더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 공론장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결된 고통’ 속에 등장하는 고통들이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작가님께 새겨진 하나의 새로운 서사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돌봄을 우리의 것이자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려면, 타인의 고통이 나와 무관한 고통이 아니라 총체적 고통 속에 내가 포함되었다 생각하려면 우리는 무엇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요?

상당히 큰 질문이면서도 실질적인 질문입니다.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하고요. 제가 책에서 구체적인 적용 방법까지 쓰기 어려웠던 이유는 사람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다만, 어떤 종류의 고통은 단지 그 부분이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 경감됩니다.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가끔 저희 둘째 아들한테 화가 나요. 말도 잘 안 듣고 장난만 치는 아들을 보며 화가 나다가도 스스로를 들여다봐요. ‘이 조그맣고 귀여운 애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내가 이렇게 화를 내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이 상황에 대해 이렇게 화가 나는 이유가 아들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일 수도 있겠다, 제 안에 해결되지 않은 무언가가 건드려지고 그것이 아들에게 투사하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싶어요. 그렇다고 해서 화가 안 나는 것은 아니지만(웃음) 최소한 이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논의의 지형이 달라지는 것이죠. 이해되지 않은 고통이지만 한번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나 싶은 전환 같은 거요. 제 책을 읽으실 독자들이 그렇게 한 번씩만 작은 생각의 전환이 일어난다면 저는 고통의 총량이 격감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고통받는 것만 실재한다."라는 견해에 동의하는 편이라고 책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허구에 봉사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고통의 총체를 파악하려면 저들의 고통과 나의 고통을 나눠 재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모습은 결국 누군가의 고통이 목소리를 잃게 만들 것이고 그러다 보면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도 이해받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조금 더 의지를 개발해서 서로의 역사, 사회, 문화적 배경을 알려고 하는 일이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좀 더 집요한 독자의 입장이 되어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실재하는 고통의 존재들을 어떻게 알 수 있는데요?”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변해 주실 건가요?

때로는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조금만 돌아봐도 고통받는 존재들이 눈에 보인다고 생각해요. 내 고통이 너무 커서 다른 이들의 고통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수전 손택이 한 말인데요,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행동 중에 하나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한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관심의 대상, 스펙트럼을 넓히는 일이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어떤 한 가지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되면 그 안에서 조금 더 알게 되고 연결된 다른 세상도 알게 되는 것이지요. 모든 고통을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발견된 지점들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들을 시도해 보기도 하는 거고요. 힌트처럼 하나씩 주어지는 부분들을 풀어가며 조금 더 나은 답을 만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문제가 주어졌을 때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지점을 명확하게 안다면 그것을 하면 됩니다. 다만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산다면, 자기의 문제의식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방식은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니까요.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방식은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인류학을 공부하며 새로운 문제들을 발견하고 결합시켜 간 것처럼요. 공부를 하게 되면 공통 공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습니다. 사회학자 김홍중 교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고뇌의 공통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 공통의 논의장을 만들어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서로에게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우리가 공동체라는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감각은 노력하거나 공부하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 것 같아요.


조금 더 근원적인 얘기를 던지자면, 무언가가 불편할 때, 이건 좀 아니라고 느낄 때, 이해가 안 되거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생기면 그 지점에서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 진지해지려고 하고 더 정면으로 부딪혀 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다음에 보이는 것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보통은 거기서 멈추게 되죠.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멈추지 않으면 피곤해지니까요. 하지만 그다음, 또 다음 단계로 나아갈 때 더 열리는 세계들이 있고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는 것을 마주하게 됩니다. 예컨대 외국인 노동자 전용 의원에서 생긴 의문들 때문에 저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고 그것이 실제로 더 나아가는 방식을 제안해 주었습니다. 연결된 것이지요.


고통의 문제와 연결되려는 의지가 새로운 고통의 세계와 연결되고 보다 다양한 실존들을 맞이하게 된다는 지점에 너무나도 동감합니다. 저도 관심을 두는 주제의 책을 읽다가 관심의 분야나 깊이가 확장되는 경험을 종종 하는데요.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그렇게 관심의 영역과 배움을 확장해 갈 수 있도록 추천해 주실 책이 있으신가요?

일단 조금 층위를 나눠보죠. 독자분들 중에 아픔과 고통을 겪고 있거나 그들을 돌보는 상황에 있는 분들이 고통에 대해 표현하거나 그 서사를 이야기하기 어려울 때 추천하는 책은 아서 클라인만이라고 하는 의료 인류학자이자 정신과 의사가 썼던 <우리의 아픔엔 서사가 있다.>라는 책입니다. 그리고 또 한 권은 <케어>라는 책인데 이 책은 의사이자 치매에 걸린 아내를 간호하는 돌봄자로 쓴 기록입니다.


두 번째는 시의성을 가진 사회적 이슈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이 있다면 <수용소>라는 책을 추천합니다. 제 책에도 언급된 미시사회학자 어빙고프만의 책인데요, 자아와 훈육, 통제와 연관된 삶의 사회적 측면에 대해 이야기를 잘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요양병원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됐어요. 우리가 서로를 돌보고 서로를 격리시키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가고자 한다면 이 책은 참고할 만한 포인트가 된다고 생각해요. 거대 담론이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에 의해 이 사회가 좌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아울러 고프먼은 권력의 규정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아 감각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하는데, ‘개인을 자유롭게 유지시키는 돌봄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했습니다.


세 번째는 김홍중 교수의 <사회학적 파상력>이란 책인데요. 이 책에 등장하는 현장 증언적인 얘기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적대해야 하고 어떤 정치적 영역을 가지며 움직일 수 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제 은사이기도 하신 이현정 교수님의 <우리는 왜 타인을 욕망하는가>라는 책입니다. 타인 지향적인 삶 말고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죠. 이 지점에서 질문이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있을까, 이 사회가 이룬 배경이 나를 만든 것은 아닐까,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있나.’와 같은 것들이죠.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과연 정말로 나의 선택이며 나에게 존재했는지 의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느끼는 사회-문화적 고통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어려워 보이는 이야기지만 이현정 교수님이 책에서 굉장히 쉽게 이야기를 해주고 계시니 꼭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책의 맺음말에 “누군가는 경계에 서 있어야 한다."라는 말이 큰 울림이었습니다. 침대 위에서 보는 유튜브 밖 세상이 될 수도 있고 기존의 안락했던 무엇으로부터 뛰쳐나가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작가님이 앞으로 더 나아갈 경계의 부분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현재 의학과 인류학 사이의 경계에 있어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인류학자들 틈에선 굉장히 의사 같고 의사들 틈에선 신출내기 인류학 도로 보일 거예요. 그러니 저는 계속 연구 중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경계가 더 있는지에 대해서 계속 관심을 가지고 보려고 합니다. 의학과 인류학 사이의 경계처럼 계속해서 생겨나는 경계들에 서 있으려 노력하는 것 자체가 시사성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고통’이 발생하는 층위도, ‘연결’이 가능해지는 접점도 일종의 ‘경계’입니다. 저는 주로 학문적 경계를 말씀드리고 있기는 하지만 이 경계에 대한 상상력과 감수성은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제가 패혈증을 예측하는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AI 회사에서도 근무를 하고 있는데요, 사망률이 46% 정도에 해당하는 패혈증 환자를 유일하게 살릴 수 있는 현대의학적 방법은 최대한 빨리 조기 진단 치료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질병 자체가 원인과 결과가 명확하지 않은 복잡한 질병이기 때문에 AI와 같은 현대 기술을 활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때로 꼭 필요하지만 상충되거나 긴박한 논의들이 서로 부딪히기도 하는데 인공지능과 의학의 담론이 연결되는 지점에서 끊임없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집중력 있게 목표를 발견하고 합리적 대화를 위한 경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도들 안에서도 경계에 대한 감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예를 들어 보았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 책을 작가가 아닌 독자로 처음 접했다고 생각하신다면, 누군가에게 뭐라고 추천해 주실 건가요? 안 하신다는 단호함은 거절합니다.(웃

하하하. 사실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요. 그러면 출판사 대표님이 슬퍼하실 것 같고 제 책을 누군가에게 추천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내가 느끼는 고통을 이야기했는데 정확히 이해받지 못한 경험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황스럽고 화도 나고 ‘세상은 원래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될 때가 있지요. 그런데 이 생각에서 머무르지 않고 내가 누군가의 고통을 들었을 때 적어도 그보다는 더 잘 반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드신다면, 고통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참고가 될 만한 서사나 예시가 필요하시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또 고통을 이해받지 못했던 이전의 자신에 대한 위로가 될 것 같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고통받고 있거나 고통받는 이의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의미가 있는 예시나 힌트가 될 책! 한번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소개하겠습니다.



에필로그.

 기병님과의 인터뷰 인터뷰는 약 2시간, 총 40여 페이지의 녹취본이 나왔다. 43페이지를 27페이지로, 27페이지를  다시 7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줄여갔다. 이번 인터뷰 기록은 읽기의 편리성을 위해 내용을 정돈하는 에디터로서 보다 현장의 증언을 들었던 기록자로서의 정체성이 살려 내려했던 글쓰기였다. 그만큼 내가 들은 풍부한 서사들을 덜어내는 일이 아깝고 아쉬웠다.


"누군가는 경계에 서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말한 대로 살아가려는 기병님의 삶이 내가 앞으로 서 있어야 할 경계들을 명확히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모두 경계에 서있다. 단 하나의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 삶의 부분 사이, 당신은 스스로를 어떤 총체에 두고 이해하고 있는지 가늠해 보고 싶다면, 이 책을 반드시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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